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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하느님의 친구들»에 복음 → 복음 장면 항이 있음.

우리는 감사하게도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에 의해서 그리고 하느님을 위해서 무로부터 창조되었음을 배웠고, 우리가 행복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비록 가끔 비이성적으로 행동하기는 하지만 이성을 지닌 피조물인 우리 인간뿐 아니라, 지구 표면이나 깊은 땅속이나 푸른 하늘을 누비는 비이성적 존재들도 창조하셨습니다. 태양을 향하여 높이 치솟는 피조물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놀랍고 다양한 피조물 가운데, (천사들은 별도로 하고) 오직 우리 인간만이 자유의지로써 자신을 창조주와 결합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주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하는 영광을 그분께 드릴 수도 있고, 반대로 그분을 배척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가능성 때문에 인간의 자유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초대하시고, 선을 선택하도록 촉구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은 참으로 부드럽습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신명 30,15-16.19).

이제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저도 양심 성찰을 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확고하게 흔들림 없이 생명을 선택하고 있습니까? 지극한 사랑으로 우리를 성덕에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때에, 기꺼이 ‘예’라고 대답합니까? 팔레스티나의 도시와 시골에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한 번 더 눈을 돌려봅시다. 그분은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마태 19,21)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청년은 주님의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복음서 표현에 따르면,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마태 19,22)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때때로 그를 ‘슬픈 청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유를 하느님께 맡기는 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행복을 잃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오늘 묵상하고 있는 주제를 잘 마무리하는 데 루카 복음 2장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어린이입니다. 그분의 어머니와 요셉 성인은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는 길에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예수님을 찾지 못하여 애가 탔습니다. 멀리서 이스라엘의 율법 교사들을 가르치는 아들을 보았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러나 아들의 입에서 나온 말을 잘 생각해 봅시다.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아들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루카 2,49)

부모가 아들을 찾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잃었다가 다시 찾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영혼들은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제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위하여 저의 모든 시간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들이 그분께 올린 수많은 찬사들에 관하여 깊이 생각해 본다면, 그들 모두를 한결같이 포옹하신 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놀라운 기적의 광경을 본 군중은 경탄하고 열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마르 7,37). 그분은 위대한 기적뿐 아니라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사까지도 “온전한 하느님이요 온전한 인간”(퀴쿰퀘 신경)으로서 훌륭하게 완수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온 생애를 생각하면 제 마음은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찹니다. 저는 그분께서 베들레헴, 이집트, 나자렛에서 보내신 30년의 숨겨진 기간에 대해서는 특히 아는 것이 없습니다. 이 기간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기보다 훨씬 길지만 복음서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 기간이 특별한 의미 없는 텅 빈 시기처럼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언제나 주장해 왔듯이, 우리 주님의 초기 생애의 침묵은 그 자체로 위대한 웅변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놀라운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그 침묵의 시기에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동시에 인간으로서 우리와 똑같은 일상생활을 영위하시며, 열심히 기도하고 일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하였지만, 그분은 단순한 일들을 하시면서 모든 것을 성화하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공생활 기간에도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똑같이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게 너무 관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경향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이러한 어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쉽게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의 건강에 대해서, 또는 휴식이 충분한지에 대해서 지나친 걱정을 합니다. 물론 휴식이 필요합니다. 날마다 새로운 활력으로 일과 씨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 해 전에 이야기했듯이, “휴식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노력이 덜 요구되는 다른 활동들에 우리의 주의를 돌리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우리 어깨 위에 놓인 놀라운 책임들에 대하여 너무 느긋하고 그것들을 망각하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단지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우리는 또한 그릇된 합리화 속으로 숨으며 시간을 낭비합니다. 반면에 사탄과 그의 졸개들은 결코 쉬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예전에 노예였던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이야기를 묵상해 봅시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것처럼 기쁘게 섬기십시오”(에페 6,6-7).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주인에게 복종할 것을 촉구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마땅히 따라야 할 좋은 충고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님께 빛을 주십사고 청합시다. 우리의 직업이 우리 자신의 성화 소명에 필요하고 또 유익한 것이 되도록 하는 그 신성한 의미를 매 순간 발견할 수 있게 도와주십사고 간절히 청합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마르 6,3)이라고 불립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거룩한 자부심을 지니고 참으로 일하는 사람임을 행동으로 입증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특사로 행동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일을 마치지 못한다면, 만일 다른 사람들보다 직업적으로 덜 노력하고 덜 희생한다면, 만일 부주의하고 믿음직하지 않으며 경박하고 무계획적인 사람으로 불린다면, 우리는 그분을 충실히 섬기는 것이 아님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덜 중요한 것처럼 보이는 의무를 소홀히 하는 사람은 영성 생활과 관련된 다른 의무들도 성공적으로 이행하지 못할 것이며, 아마도 더 어려워할 것입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루카 16,10).

