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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일 → 일을 기도로 전환하기 항이 있음.

일이 존엄한 근거는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실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의 위대한 특권은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고, 또한 덧없이 흘러지나가는 것들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피조물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다른 피조물들을 향해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나’와 ‘너’라고 부르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를 당신 가족의 일원으로 만드시고, 서로 마주 보고 친교를 나누며 하느님께 이야기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인간은 물질적 생산에 스스로를 가둬서는 절대 안 됩니다. 일은 사랑의 산물(産物)입니다. 일은 사랑의 현시(顯示)이며, 사랑을 지향합니다. 우리는 자연의 경이로움에서뿐만 아니라, 일을 하며 노력한 우리의 경험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봅니다. 그러기에 일은 ‘기도’와 ‘감사’가 돼야만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 땅 위에 두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고, 또한 하느님께 우리가 사랑받고 있으며, 그분이 하신 약속을 우리가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연히 다음과 같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들어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1코린 10,31)

요셉과 예수님과의 관계 

저는 얼마 전부터 요셉 성인께 바치는 감동적인 기도문으로 즐겨 기도드려 왔습니다. 미사를 준비하는 기도문으로 교회가 우리에게 권고한 것입니다. “은총 받으신 행복한 성 요셉이시여, 당신은 하느님을 뵙고 그분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허락받으신 분입니다. 수많은 왕들이 그토록 하느님을 뵙고 싶어 했고 목소리를 듣길 원했지만, 헛수고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성인께서는 그분을 뵙고 목소리를 들을 뿐 아니라, 당신 품에 하느님을 안고, 그분께 입맞추며, 옷을 입히고 돌보십니다. 성 요셉이시여. 저희를 위해 기도하소서.” 이 기도문은 오늘 제가 얘기하고 싶은 마지막 주제의 시작과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 제가 끝으로 말씀드릴 주제는 요셉 성인이 예수님을 대하는 사랑 가득한 방식에 관한 것입니다.

요셉 성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삶은 자신의 성소를 끊임없이 발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서로 상반된 상황들로 가득했던 요셉 성인의 초기 체험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예수님 탄생의 영광과 이집트로의 탈출이 이어졌고, 동방박사들이 찾아온 장엄한 순간과 가난하고 미천한 구유가 공존했습니다. 천사들은 노래했지만 인류는 침묵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할 때 요셉은 제물로 바칠 비둘기 한 쌍을 가져갔습니다. 요셉은 시메온과 한나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선포하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루카 2, 33) 라고 루카 성인은 기록했습니다. 그 후에 12살 소년이 된 예수님이 예루살렘 축제에 갔다가 성모 마리아와 요셉 성인 모르게 혼자 예루살렘에 남았고, 마리아와 요셉은 사흘 동안 찾아다닌 끝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부모는 무척 놀랐다.” (루카 2, 48) 라고 복음사가 루카는 우리에게 전합니다.

요셉 성인은 정말로 놀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서서히 당신의 계획을 그에게 드러내셨고, 요셉 성인은 그분의 계획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따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똑같이 알게 됩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으며 의심을 가질 여지 또한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요셉 성인도 곧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수준에 올라섰다고 해서 그 상태에 그냥 머무르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스스로의 성취에 안주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더 많이 요구하십니다. 하느님의 길은 인간의 길과 같지 않습니다. 요셉 성인은 그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하느님의 경이로움을 깨달을 수 있도록 마음과 정신이 항상 깨어 있는 법을 예수님께 배웠습니다.

인간적 삶의 측면에서 보면, 일상의 관계에서는 요셉 성인이 예수님의 스승이었습니다. 절제된 애정으로 예수님을 더 잘 돌보기 위해 기꺼이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이 의로운 인간을, 이 거룩한 가장을 우리네 내적 삶의 스승으로 여길 만한 이유가 충분하지 않습니까? 요셉 성인에게서 구약의 계약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내적 삶이란 그리스도와 끊임없이 직접적인 대화를 나눠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요셉 성인은 예수님에 관해서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 성인에 대한 공경을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구약에 기록된 그리스도교의 전승 그대로 하십시오! - “요셉에게 가라.” (Ite ad Ioseph–창세 41,55)

