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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성 요셉 → 성 요셉와 주님 관계 항이 있음.

요셉과 예수님과의 관계 

저는 얼마 전부터 요셉 성인께 바치는 감동적인 기도문으로 즐겨 기도드려 왔습니다. 미사를 준비하는 기도문으로 교회가 우리에게 권고한 것입니다. “은총 받으신 행복한 성 요셉이시여, 당신은 하느님을 뵙고 그분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허락받으신 분입니다. 수많은 왕들이 그토록 하느님을 뵙고 싶어 했고 목소리를 듣길 원했지만, 헛수고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성인께서는 그분을 뵙고 목소리를 들을 뿐 아니라, 당신 품에 하느님을 안고, 그분께 입맞추며, 옷을 입히고 돌보십니다. 성 요셉이시여. 저희를 위해 기도하소서.” 이 기도문은 오늘 제가 얘기하고 싶은 마지막 주제의 시작과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 제가 끝으로 말씀드릴 주제는 요셉 성인이 예수님을 대하는 사랑 가득한 방식에 관한 것입니다.

요셉 성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삶은 자신의 성소를 끊임없이 발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서로 상반된 상황들로 가득했던 요셉 성인의 초기 체험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예수님 탄생의 영광과 이집트로의 탈출이 이어졌고, 동방박사들이 찾아온 장엄한 순간과 가난하고 미천한 구유가 공존했습니다. 천사들은 노래했지만 인류는 침묵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할 때 요셉은 제물로 바칠 비둘기 한 쌍을 가져갔습니다. 요셉은 시메온과 한나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선포하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루카 2, 33) 라고 루카 성인은 기록했습니다. 그 후에 12살 소년이 된 예수님이 예루살렘 축제에 갔다가 성모 마리아와 요셉 성인 모르게 혼자 예루살렘에 남았고, 마리아와 요셉은 사흘 동안 찾아다닌 끝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부모는 무척 놀랐다.” (루카 2, 48) 라고 복음사가 루카는 우리에게 전합니다.

요셉 성인은 정말로 놀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서서히 당신의 계획을 그에게 드러내셨고, 요셉 성인은 그분의 계획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따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똑같이 알게 됩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으며 의심을 가질 여지 또한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요셉 성인도 곧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수준에 올라섰다고 해서 그 상태에 그냥 머무르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스스로의 성취에 안주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더 많이 요구하십니다. 하느님의 길은 인간의 길과 같지 않습니다. 요셉 성인은 그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하느님의 경이로움을 깨달을 수 있도록 마음과 정신이 항상 깨어 있는 법을 예수님께 배웠습니다.

요셉 성인이 예수님으로부터 거룩하게 사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면, 인간적으로는 요셉 성인이 하느님의 아들을 가르친 것도 많았을 거라고 저는 감히 얘기하겠습니다. 요셉 성인에게 이따금씩 주어지는 ‘양아버지’라는 호칭을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호칭이 요셉 성인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어쩐지 차갑고 형식적인 것처럼 여기게 하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육신적으로 요셉 성인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육신의 부자 관계가 부성(父性)의 유일한 특성이 아님을 가르쳐 줍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한 강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이란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을 넘어서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성인은 어땠을까요? 그의 부성(父性)이 정결하였던 것만큼이나 성인은 아버지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인이 다른 아버지들과 똑같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적 사랑의 결실이 아닌, 육신으로 아들을 가진 다른 아버지들과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요. 그랬기 때문에 루카 성인은 “사람들이 그를 예수님의 아버지로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왜 루카 성인은 ‘사람들이 생각했다’고만 얘기할까요? 요셉이 예수님의 아버지라는 생각과 그러한 인간적 판단이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일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요셉이 낳은 자식이 아닙니다. 그러나 요셉의 깊은 신심과 사랑이 있었기에 그에게 아들이 생긴 것입니다. 태어나신 그 아기는 동정 마리아의 아드님이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친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듯 예수님을 사랑했고, 자신이 가진 최고의 것들을 아들에게 줌으로써 그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하느님께서 명하신 대로 아이를 돌봤으며, 자기의 전문 기술을 전수해 예수님을 장인(匠人)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자렛의 이웃사람들이 예수님을 ‘장인(匠人-목수)이자, 장인의 아들’이라고 부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셉 성인의 작업장에서, 요셉 성인의 곁에서 일했습니다. 요셉 성인은 어떤 분이어야 했을까요? 하느님께서는 왜 요셉 성인을 통해서 이 세상에 그토록 큰 은총을 주셨을까요? 요셉 성인은 하느님의 아들을 인간적으로 양육하는 사명을 어떻게 완수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요셉 성인을 닮으셨을 것입니다. 일하는 방식, 성품과 말투를 닮았을 것입니다. 예수님 특유의 현실주의와 세세한 것들에 대한 섬세한 시선, 식탁에 앉아 빵을 떼어 나누는 방법, 그리고 가르침을 주실 때 일상적이고 사실적인 상황을 주로 활용하는 것까지. 이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요셉 성인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이스라엘 어느 특정 지역의 말투를 쓰고, 요셉이라 불리는 목수와 닮은 그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장엄한 신비를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누가 하느님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참으로 인간이셨고 평범한 삶을 사셨습니다. 무엇보다 어린아이로, 그런 다음에는 소년으로 요셉의 작업장에서 일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성인이 되어서 삶의 절정기를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루카 2,52)

인간적 삶의 측면에서 보면, 일상의 관계에서는 요셉 성인이 예수님의 스승이었습니다. 절제된 애정으로 예수님을 더 잘 돌보기 위해 기꺼이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이 의로운 인간을, 이 거룩한 가장을 우리네 내적 삶의 스승으로 여길 만한 이유가 충분하지 않습니까? 요셉 성인에게서 구약의 계약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내적 삶이란 그리스도와 끊임없이 직접적인 대화를 나눠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요셉 성인은 예수님에 관해서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 성인에 대한 공경을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구약에 기록된 그리스도교의 전승 그대로 하십시오! - “요셉에게 가라.” (Ite ad Ioseph–창세 41,55)

요셉 성인은 내적 삶의 스승이십니다. 자신의 일에 깊이 헌신하는 노동자이시며, 예수님과 끊임없이 소통하신 하느님의 종이 바로 요셉 성인이십니다. 그러니 요셉에게 가십시오 (Ite ad Ioseph). 요셉 성인 덕분에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 속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웁니다. 또한 세상을 거룩하게 함으로써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소임을 온전히 떠맡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요셉 성인을 알게 되면, 여러분은 예수님도 만날 것입니다. 요셉 성인과 얘기하십시오. 그러면 나자렛의 멋진 일터에서 당신 주위로 항상 평화를 드리우셨던 성모님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