다시 한 번 바오로 사도의 목소리에 귀 기울입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1코린 15,58). 여러분은 보이지 않습니까? 일을 시작할 때에는 언제나 일의 성화를 목표로 해야 하며, 이를 위하여 온갖 덕을 동원해야 합니다.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여러 어려움에 굴복함 없이 꾸준히 일하고 불안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으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과 안락함을 추구하려는 마음을 극복하고 아낌없이 자신을 투신하려면 ‘절제’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과 사회와 우리 가족과 동료 일꾼들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려면 ‘정의’가 필요합니다. 각각의 경우에 적절한 방법을 선택해서 주저 없이 일에 착수하려면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강조하건대, 이 모든 일은 사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주님의 사도로서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인지 예민하게 바로바로 살피고 책임감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사랑은 달콤한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여기에 덧붙일 말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나자렛 작업장의 문을 열어 주시어 제가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하는 주님의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와 성 요셉과 더불어 주님을 보고 기도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거룩하신 세 분께서는 노동을 거룩하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주님, 가엾은 저희 마음에 빛을 비추시어, 매일매일의 일을 통하여 주님을 찾게 하시며, 그 일이 하느님의 일, 사랑의 노동이 되게 하여 주소서.

루카 복음 7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시어 식탁에 앉으셨다”(루카 7,36). 이때, 그 도시에서 공공연하게 죄인으로 알려진 여자 하나가 와서는 당시 관습에 따라 비스듬한 자세로 음식을 잡수시던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그 여자의 눈물은 그렇게 움직이는 발을 씻는 물이었고, 그 여자의 머리카락은 발을 닦는 수건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옥합에 든 향유를 부어 발랐습니다.

그 바리사이는 이것을 나쁘게 생각합니다. 그로서는 예수님께서 그토록 큰 자비의 마음을 지니고 계심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루카 7,39). 예수님께서는 그의 생각을 읽으시고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루카 7,44-47).

우리는 주님의 지극히 자비로우신 성심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의 주의를 다른 쪽으로 기울여 봅시다. 그 바리사이가 예수님께 보여 주지 못한 인간적 예의와 배려에 주목합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온전한 하느님이요 온전한 인간”(퀴쿰퀘 신경)이십니다. 그분은 성삼위의 제2위격이신 온전한 하느님이시며, 온전한 인간이십니다. 그분은 세상을 파괴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동료 인간을 홀대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것임을 배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과 비슷하게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하느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창세 1,26 참조).

복음서의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바리사이들은 “저희 제자들을 헤로데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께 보내어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 … ’”(마태 22,16). 그들이 얼마나 교활하게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르는지 주목하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존경하는 사람들이요 친구들인 체하면서, 가르침을 받고 싶어 하는 척합니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신 줄 압니다”(마태 22,16). 얼마나 간교한 속임수입니까! 여러분도 그러한 이중적 태도를 본 적이 있습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여러분, 조심하십시오. 지나치게 조심하는 것도, 지나치게 의심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만, 카타콤바에 묘사된 착한 목자의 모습처럼 여러분 어깨 위에 놓인 그 길 잃은 양의 무게를 기억하십시오. 그 양은 단지 한 사람의 영혼이 아니라 온 교회, 온 인류를 상징합니다.

만일 여러분의 열정과 은총으로 이 책임을 받아들인다면, 하느님의 권리를 옹호하고 선포하는 일에 두려움과 더불어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은 여러분이 살아가는 모습을 전체적으로 보고는, 여러분을 스승으로 여기고 또 그렇게 부를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이 그렇게 불리는 데 어떠한 욕심도 없고 세속적 영광에 아무런 관심이 없을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단지 아부를 하려고 슬그머니 접근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놀라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그렇게 자주 들려주었던 말들을 영혼 깊숙이 새겨놓으십시오. 우리의 임무를 이행하는 여정에서 어떠한 중상모략이나 험담, 사람들의 존경, 남들이 하는 말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더더구나 위선자들의 칭찬을 물리쳐야 합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지상 생애 동안 온갖 모욕과 부당한 대우를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분을 골칫덩이로 여기고 마귀 들렸다고 이야기하기도 한 것을 기억하십시오(마태 11,18; 12,24 참조). 또 어떤 때에는 예수님께서 무한한 사랑을 표현하신 것을 보고는 교묘하게 그릇된 해석을 하고,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하였습니다(마태 9,11 참조).

나중에는 속죄와 절제의 본보기이신 예수님을 두고 부자들의 식탁에 드나드는 사람이라고 투덜거렸습니다(루카 19,7 참조). 그분은 경멸의 의미로 “목수의 아들”(마태 13,55)로 불렸습니다. 그분은 자신에 대하여 먹보요 술꾼이라고 험담하는 것을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분의 적들이 하는 모든 비난을 내버려 두셨지만, 정결하지 않다는 것만은 예외였습니다. 그때에는 적들의 말문을 닫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정화를 위하여 불을 놓을 수 있는 사랑과 빛, 순수함과 깨끗함의 놀라운 본보기, 흠 없는 본보기를 우리에게 생생한 기억으로 남겨 주시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몸소 보여 주신 행동에 비추어 거룩한 정결을 묵상하는 것은 언제나 저에게 즐거운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얼마나 세련되게 이 덕목을 실천하시는가! 요한 성인이 예수님에 관하여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요한 4,6).

