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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사제직 →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 항이 있음.

거룩한 은총의 성사들 

진실로 투쟁을 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교 2천년 역사에서 절대 변하지 않은 유용한 방법을 써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이고, 고행이고, 또한 자주 성사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행도 역시 기도지요. 육신의 감각으로 드리는 기도니까요. 그래서 추려보면, 이 방법은 두 단어로 얘기할 수 있습니다. 기도와 성사입니다.

이제 성사(聖事)에 관해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성사는 하느님 은총의 근간입니다. 성사는 하느님의 사랑 넘치는 친절하심을 확인하는 경이로운 증거입니다. 트리엔트 공의회가 내린 교리의 정의를 조용히 묵상해봅시다. “성사란 은총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그 은총을 우리 눈앞에 가져다 놓고 선포하는 일종의 감각적인 징표이다.” 우리 주 하느님은 무한(無限)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다할 줄 모르며, 우리를 향한 그분의 온화함과 다정하심은 한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그리고 무상으로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일곱 개의 효과적인 징표를 세우셨습니다. 그 일곱 가지 징표(칠성사)는 안정감 넘치고 간단하며 쉬운 방법으로 인간이 구원의 공로를 나눌 수 있게 해줍니다.

만약 성사를 포기한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특히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사에 대해 잊은 듯이 보이며, 성사라고 하는 이 그리스도 은총의 흐름을 비웃기까지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른바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이러한 상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니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우리는 말해야만 합니다.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 우리가 더욱 감사하고 사랑하면서, 이들 성사의 원천에 다가서도록 용기를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조금도 느끼지 않고 갓 태어난 자녀의 세례를 미루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정의와 사랑에 심각하게 맞서게 됩니다. 세례를 미루는 것은 신앙의 은총을 자녀들에게서 빼앗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원죄로 얼룩진 세상에 태어난 한 영혼 안에 깃들어 계신 복된 삼위일체의 엄청난 보물을 앗아가는 까닭입니다. 아울러 그들은 견진성사의 참된 본질도 바꾸려 듭니다. 거룩한 성전(聖傳)은 이견 없이 견진성사를 영적 삶을 굳세게 해주는 성사로 받아들입니다. 견진성사는 더욱 많은 초자연적인 힘을 영혼에 부여합니다. 조용하면서도 풍요로운 성령의 강림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군대(milites Christi)’답게 싸울 수 있게 해줍니다. 그 싸움은 이기심과 온갖 유혹에 맞서는 스스로의 은밀한 전투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느님의 일에 대한 감수성을 잃어버린다면, 고해성사의 가치를 인정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고해성사는 인간과의 대화가 아닌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고해성사는 하느님 정의(正義)의 법원(法院)인 동시에, 특히 하느님 자비의 법원입니다. 그 법원에는 사랑 넘치는 재판관이 계셔서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에제 33,11)

우리 주님의 다정하심은 정말로 무한합니다. 그분이 당신의 자녀들을 얼마나 친절하게 대하시는지 보십시오. 그분은 결혼을 거룩한 결합으로 만드셨고, 그리스도와 당신 교회가 일치를 이루는 상징으로 삼으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 가정의 근간이 되는 위대한 성사로 만드셨습니다. 혼인성사로 이뤄진 그리스도인 가정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은 평화와 화합의 장소여야 하고, 또한 성덕(聖德)의 학교여야 합니다. 부모는 하느님의 협력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부모를 사랑해야 할 의무를 가집니다. 몇 년 전에 제가 썼던 것처럼, 부모를 사랑하라는 네 번째 계명을 십계명 중 가장 사랑 넘치는 계명으로 설명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거룩하게 결혼생활을 한다면, 여러분의 집은 평화와 기쁨 가득한 밝고 즐거운 가정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삶으로 부르십니다 

우리는 갈바리아산의 그 드라마를 다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감히 설명하건대, 예수님께서 죽으신 갈바리아산의 그 드라마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거행된 최초의 미사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죽음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신 예수님은 당신에게 사형선고로 내려진 십자가를 껴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희생은 당신 아버지에 의해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희생의 결과로 성령께서 인류에게 강림하신 것입니다.

