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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일상 생활 → 인간적 가치 항이 있음.

신앙과 이성 

기도와 보속의 삶,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깨달음은 우리를 참으로 신심(信心) 깊은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 돌봐주시는 어린아이가 됩니다. ‘의심 없고 깊은 신심’은 어린이들의 미덕입니다. 만약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품으로 피신하려 한다면, 그 아이는 자기가 작고 가여운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영적 어린이의 삶’에 관해 자주 묵상해왔습니다. 영적 어린이라고 해서 용기(勇氣)라는 미덕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적 어린이가 되려면 강한 의지와 검증된 성숙함이 필요하고, 동시에 활짝 열려 있으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만큼 독실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무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가능한 한 진지하고 철저하게 신앙에 관해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린아이의 신심’인 동시에 ‘신학자들의 명확한 교리’여야 합니다.

신학적 지식을 키우고, 견실하고 확고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은 무엇보다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에 의해 촉발됩니다. 또한 이러한 열망은 하느님의 손길로 만들어진 이 세상의 심오한 의미를 깨우치기 위한 경건한 영혼의 관심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이따금씩 깨진 레코드판 같은 단조로운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몇몇 사람들이 신앙과 과학, 인간의 지식과 하느님의 계시 간에 빚어지는 불일치성을 부각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겉으로만 불일치하게 보일 뿐이지만- 문제의 본질적 요소들을 이해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만약 세상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다면,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과 닮은 인간을 만드시고 거룩한 빛을 그에게 주셨다면, 우리네 지성(知性)의 임무는 모든 피조물의 본성에 깃든 거룩한 의미를 밝혀내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오직 부단한 노력만이 이뤄낼 수 있는 일입니다. 신앙의 빛으로 우리는 모든 피조물들에 담긴 초자연적 목적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자연의 질서’가 훨씬 더 높은 수준인 ‘은총의 질서’로 격상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지식이 성장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지적인 노력은 그것이 진실하다면, 언제나 진리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진리다” (요한 14,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틀림없이 진리를 알고자 하는 허기를 갖고 있습니다. 가장 추상적인 지식에서부터 구체적인 기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하느님과 연관될 수 있으며,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거룩해질 수 없는 인간의 일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이 우리 자신을 성화(聖化)하는 기회가 되며, 우리와 함께 일하는 이들을 성화하기 위해 하느님과 협력하는 좋은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뿜어내는 빛은 결코 계곡 깊은 곳에 숨겨져선 안 됩니다. 그 빛은 산의 정상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마태 5,16)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하는 것이 곧 기도하는 것이며,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이런 정신으로 연구하는 것 역시 기도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기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우리의 모든 활동이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해 그분과의 친교를 풍부하게 해줄 수 있으며, 또한 그래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명예로운 일이 기도가 될 수 있고, 기도하며 해온 모든 일들이 사도직 활동인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영혼은 순진하고도 튼튼한 삶의 일치를 이뤄내는 것입니다.

인간적 사랑의 거룩함 

부부의 사랑은 순결하고 숭고하며 신성한 것입니다. 사제로서 저는 온 마음을 다해 이 사랑을 축복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전승은 예수님께서 카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셨다는 사실을 통해 하느님께서 결혼에 부여하신 가치를 확인합니다. 이와 관련해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성인은 이렇게 썼습니다. “인간 삶의 근원을 거룩하게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우리 구세주께서 혼인잔치에 가셨습니다.”

결혼은 두 사람의 몸이 하나가 되는 성사입니다. 신학은 “혼인성사의 주제가 남편과 아내의 몸”이라고 가르침으로써 이 같은 사실을 매우 강조해서 표현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나누는 사랑을 거룩하게 하시고, 또한 축복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결혼을 영혼의 결합일 뿐 아니라 육신의 결합이라고 여기십니다. 결혼의 소명을 받았건 아니건 간에 어떤 그리스도인에게도 결혼의 가치를 과소평가할 권리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지으셨고 또한 지성을 부여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지성은 하느님의 지혜로부터 온 한 점 불꽃과도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또 다른 선물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자유의지 덕분에 우리는 이해하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 몸 안에 출산의 능력을 심어주셨습니다. 이 능력을 통해 우리는 주님만이 가지신 창조의 권능에 동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사랑의 힘으로 이 세상에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교회의 몸을 키워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성(性)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성(性)은 생명과 사랑과 결실을 맺어주시는 하느님의 거룩한 선물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그리스도교의 성(性)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 땅에 존재하는 아름답고 고귀하며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들 중 그 어떤 것도 무시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간단명료하게 가르쳐줍니다. 우리들 삶의 규범이 결코 이기적인 쾌락의 추구가 돼선 안 된다고 말입니다. 오직 희생과 절제만이 진정한 사랑으로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진실하게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도록 초대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은 다음과 같이 역설적으로 표현합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태 10,39)