요셉 성인은 내적 삶의 스승이십니다. 자신의 일에 깊이 헌신하는 노동자이시며, 예수님과 끊임없이 소통하신 하느님의 종이 바로 요셉 성인이십니다. 그러니 요셉에게 가십시오 (Ite ad Ioseph). 요셉 성인 덕분에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 속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웁니다. 또한 세상을 거룩하게 함으로써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소임을 온전히 떠맡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요셉 성인을 알게 되면, 여러분은 예수님도 만날 것입니다. 요셉 성인과 얘기하십시오. 그러면 나자렛의 멋진 일터에서 당신 주위로 항상 평화를 드리우셨던 성모님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는 삶 

“내 생명의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네.”(시편 42,9) 만약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살아계시는 존재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존재 자체가 기도와 한데 엮여 있다는 사실에 놀라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나 기도란 한 번 드린 뒤에 곧바로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이를 밤낮으로 되새기는” 의로운 사람이 돼야 합니다. “밤새도록 당신을 묵상하며 제 기도가 저녁에 드리는 분향과 같기를 바랍니다.” 밤부터 아침까지, 또 아침부터 밤까지 우리의 하루 전체가 기도를 위한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성경은 우리의 잠조차도 기도가 되어야 한다고 일깨워줍니다.

예수님에 관해 복음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때때로 예수님께서는 당신 아버지와 친밀한 대화를 하시면서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사랑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스승님이 항상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나서 그들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바오로 성인은 “기도에 전념” (로마 12,12) 하라고 신자들에게 권고하면서 그리스도의 살아계신 본보기를 널리 전파했습니다. 루카 성인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을 마치 예술가가 붓으로 그린 듯한 문구로 묘사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 (사도 1,14)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기도의 훈련장에서 은총의 도움으로 활력을 얻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양식인 기도는 한 가지 형식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은 기도의 통상적인 표현을 말씀에서, 또는 하느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셨거나 주님의 천사들과 성모님이 가르쳐주신 염경기도(念經祈禱)에서 찾아낼 것입니다. 또 다른 경우에 우리는 수많은 신앙의 형제들이 신심을 표현했던 유구한 언어들을 사용하기도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전례에 사용하는 기도문(lex orandi)이나, 또는 ‘천주의 성모여, 기억하소서’, ‘하례드리나이다, 여왕이시여’(Sub tuum praesidium, Memorare, Salve, Regina)’ 등 성모님께 드리는 교창(交唱)처럼 열절한 사랑을 표현한 기도들도 있습니다.

또 다른 경우,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두세 단어로 함축해 화살처럼 빨리 드리는 기도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주의 깊게 읽으면서 배우게 된 화살기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마태 8,2)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요한 21,17) “주님,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마르 9,23) 이 기도는 제 신앙을 강하게 해줍니다.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마태 8,8)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요한 20,28)… 이 밖에도 사랑으로 가득한 짧은 문구들이 있습니다. 이 기도문들은 우리 영혼의 심오한 열정으로부터 솟아나 매일매일의 다른 여러 환경들에도 합치하는 것들입니다.

이와 더불어, 우리의 기도 생활은 오직 하느님과의 대화를 위해 바쳐진 순간들에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 2천 년 동안 우리를 기다려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기 위해 가능하면 감실 앞에서 홀로 드리는 고요한 대화의 순간을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가슴으로 나누는 대화를 ‘묵상기도(默想祈禱)’라고 합니다. 우리의 영혼 전체가 그 기도에 참여합니다. 우리의 지성과 상상력과, 기억과 의지가 모두 기도 안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매일 다반사로 반복되는 일상에도 불구하고 이 기도는 우리네 가난한 인간적 삶에 초자연적 가치를 부여하도록 돕는 묵상인 것입니다.

이런 묵상의 순간들과 소리 내어 올리는 우리의 염경기도(念經祈禱), 그리고 화살기도들 덕분에 우리는 하루 종일 하느님께 끝없는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겉보기에 치우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말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항상 서로를 생각하고 있듯이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깨달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모든 행동은 영적인 효과로 넘쳐날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방해받지 않고 주님과 친교를 맺기 시작할 때 그의 내적 삶이 성장해 굳세고 튼튼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수행하기 위해 고되지만 매력적인 분투를 하게 됩니다. 덧붙여 말씀드립니다만, 이것은 선택받은 소수의 그리스도인들만이 가는 길이 결코 아닙니다. 이 길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기도생활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의 다른 측면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사도직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임무를 수행하는 일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사도 1,8)