수난의 비극은 우리의 삶과 전체 인류의 역사에 성취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성주간이 단순한 기념시기가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성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우리 영혼 안에서 끊임없이 활동하는 그 무엇인가로 여기고 묵상하는 시기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제2의 그리스도이자, 그리스도 자신(alter Christus, ipse Christus)이 되어야 합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 모두는 우리 삶의 사제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1베드 2,5) 사제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순명을 드러낼 수 있으며, 따라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사명을 우리가 계속 이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곧바로 우리 자신의 비참함과 개인적인 타락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 때문에 낙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비관주의자가 되어선 안 되며, 우리의 이상을 버려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처한 현재의 상황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당신의 삶을 더불어 나눔으로써 우리 삶이 거룩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요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곧잘 ‘거룩함’이란 헛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거룩함이란 결코 성취할 수 없는 것이고, 왠지 수덕신학(修德神學)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 거룩함은 실질적인 목표도, 살아있는 실재(實在)도 아닙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서로를 설명할 때 “성도(聖徒)”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모든 성도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로마 16,15)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사는 모든 성도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필리 4,21)

지금 갈바리아산을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지만 그분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나타내는 표식은 아직 없습니다. 성금요일은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살기를 원하는지, 진정 거룩하게 되길 원하는지 성찰하기에 좋은 시기입니다. 그리고 신앙을 행동에 옮김으로써 우리의 연약함에 맞설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으며 우리가 매일 하는 일에 사랑을 쏟겠다고 결심할 수 있습니다. 죄의 체험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성장해야 합니다. 또한 더욱 충실해지고 진정으로 우리 주님과 하나가 되겠다고 더 깊이 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주님의 사도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주신 사제로서의 사명을 꾸준히 수행해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들 각자에게 주신 사제의 사명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도록 격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과 인간의 역사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만족을 위한 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사명 받음’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도록 초대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되새겨보았습니다. 베드로 성인은 하느님이 주신 이 계명에 응답하면서 구약 성경의 구절을 통해 그 의미를 솔직담백하게 설명했습니다. “선택된 겨레이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1베드 2,9)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 삶에 깊이 뿌리내린 거룩한 현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명확한 전망을 갖게 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동하겠다는 의지가 강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순례가 지속적인 봉사로 드러나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봉사는 각자가 처한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수많은 방법으로 이루어지지만, 언제나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그 동기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개인의 명성과 야망 같은 사소한 대상들을 잊어버리는 것을 의미하며, 심지어 박애주의나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한 연민 같은 더 고귀한 목표들조차 잊어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보여주신 사랑의 충만함을 향해 나아가겠다고 우리의 마음 깊이 갈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비에 함께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태도의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오로지 경건한 실천의 집합체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경향은 경건한 실천과 일상의 삶이 처한 환경들 간의 관계를 깨닫지 못한 데 따른 결과입니다. 일상의 삶이 처한 환경에는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응하고 불의(不義)를 바로잡아야 하는 시급함이 포함됩니다.

제 생각에는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그리스도 강생(降生)의 의미를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인간의 육신과 영혼과 목소리를 취하셨습니다. 우리와 운명을 나누셨고, 심지어 끔찍한 죽음의 고통을 체험하시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인간 세상에서 낯선 사람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일부러 그렇게 생각하려 하지는 않았겠지만요.

또, 어떤 사람들은 인간적으로 그리스도교 교리의 몇몇 핵심 부분들을 무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기도 생활이 마치 인간의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거나 세상을 버리는 일이나 되는 것처럼 굴어댑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사랑과 봉사의 최고 수준을 보여주신 분이 다름 아닌 예수님이란 사실을 잊은 것입니다. 죽음에까지 이르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만 고난과 무관심에 우리 스스로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오로 성인은 에페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모여라 (Instaurare omnia in Christo)’ 라는 좌우명을 주었습니다.(참조 에페 1,10) 그리스도를 모든 일의 중심으로 삼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영성으로 모든 것을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 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요한 23,32) 그분의 강생을 통해, 나자렛에서 하신 당신의 노동과, 유다와 갈릴래아에서 베푸신 가르침과 기적을 통해,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우주의 중심이 되셨습니다. 또한 모든 피조물의 맏물이자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과업은,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그리스도께서 우주의 왕(王)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회 각계각층에서 당신의 사람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회와 떨어져서 세속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도록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의 모범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우리에게 되새기도록 요청하십니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제직의 직무를 맡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곳, 각자가 일하는 세속의 일터에서 올곧게 계속 머무르기를 원하십니다. 공장에서, 실험실에서, 농장과 무역 현장에서, 그리고 대도시의 거리와 산길에서 말입니다.