끊임없이 자기 자신만 생각하며 오직 자기만족만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을 얻기 어려우며, 현세의 삶에서도 불행을 피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줄 때만이 이 땅에서 행복할 수 있습니다. 결혼생활뿐만 아니라 삶의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얻는 행복은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준비하고, 그 기쁨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 사랑에는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결혼생활이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기쁨이 있고, 가정을 꾸리고 돌보는 열망과 열정이 있으며, 남편과 아내의 사랑이 있고,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는 행복이 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슬픔과 고난이 동반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육신은 소진하고, 마음은 갈수록 쓰라리며, 겉보기에 항상 똑같은 날들이 단조롭게 이어지면서 인성(人性)이 위협받습니다.

그런 고난들에 직면했을 때 사랑과 기쁨이 끝나버렸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결혼과 인간의 애정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이 닥쳐온 바로 그때 우리의 진짜 감정이 드러납니다. 바로 그때 자기를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과 다정한 심성이 뿌리를 내려 진실하고 깊은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냅니다. 이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합니다.

존경과 사랑 

처음에 우리는 날 때부터 눈먼 남자에 대한 예수님 제자들의 태도에 놀랐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나쁘게 생각하라, 그러면 네가 옳을 것이다”라는 불운속담(不運俗談)에 딱 들어맞습니다. 하지만 그 후 제자들이 스승이신 예수님을 더 잘 알게 되면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달으면서 사도들의 생각은 각자 이해하는 정도에 따라 점차 달라졌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필리2,3)

라고 말했는데, 이 말씀에 따르면, 누구에게나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길 수 있는 측면이 있다는 겁니다. 이 같은 영성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겸손이라는 미덕은 우리에게 가르침을 줍니다. 다른 사람의 명성과 성실과 사생활에 대한 존중의 표시는 겉으로 나타나는 관례가 아니라, 사랑과 정의를 드러내는 첫 번째 표징이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질적이거나 금전적인 도움을 주는 데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무엇보다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고유한 존엄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또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이해하기를 지향합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의 평판과 명예를 헐뜯는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이 전하는 진리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어떤 경우건 그런 사람들에겐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똑같은 미덕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나누는 이 대화로부터 여러분이 실제적인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특별히 결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 맙시다. 그들의 선한 의지를 의심하지 맙시다. 우리 주위에 돈독한 친교와 정의, 평화의 씨를 뿌림으로써 그 넘치는 선함 속에 악(惡)을 빠뜨려서 없애버리자고 다짐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올바른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받더라도 슬퍼하지 않기로 결심합시다. 우리 주님의 부단한 도움에 힘입어,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선한 일들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잘못 해석되더라도 슬퍼하지 않겠다고 다짐합시다. 우리의 선한 일을 그릇되게 해석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동기(動機)를 부당하게 억측하면서 기뻐합니다. 또한 우리가 사악한 계획을 갖고 있으며 거짓된 행동을 하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니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항상 용서합시다. 그리고 양심상 말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면, 악한 감정을 배제하고 명확하게 얘기합시다. 만약 우리가 개인적으로 공격을 받는다면, 그 공격이 아무리 잔인하고 수치스럽더라도, 거룩한 침묵 안에서 - “예수님께서는 입을 다물고 계셨다.” (마태 26,63) - 우리 아버지 하느님의 손길에 모든 것을 맡깁시다. 오직 선한 일을 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입시다.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선한 행동이 빛이 되어 “사람들 앞을 비추도록” (마태 5,16) 하실 것입니다.

사도들 중의 사도가 된다는 것 

빛으로 온 세상을 채우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의 사명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이 사명은 세상 끝까지 하느님 사랑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든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 삶을 바쳐야만 합니다.

