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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밭고랑»에 교리 → 교리를 주는 방법 항이 있음.

그대는 십자고상 앞에서 기도하고 있었고, 이런 결심을 하였습니다: 진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이 나 때문에 진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보다 낫다.

퍽 자주 진리가 사실이 되기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진리는 일관된 삶을 요구하니 더욱 그렇습니다.

사실대로 말한다고 싫은 내색을 할 바에야 왜 굳이 묻습니까?

혹시 당신의 실수를 정당화하고 싶어서 당신에게 맞는 진리를 기대했던 것은 아닙니까?

그대가 진리는 크게 존중하고 있다고 보증합니다. 그러니까 그대는 ‘공손한 태도로’, 항상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입니까?

바보 같은 행동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알고, 사랑하고, 지켜야 할 진리를 매일 더 깊이 알고, 강하게 사랑하고, 더 강한 확신을 갖고 지키기를 원하더라도 그것은 절대로 광신이 아닙니다.

추호도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드리지만 거꾸로 거짓 자유의 이름으로 이 정도 행동을 반대하는 사람이야말로 당파 근성의 소유자입니다.

예수님 시대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노(No)라고 하는 것은, 곧 신앙의 진리를 부정하거나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스스로를 가톨릭 신자로 선언하는 그대는 예수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 연구를 계속해 당신이 확신하는 이유를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리'와 과학, ‘진리’와 생활 사이에 모순이 없는 것, 모순이 있을 수 없는 것을 나타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그대가 선입견에 가득찬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하더라도, 정도(正道)에서 벗어나지 마십시오. 마치 논쟁의 근거나 말의 의미가 그들의 행위에 의해서 또는 그들의 주장에 의해서 정해진다고 생각하더라도 맡은 일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들로 하여금 그대를 이해하게 시도해 보십시오. 그러나 설사 그대가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한다 해도 하여튼 계속해 나가십시오.

어리석고 완고한 사람을 납득시키기란 어려운 법입니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사람이 상대가 아닌 한 모순들을 제거해줄 가치는 있습니다. 인내와 인내를 거듭해도 밝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대는 제가 최근에 유행하는 경향을 고려하지 않고 똑같은 긴요한 일들을 똑같은 방법으로 되풀이하는 것을 반대합니까? 보십시오, 직선은 수세기 동안 똑같은 방법으로 정의되어 왔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간명한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정의들은 더 모호하고 복잡할 것입니다.

그대는 그것을 믿기를 원치 않았지만, 그대는 손해를 감수하며 증거에 굴복해야 했습니다. 그대가 단순하게 그리고 건전한 가톨릭적 의미로 만든 그 진술들이 신앙의 적들에 의해 악의로 뒤틀려져 버렸습니다.

“우리들은 비둘기같이 온순하고 뱀같이 슬기로워야 한다”는 것은 진실입니다. 장소가 아닌 데서나 옳지 않은 때에는 말하지 마십시오.

설령 좋은 목적을 위한 것일지라도 역사나 사람의 생애를 왜곡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교회를 박해한 적을 찬양하는 것은 예삿일이 아닙니다. 확신하십시오. 칭찬하지 말아야 할 일을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해서 역사적 진실에 해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대체 언제부터 증오가 모범이 된 건지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데는 대립감정을 불러일으키거나 또는 우리 교리를 모르는 사람들을 해치거나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사랑을 실천해 나간다면, 그렇지 않았다면 누구이건 그리스도교에 반대하고 잘못으로 속임을 당했을 사람이 쉽게 그리고 정직하게 자신을 사랑의 실천에 참여시키면서 마무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순진한 “폭넓은 믿음”의 이름으로의 독단론에는 굴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 식으로 행동한다면 그는 자신을 성교회 밖으로 내쫓는 위험을 저지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익을 얻어내는 대신 자신을 해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