이와 관련해 저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과 나누신 그리스도의 대화를 곧잘 떠올립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걷다가 두 사람을 만나십니다. 그들은 거의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슬픔을 이해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당신이 마음속에 지니신 삶의 일부를 그들에게 전하셨습니다.

마을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계속 가시려는 듯했지만, 두 제자들은 길을 멈추고 자신들과 함께 머무르시도록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예수님께서 빵을 쪼개셨을 때 두 제자는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봤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셨다.”고 그들은 소리쳤습니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루카 24,32)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 속에 그리스도가 계시도록 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아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향기” (2코린 2,15)를 느낄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그분의 제자들로부터 그들의 스승님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직 : 우리 주님과 함께하는 구원사업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묵상하는 영혼은 사도적 열정으로 충만해집니다. “내 마음이 속에서 달아올랐고, 내 생각에 활활 불이 타올랐다.” (시편 39,4) 이 ‘불’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불’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루카 12,49) 이것이 바로 기도를 통해 힘을 얻는 사도적 열정의 불길인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여된 ‘평화를 위한 전투’라는 소명을 이루기 위해 기도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부르심을 받은 ‘평화를 위한 전투’란 그리스도의 고통을 더욱 필요로 하는 것들을 채워나가기 위해 세상 모든 곳에서 펼쳐지는 분투를 뜻합니다.

우리가 본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나 열두 사도들이 그분과 친교를 맺은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기도와 성체 안에서 예수님과 친교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도적 열정에 불타오를 수 있습니다. 사도적 열정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봉사하게 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구원하게 하고, 그가 어디를 가든지 평화와 기쁨의 씨앗을 뿌리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봉사’는 사도직의 모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에만 기댄다면, 우리는 초자연적 차원에서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도구가 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이루어낼 것입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필리 4,13) 한없이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적당하지 않은 도구를 쓰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에게 다른 목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사도 안에 오셔서 사도를 통하여 일하시도록 하는 것 이외에 다른 목표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신을 온전히 내맡김으로써 한 피조물을 통해, 즉 당신께서 선택하신 영혼을 통해 주님의 구원사업을 이루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 명의 사도, 그가 곧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세례를 통해서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나무에 접붙여지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는 견진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음을 알게 됩니다. 견진성사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서의 활동으로 하느님을 섬기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들이 가진 보편 사제직입니다. 이 보편 사제직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어느 정도 더불어 나누도록 합니다. 보편 사제직은 사제가 지닌 직무 사제직과는 본질적으로 다르지만, 그리스도인에게 교회의 흠숭지례에 참여하는 자격을 부여합니다. 또한 기도와 보속을 통해 말과 모범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도록 도울 수 있는 자격을 얻게 합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리스도 자신 (Ipse Christus)’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인간을 이어주신 중재자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과 함께 아버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봉헌하기 위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한가운데서 하느님의 자녀로 부르심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자신만이 거룩하게 되기 위해 노력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길로 나아가, 그 길들이 모든 장애물을 넘어 인간의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는 길이 되도록 변화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평범한 시민으로서 모든 세속적 활동에 참여할 때 우리는 밀가루 반죽을 변화시키는 누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순수하게 인간적인 모든 존재들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주셨습니다.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이 사실을 독특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오셨던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분이 머물던 곳인 지상으로부터 천국으로 다시 돌아가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승천하시던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하나로 합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에 우리는 장엄하게 선언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선고된 판결이 거두어졌고, 우리를 타락하게 한 결정들이 취소됐다고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라는 말씀을 들은 바로 그 인간의 본성(本性)이 오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 올라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이 세상이 거룩하게 될 수 있다는 말씀을 여러분께 반복해서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겐 세상을 성화(聖化)하기 위해 수행해야 할 특별한 역할이 있습니다. 우리는 인류가 세상을 더럽힌 죄의 정황(情況)들을 씻어내 이 세상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 봉헌으로 이 세상을 우리 주님께 바쳐야 합니다. 이 세상을 주님께 드리려면, 당신의 은총과 우리의 노력을 통해 그분께서 받으실만한 세상이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모든 인간 존재는 초자연적인 중요성을 지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이 완벽한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으며, 당신의 현존과 당신께서 직접 하신 일들로 이 세상을 축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세례 때 우리가 받은 위대한 소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영혼을 구원해야 하는 이 과업을 우리 어깨 위에 나누어 짊어지도록 재촉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