이야기를 좀 더 해보겠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되지 않도록 간절히 바라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에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주는 이 거룩한 과업을 돕도록 다른 사람들을 격려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다음과 같이 얘기했습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나아가는 한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과 함께하고픈 마음을 품게 하십시오. 주님을 향해 가는 길에 동행하도록 바라십시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신 비유를 명심하십시오. “사람들이 자는 동안” (마태 13,25) 가라지를 뿌리는 이들이 왔다는 그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인 숱한 경험들에 휩싸여 이기적이고 피상적인 것들의 무기력함에 너무도 쉽게 스스로 휘말려 들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세상과 삶에 대한 진정한 의미와 마주하기를 꺼리게 되고 맙니다. 이런 무기력 상태는 아주 나쁜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인간을 슬픔의 노예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유감스러워해야 할 사례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경우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들에게 주신 성소의 모든 결실들을 살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대함이 부족해서 그렇게 살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은총은 그것을 숨기라고 주어지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라고 내려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열심히 노력하길 거부하는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현세는 물론 내세에서도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선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기쁨과 평화(平和)에 대한 즉각적인 약속이 함께하는 거룩한 경이로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아차려서 관대해지는 방법을 아는 경우에만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선물을 받음으로써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를 계산하지 않을 때에 한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위험한 잠에 빠진 사람들을 깨워야 합니다. 삶이란 놀이의 대상이 아닌, 우리가 키워내야 하는 거룩한 보물이란 사실을 그들에게 일깨워줘야 합니다. 또한 선한 의지와 열망을 갖고 있지만 어떻게 실천하는지 모르는 이들에게 그 길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재촉하고 계십니다. 우리들 각자가 한 명의 사도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사도들 중의 사도가 돼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불러온 이들이 다시 또 다른 사람들을 불러와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모든 이들에게 알리도록 힘을 북돋울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서 사람들 이끌기 

하지만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음 대신에 올곧은 영(靈)의 의지를 네게 주겠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조건 없이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인간의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따로 함께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제 부모와 친구들을 사랑하는 똑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성자 그리스도와 성부와 성령, 그리고 성모님을 사랑합니다. 그런 사랑을 아무리 반복해도 저는 질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간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인간이 아니라면 결코 거룩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진실하게 이 세상에서 우리가 체험한 사랑이라면, 그런 인간의 사랑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는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1코린 15,28)” 때, 우리가 천국에서 나누게 될 사랑을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을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나날이 인정 많고 관대하며 헌신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것을 반드시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배운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참으로 단순하게, 조금의 자만심도 없이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더불어 나눌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사회에서 직장 일을 하면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여러분의 직업을 진실한 봉사로 바꿔놓을 수 있고,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가능한 모든 기술적, 문화적 이점을 활용해 여러분이 하는 일이 잘 돼야 합니다. 그러면서 항상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기심이 아닌 관대함이 동기가 되고, 자기 자신의 이익이 아닌 모두의 복지를 지향한다면,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삶의 느낌으로 충만해져서 일을 한다면, 여러분이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것이고 인류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을 통해서, 인간관계의 모든 네트워크를 통해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내보여야 합니다. 또한 친교와 이해, 인간적인 애정과 평화를 위한 노력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팔레스티나 지역을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신” (사도 10,38) 것처럼 여러분도 여러분의 가족관계와 시민사회, 그리고 직장에서, 또한 여러분의 문화와 여가활동 중에서 ‘평화’를 전파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느님의 왕국이 여러분 마음에 이르렀다는 최고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성인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1요한 3,14)

하지만 ‘예수 성심’이라고 하는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런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성심을 꼼꼼히 바라보고 묵상할 때에만, 우리의 마음이 증오와 무관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사가 루카 성인이 예수님께서 나인 고을에 가셨을 때를 묘사한 장면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은 다시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마주치십니다. 그분은 그냥 지나쳐 가시거나 사람들이 당신을 부를 때까지 기다리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먼저 과부에게 가셨습니다. 과부의 슬픔에 마음이 움직이신 것입니다. 과부는 이제 막 자신의 모든 것인 아들을 잃었습니다.

