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 목록

2«하느님의 친구들»에 성령 → 성령과 애덕 항이 있음.

사랑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어”(1요한 4,10), 그분의 은총으로 사랑이 우리 안에 침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이 아름다운 진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진리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며 믿음의 삶을 살도록 태어났으므로, 우리 주위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풍성하게 베풀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장 세심한 부분까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담대히 이 보화, 곧 초자연적 애덕을 간청하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도 자주 이 선물에 제대로 응답하는 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무감각하고 냉담한 구호 활동이나 틀에 박힌 자선 활동에 머물며 그 선물의 가치를 떨어뜨리기도 했습니다. 어떤 환자 여인의 슬픈 체념의 말에서 이러한 사랑의 왜곡을 잘 볼 수 있었습니다. “예, 그들은 저에게 자선 활동을 했습니다. 하지만 제 어머니는 저를 애정으로 돌보아 주셨지요.” 그리스도의 성심에서 나오는 사랑에는 절대로 그러한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진리를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저는 수없이 많은 기회에 설명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을 따로 가져서는 안 됩니다. 살로 된 우리의 가엾은 마음은 인간적 애정으로 사랑하기도 하고, 만일 그리스도의 사랑과 결합한다면 초자연적 사랑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안에서 우리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도록 이끌어 주는 사랑이야말로 우리 영혼 안에 키워야 하는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확신하건대,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심 덕목인 이 사랑은 때때로 익살스럽게 풍자되어 온 내용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그토록 끊임없이 선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사랑은 단지 선포해야 하는 주제일 뿐이고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일까요?

우리가 주위를 둘러본다면, 사랑은 단지 환상 속의 덕목일 뿐이라고 생각할 만한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자연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메마름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이란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지속적이고 강렬하며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영혼들 안에서 사랑이라는 첫 열매를 맺으시는 성령의 활동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율법을 완수하게 될 것입니다.”(갈라 6,2)라는 성 바오로 사도의 충고 말씀에 대하여, 교회 교부들 가운데 한 분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써, 선행이 미흡하여 아직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나약함을 쉽게 견딜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사랑 안에서 자라게 하여 준 그 길이 가리키는 방향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저만치 밀쳐놓고 인도적 활동이나 사회사업에 먼저 투신한다면,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 이웃의 환자를 돌보느라 그리스도를 외면하지 맙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환자를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예수님께 여러분의 시선을 맞추십시오. 그분은 변함없이 하느님이시지만 우리를 섬기시고자 자신을 낮추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필리 2,6-7 참조). 오직 그분께서 가리키시는 길을 따라감으로써만 우리는 값어치 있는 이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받는 이와의 동일시, 결합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그분의 헌신적인 삶, 한없는 사랑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희생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궁극적 선택의 자리에 세우십니다. 우리는 이기적이고 격리된 삶을 사는 것과, 다른 이들을 섬기는 데에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는 것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