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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낙관주의 → 낙관주의와 희망 항이 있음.

‘주님 승천 대축일’은 또 하나의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이 세상에서 맡겨진 과업을 수행하도록 우리를 격려해주시는 그리스도께서 천국에서도 똑같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사랑하는 지상에서의 삶이 결코 마지막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사실 땅 위에는 우리를 위한 영원한 도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올 도성을 찾고 있습니다.” (히브 13,14) 그곳은 우리가 영원히 살아갈 불변(不變)의 집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편협하게 제한해서 해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승에서의 우리의 삶이 불행하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우리가 오로지 다음 생에서의 보상을 기다리는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승에서도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오직 하느님 당신만이 주실 수 있는 완전히 다른 행복에 대한 열망으로 우리가 행복하기를 소원하십니다.

이승의 삶에서 이뤄지는 초자연적인 현실의 묵상, 우리 영혼 안에 깃드신 은총의 활동,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불러오는 이웃에 대한 사랑, 이 모든 것들이 이미 천국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성장해가도록 운명 지어진 ‘출발’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의 삶과, 천국에서의 삶, 이 두 가지 삶을 살아가는 일로부터 결코 물러설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모든 행동이 하나로 모아지는 강력하면서도 단순한 일치를 이뤄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필리 3,20) 인 동시에 완벽하게 이 땅의 시민입니다. 땅의 시민은 고난과 불의와 몰이해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이란 진실을 깨달음으로써 기쁨과 평화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꿋꿋하게 우리 하느님을 섬깁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인류를 구원하는 그리스도인의 군대가 수적으로, 또한 신심 면에서 불어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관상(觀想)하는 영혼이 됩시다. 그래서 하루를 시작하는 첫 생각부터 마지막 생각까지 언제나 쉬지 않고 우리 하느님과 끊임없이 대화합시다. 우리의 마음이 항상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게 합시다. 우리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께 나아갑시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서 아버지와 성령께 다가갑시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승천이 우리 영혼에 어떤 슬픔을 남겨 준다면,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분의 어머니께 가도록 합시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 (사도 1,12-14)

그리스도인의 기쁨 

교회가 우리에게 제시한 주제를 다시 봅시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육신과 영혼이 함께 천국에 가셨고 천사들이 기뻐합니다. 천상 낙원에서 성모님을 기다리셨던 그분의 가장 순결한 배필 요셉 성인께서 얼마나 기뻐하셨을지 저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남은 우리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요? 바로 여기 현실의 삶에서 우리는 모두 순례자요, 여행자라고 우리의 신앙은 말해줍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몫은 희생과 고통, 가난 중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내딛는 발걸음은 기쁨의 율조로 새겨져야 합니다.

“기뻐하며 주님을 섬겨라” (시편 100, 2) 주님을 섬기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하느님은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2코린 9,7) ‘기쁘게 주는 이’란 온 마음을 다해 희생하며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사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낙담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이런 낙관주의가 도에 지나치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단점과 실패들에 익숙해 있지 않나요? 고통과 권태, 배은망덕, 그리고 심지어 증오조차도 우리에겐 낯설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존재들이라면, 우리 인간의 본성에 항상 따라붙는 이 고통의 동반자들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끈질기게 마주치는 고통과 좌절, 슬픔과 고독을 그냥 무시해버리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순진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너무도 확실하게 가르쳐줍니다. 삶의 이러한 수긍할 수 없는 일면들이 결코 눈먼 운명 때문이 아니며, 하느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의 운명은 행복에 대한 열망을 스스로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은, 우리 주위와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하느님의 뜻하심이 깃들어 있으며, 그 모든 것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초대를 담고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물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존재에 대한 이러한 초자연적인 이해가 인간 삶의 복잡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초자연적 이해는 오히려 인간 삶의 이런 복잡성도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 찰 수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또한 유쾌하지 못한 삶의 표면(表面)을 넘어서면 절대로 파괴되지 않는 강한 유대(紐帶)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해줍니다. ‘파괴되지 않는 강한 유대’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천국에서 누릴 최종적인 삶이 서로 굳게 이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은 이 기쁨에 찬 희망의 근거를 우리가 인정하도록 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순례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어머니가 우리보다 앞서가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가신 그곳에서 우리들의 노력에 대한 보상을 미리 보여주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말해주십니다. 우리가 성실하다면 우리는 천국의 집에 도달할 것입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우리의 본보기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당신이 우리 어머니이심을 보여주세요” 하고 그분께 간청한다면, 성모님께서는 어머니의 돌보심으로 당신 자녀들을 보살펴주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