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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이 전통적으로 성주간이라고 부르는 이번 주간에 우리에게는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집니다. 바로 예수님 삶의 마지막 시간들을 되돌아보고 다시 체험하는 기회입니다. 이 시기의 특징은 신심을 나타내는 다양한 표현들입니다. 그런 표현들이 우리 마음에 불러오는 것들은 예외 없이 당연하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지향합니다. 그분의 부활이야말로 바오로 성인의 말씀대로 우리들 신앙의 밑바탕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여정을 너무 서둘러 걸어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매우 간단한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안에서 그분과 일치를 이루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부활을 더불어 나눌 수 없을 것입니다. 성주간의 말미에 주님의 영광 안에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려면, 우리는 우선 번제물(燔祭物)이 되신 그분의 안으로 들어가 진실로 주님과 하나가 돼야 합니다. 그분이 갈바리아산에서 돌아가셨을 때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고결한 자기희생은 죄에 대한 도전입니다. 죄의 존재를 결코 부정할 수 없지만, 죄의 실재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죄는 그야말로 죄악(罪惡)의 신비(mysterium iniquitatis)를 보여줍니다. 이는 피조물이 범하는 설명할 수 없는 죄악입니다. 피조물 자신의 교만함이 스스로를 하느님께 대항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인류만큼이나 오래됐습니다. 인류의 원조(元祖), 즉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함께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후 시대가 흐르면서 인류의 활동 여기저기서 끝없는 타락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들 각자가 개별적으로 하느님을 거스르기에 이르렀습니다. 죄라는 것이 얼마나 끈질긴지를 깨닫기란 정말로 어렵습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이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는 건 참으로 힘듭니다. 인간적인 맥락에서도 죄의 경중(輕重)은 피해자의 중요도에 따라, 그러니까 그 죄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자격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런데 하물며 인간이 죄를 지어서 하느님께 상처를 드렸다면 어떻겠습니까! 피조물이 창조주를 부인했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사랑”(1요한 4,8)이십니다. 인간의 죄악이 짊어진 악의 심연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으로 극복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잘못을 보속하고, 무너져버린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일치를 다시 세우려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이런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는 구약의 번제물로는 충분치 않았습니다. 하느님이신 인간이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상상해본다면 이 불가해한 신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세 위격께서는 서로 방해하지 않으시면서 무한한 사랑의 친교 안에 함께하십니다. 삼위일체께서 내린 불변의 결정에 따라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드님께서 인간성을 취하시고,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우리가 겪어야 할 참혹한 슬픔의 짐을 견디셨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이후 그리스도의 모든 삶은 아버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실현하고자 하는 불타는 열망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분과 함께 3년 동안 살았던 사도들은 계속해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다’라는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당신의 희생제사가 완결되신 첫 성금요일 오후까지도 그 가르침은 계속되었습니다.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요한 19,30)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잘못을 홀로 지시고 그 무게에 짓눌려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은 순전히 우리의 죄가 저지른 폭력과 사악함 때문에 쓰러지신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머리에서 발끝까지 상처 입으신 주님을 묵상합시다. 어떤 문구도 당시의 실제상황을 완전히 표현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진실에 가까운 표현을 사용하자면 오래전 어느 작가가 쓴 글귀를 인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육신은 고통의 자화상이다.” 생명을 잃은 그분의 육신이 십자가에서 내려져 어머니 성모님께 전달됐습니다. 그때 멍들고 으스러진 그리스도를 보고, 그렇게 파괴된 예수님을 보고, 우리는 아마도 그분이 완전히 실패했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한때 그를 따르던 군중은 어디에 있으며, 그가 예언했던 왕국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바로 승리였습니다. 결코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부활에 가까이 다가섰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당신의 순명으로 이루신 승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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