기도의 학교 

주님께서는 동정 성모님의 은총에 성실하게 응답하는 여러 가지 다른 측면들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순결, 겸손, 굳셈, 관대함, 그리고 성실함 등… 성모님의 삶에서 나타나는 여러 면들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성모님을 닮고 싶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여러분께 이러한 성모님의 모든 특성들을 아우르는 하나의 특징에 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영적 성장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모님께서 사셨던 ‘기도하는 삶’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어머니께서 주시는 은총을 잘 이용한다면, 그리고 우리 영혼의 목자이신 성령의 감화를 언제라도 따라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마주 대하는 일에 진심으로 전념해야 합니다. 우리는 익명의 군중 속으로 도망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내적 생활이 하느님과의 개인적 만남과 무관하다면 그런 내적 생활은 아예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교와 가장 맞지 않는 것이 바로 ‘피상성(皮相性)’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마냥 단조롭게만 살아간다면 이는 관상적인 영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각자 그분께 응답해야 합니다.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1사무 3,5) 이렇게 말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물을 수 있죠. “무슨 얘기를 해야 하는 거죠?” 하느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일, 그리고 여러분의 하루를 채우는 모든 일들… 그것 말고 무슨 할 얘기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탄생, 그분이 우리와 함께 보내신 시간, 그분의 알려지지 않은 삶, 그분의 가르침과 기적, 그리고 수난과 죽음, 부활… 이런 내용들에 관해 얘기하는 겁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앞에서 성모님을 우리의 중재자로 부르고, 우리의 아버지이자 주님의 아버지인 요셉 성인께 우리의 대변자가 되어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가 해나가는 일상의 일과, 우리의 가족과 친구 관계, 그리고 우리의 큰 계획과 작은 단점 등에 관해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제 기도의 주제는 곧 제 삶의 주제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하느님과 이야기 나누는 방법입니다. 제가 처한 상황을 깊이 생각해보면 특별하고도 굳센 결심이 떠오릅니다. 변화하고 개선하며, 하느님 사랑 앞에 더욱 온순하겠다는 결심입니다. 이것은 진지하고 구체적인 다짐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께 대한 간청을 잊어선 안 됩니다. 우리의 확신만큼이나 절박하게 “우리를 결코 버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 피신처 하느님” (시편 43,2) 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는 매우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활동은 매일 살아가는 생활환경 안에서 일어납니다. 모든 일이 우리네 삶의 일상적인 리듬을 따라갑니다. 하루하루가 똑같고 심지어 단조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겉으로는 너무도 평범하게 보이는 우리의 상황들이 거룩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함께하시기를 원하시며, 심지어 우리의 가장 무의미한 활동들조차도 그 내부로부터 생명력을 주길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명확하고 객관적이며 초자연적인 사실(실재-實在)입니다. 이는 역사의 기록에 이름을 남길 수 없는 우리들을 위로하려는 경건해 보이는 듯한 배려가 절대로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사무실에서, 공장에서, 가게에서, 교실에서, 들판에서 하는 모든 일들, 어떤 종류의 육체노동이건 지적 직업이건 간에, 그 일이 단 한 번이건 수천 번 반복되는 일이건 간에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나쁜 기질이나 성향을 스스로 다스리기 위한 우리의 숨겨진 희생에도 똑같이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여러분의 기도 안에서 이런 생각들을 되새겨보십시오. 예수님께 ‘당신을 경배합니다’라고 말씀드리기 위해 이러한 생각들을 활용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세상의 한가운데에서도, 거리의 소음 속에서도,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관상가(觀想家)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친교를 나누는 학교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첫 번째 공부입니다. 그리고 이 학교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최고의 스승이십니다. 왜냐하면 동정 마리아께서는 당신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관계없이 항상 그런 신앙의 자세, 초자연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태도를 견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루카 2,51)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우리를 관상가(觀想家)로 만들어 달라고 청합시다. 우리를 가르치셔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하느님의 끊임없는 부르심을 깨닫게 해달라고 부탁드립시다. 지금 그분께 간구합시다. ‘우리의 어머니, 당신은 예수님을 낳으셨고, 예수님께서는 우리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니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우리의 마음과 의지를 북돋우셔서 우리가 하느님의 목소리를, 그 은총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