루카 성인은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였다고 설명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라자로가 죽었던 때와 같은 기색을 보이셨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사랑에서 비롯되는 고통에 결코 무감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어린 자녀들이 부모와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괴로워하십니다.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주시며,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분은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 우리가 먼저 인정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영감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군중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기적을 경외할 것이며 기적의 이야기를 온 지방에 퍼뜨릴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순히 효과를 바라고 인위적으로 행동하는 분이 아닙니다. 간단히 말해,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고통에 마음이 움직였고, 그녀를 위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과부에게 다가가 “울지 마라” (루카 7,13) 하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이렇게 얘기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네가 우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나는 기쁨과 평화를 주기 위해 지상에 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의 권능의 징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기적보다 당신의 연민이 먼저였습니다. 이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의 성심이 따뜻하다는 명백한 징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져다주신 평화 

그러나 우리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를 여러분께 말씀드리려 합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기 위해 열정을 다해서 분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확한 이유를 얘기하자면, 우리 인간이 진정 정의로워지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이 맺는 관계들이 증오와 무관심이 아닌 사랑에 의해 영감을 받으려면 너무 먼 길을 가야 하는 까닭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깨우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설사 우리가 부의 합리적 분배와 조화로운 사회조직을 이루어낸다 하더라도 여전히 세상에는 병마와 오해, 고독, 사랑하는 이의 죽음, 그리고 우리들 자신의 한계를 절감(切感)해야 하는 고통들이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고통의 무게와 마주 서서 그리스도인이 찾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진정한 해답, 유일하고 결정적인 답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모두를 사랑하셔서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신 하느님입니다. 창에 찔린 채 당신의 성심을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불의를 미워하시며 불의를 저지른 이들을 꾸짖으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개개인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불의가 발생하도록 그냥 두셨습니다. 왜냐하면 불의는 원죄의 결과로서 인간 조건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성심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우리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간절히 정의를 바라는 배고픔과 갈증… 그분은 이 모든 아픔들을 십자가를 통해 당신 홀로 온전히 짊어지셨습니다.

고통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우선 모든 인간의 삶에서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아픔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신 소명입니다. 여러분께 숨기지 않겠습니다. 제 인생에도 자주 아픔이 있었고, 몇 번이고 정말로 울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얘기를 여러분께 기쁘게 말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만나야 한다는 진리를 항상 강론해왔고, 또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평소에 불의와 악(惡)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런 열망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상황을 치유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과도 맞서 싸워왔습니다.

고통에 관해 얘기할 때 단순히 이론만 말씀드리고 있지 않습니다. 고통과 맞닥뜨려서 여러분의 영혼이 흔들린다고 느낀다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최선의 치유책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릴 때 저는 다른 사람의 경험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갈바리아산의 수난 장면은, 고통은 거룩하게 변모해야 하며 우리는 십자가와 하나 되어 살아야 한다는 진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려움을 참고 견딘다면, 그 어려움은 속죄(贖罪)와 배상(賠償)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 어려움은 또한 예수님의 운명과 그분의 생명을 우리가 함께 나누도록 해줍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분은 인간의 모든 고통과 고뇌를 스스로 기꺼이 겪어내셨습니다. 그분은 가난하게 태어나고, 생활하고,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공격받고, 모욕당하고, 헐뜯기고, 중상모략에 걸리고, 부당하게 비난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이 당신을 배신하고 버릴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고독을 실감했고 형벌과 죽음의 고통을 체험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동료들과 함께, 그리고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고통받고 계십니다. 인류의 머리이자 맏이이시며 구원자이신 그분께서 같이 아파하고 계신 것입니다.

고통은 하느님 계획의 일부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해하긴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도 수난을 견디기 힘드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루카 22,42)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간청하며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십자가에 매단 이들을 용서하시면서 묵묵히 죽음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이처럼 고통을 초자연적으로 받아들이며 그분은 가장 위대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가져오십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가져야 할 자세는 닥쳐올 비극적 운명에 대한 체념이 아니라, 승리를 예감한 사람의 성취감입니다. 승리하신 그리스도 사랑의 이름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 나아가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통해 평화와 기쁨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우리는 악과 불의와 죄에 맞서 평화의 투쟁을 벌여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현재 처해 있는 형편이 결코 확정된 상태가 아님을 공표해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성심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만이 인간의 영광스러운 영적 승리를 얻게 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