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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친구들»에는 양심 성찰를 주제로 하는 3 항이 있음.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에 따르는 의무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의무들은 여러분을 안전하고 확실하게 성덕에 이르게 인도해 줄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앞에 놓인 온갖 어려움들에 관하여 미리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은 여정의 시작부터 그러한 어려움들에 대해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영적 지도자의 도움과 안내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에게 여러분의 모든 거룩한 열망, 여러분의 내적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일상적인 문제들, 실패와 성공에 관하여 털어놓을 수 있습니다.

영적 지도를 받을 때는 솔직해지십시오. 아무것도 숨기지 말고, 여러분들의 영혼을 지도자에게 열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이 곧고 평탄한 길이 가시밭길로 바뀔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사소했던 것들이 끝에 가서는 올가미처럼 목을 조를 것입니다. “길을 잃은 사람이 갑작스러운 악재 때문에 희생자가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거나 장기간 자신의 영혼을 등한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견실했던 그의 덕행들은 서서히 사라져 갔고, 반면에 그의 악덕들은 조금씩 조금씩 자라나서, 결국은 비참한 추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 집은 예기치 못한 어떤 사고로 갑자기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집은 토대부터 잘못이 있었거나, 거주자들이 오랫동안 무관심하여 처음에는 사소했던 결함들이 끝에 가서는 견고한 구조물을 부식시킨 것입니다. 그리하여 폭풍이 몰려오거나 폭우가 내리면, 집은 폭삭 무너질 수밖에 없고, 이로써 오랫동안 무관심했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여러분은 고해성사를 보러 갔던 집시의 이야기를 기억합니까? 이것은 다만 이야기요 농담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백 내용을 결코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저는 집시들에 대해서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가엾은 사람! 그 집시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몹시 죄송해하며 말했습니다. “신부님, 제가 고삐를 하나 훔쳤습니다.” 그 정도라면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고삐에는 노새가 매여 있었습니다. … 그리고 또 고삐 하나에 노새 한 마리, … 또 고삐 하나에 노새 한 마리가 매여 있었습니다.” 이렇게 스물을 헤아렸습니다. 나의 자녀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우리가 항복하여 고삐를 훔치게 되면, 나머지도 따라옵니다. 악한 성향들이 줄줄이 따르고, 비참함과 타락과 수치를 가져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에도 비슷한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약간 매서운 말이었는데, 결국은 서로 차갑게 대하는 관계가 되고, 냉랭한 무관심 속에서 살게 됩니다.

“여우들을 잡아라, 저 작은 여우들을. 우리 포도밭을, 꽃이 한창인 우리 포도밭을 망치는 저것들을”(아가 2,15). 작은 일에도 모두 충실하고 또 충실하십시오. 만일 우리가 이렇게 살려고 노력한다면, 성모 마리아의 두 팔을 향하여 자녀답게 달려가는 것 또한 배울 것입니다. 처음부터 여러분에게 상기시켰던 것처럼, 우리는 모두 아주 어립니다. 우리의 나이는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로 결심한 그때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참하고 나약하지만 하느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위대함과 거룩한 순결 안에서 강한 힘을 찾게 될 것입니다.

다른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실화인데, 아주 오래전의 일이고 그 내용도 여러분의 성찰에 도움이 될 것이므로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여러 교구에서 오신 사제들에게 피정 지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돕고 싶었던 저는 친구처럼 함께 이야기하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자고 초대하였습니다. 우리 사제들도 형제적 도움과 조언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가운데 한 사제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태도가 다소 거칠었지만 정직하고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의 마음 안에 있을 수 있는 어떠한 상처라도 치유해 보고자 정중하면서도 단호하게 그의 내면의 것을 끌어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갑자기 그는 이런 말로 저를 당황하게 하였습니다. “저는 제 당나귀가 몹시도 부럽습니다. 그 녀석은 일곱 본당에서 일해 왔지만, 그 녀석에 대해서는 전혀 나쁘게 말하지 않습니다. 저한테도 그러면 참 좋을 텐데요!”

이제 진지하게 양심 성찰을 해보도록 합시다. 아마도 여러분이나 저는 그 시골 사제가 자신의 당나귀에 대해 보낸 찬사를 받을 자격은 없을 듯합니다. 우리는 아주 열심히 일하였고, 책임 있는 위치에 있었으며, 자신의 분야에서는 사람들이 보기에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앞에서 어떤가요? 후회할 만한 일은 없나요? 참으로 하느님과 사람들을 섬기려고 열심히 노력했나요? 아니면, 여러분 자신의 이기적인 계획과 개인적 영광과 야망을 추구하며 조만간 사라질 세속적 성공을 쫓아다닌 것은 아닌가요?

제가 다소 직설적으로 말하는 이유는, 저 자신도 다시 한 번 성실한 참회를 해보려는 것이고, 또 여러분도 각자 그렇게 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가 몸소 경험한 불성실함, 수많은 잘못, 나약함, 비겁함을 상기하면서, 우리도 베드로 사도처럼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참회의 기도를 바칩시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7). 저는 한 말씀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알고 계십니다. 저는 제 비참한 처지 덕분에 저의 힘이신 주님께 의탁하게 됩니다. ‘당신은 제 피신처’(시편 42,2)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출발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