차분한 마음으로 천천히 이 장면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온전한 하느님이요 온전한 인간”(퀴쿰퀘 신경)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교 여행 중에 지치셨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똑같은 일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여러분 능력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소진하여 기진맥진했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스승님께서 그렇게 지치신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분도 배고픔을 겪으십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이웃 고을에 갔습니다. 또한 우리 주님은 목마름도 느끼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몸이 피곤하실지라도, 영혼들을 위한 그분의 갈증은 훨씬 더 큽니다. 그래서 죄인인 사마리아 여자가 왔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사제의 마음으로 그 길 잃은 양을 구원하시려고 진지하게 말을 건네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피곤함도 배고픔도 목마름도 잊으십니다.

제자들이 이웃 고을에서 돌아왔을 때에, 우리 주님께서는 위대한 사랑을 실천하시느라 바쁘십니다. “바로 그때에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께서 여자와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요한 4,27). 그분의 배려는 얼마나 세심하고, 그분의 사랑은 얼마나 크신지요! 주님께서 보여 주신 아름다운 덕목, 곧 거룩한 정결은 우리를 더욱 강하게, 더욱 인간답게 해 주고,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게 도와주며, 하느님의 일을 더욱 잘하게 하고, 더 큰 일들을 감당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오늘 미사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삶 가운데 감동적인 장면 하나를 만납니다. 소년 시절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남아 성전에서 가르치신 장면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루카 2,44-45). 하느님의 어머니께서는 자신의 탓 없이 아드님을 잃고 그토록 간절히 찾아다니셨으며, 아드님을 찾아내시고는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죄나 부주의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였을 때에, 지나온 발자취를 되짚고 필요한 모든 것을 바로잡도록 성모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분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한 번 더 주님을 두 팔로 끌어안는 행복을 알고, 다시는 주님을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또한 지식의 어머니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에게서 가장 중요한 교훈, 곧 우리가 주님 가까이 있지 않다면 그 무엇도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온갖 경이로움도, 우리가 지녔던 모든 야망의 성취도, 우리 안에 생명의 불꽃이 타오르지 않는 한, 천국 본향의 영원한 사랑을 미리 맛보게 해 주는 거룩한 희망의 빛이 없다면, 그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마리아의 사랑이 교회에 신자들을 낳았습니다. 그들은 머리의 지체들로서, 마리아는 육에 따라 실제로 그 머리의 어머니입니다.” 마리아는 어머니들이 하는 것처럼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그분은 어머니로서 조용히 가르치십니다. 그분은 말로 약속하시기보다는 행동으로 보여 주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영혼의 예민함과 세련된 감각을 지닐 필요가 있습니다.

성모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지니도록 가르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이 말씀은 성모님께서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러 산악 지방의 한 고을로 갔을 때 엘리사벳이 드린 인사였습니다. 처녀 마리아가 보여 준 믿음의 행동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그분은 아드님이 태어났을 때, 이 땅에서 하느님의 위대함을 관상하였습니다. 천사들이 찬미 노래를 부르고, 목자들뿐 아니라 이 세상의 중요한 인물들도 아기를 찬양하러 왔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성가정은 헤로데의 살육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하여야 했습니다. 그러고는 30년 동안 조용하게 사십니다. 갈릴래아 지방의 작은 고을에서 다른 여느 가정처럼 단순하고 평범하게 사십니다.

거룩한 복음서는 성모님의 본보기를 이해하는 방법을 간략하게 몇 마디로 제시합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성모님을 본받아 우리도 주님께 말씀을 건네고, 사랑에 빠진 두 사람처럼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도 이야기합시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자 그 모든 일을 성찰하고, 그 가치를 평가하며, 믿음의 눈으로 그것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우리의 믿음이 약하다면, 성모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요한 성인은,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그리스도께서 성모님의 요청에 따라 일으키신 기적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2,11)고 이야기합니다. 성모님은 언제나 아드님께 청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얻어 주시며, 우리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소리칠 수 있도록 주님 자신을 보여 주시도록 하십니다.

열심히 주님을 흠숭하고 보속하며, 조용하고 침착하게 고통을 견디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서 활기를 띨 것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점점 더 큰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보속하고 참회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면 주님의 뜻대로 “하느님을 위하여 살려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갈라 2,19) 바라는 열렬한 희망을 경험하는 때가 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2코린 4,7). 이 질그릇은 부서지기 쉽고 깨지기 쉬운 것이지만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2코린 4,7).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2코린 4,8-10).

주님께서 우리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는다고, 우리는 속고 있다고, 우리가 듣는 모든 소리는 우리 자신의 독백일 뿐이라고 상상하는 일도 벌어질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버림받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안에는 아주 작은 죄를 비롯한 온갖 죄에 대한 생생하고 실질적인 공포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가나안 여인이 지닌 불굴의 의지로, 그녀처럼 주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 15,25) 하고 간청해야 합니다. 사랑의 빛으로 어둠은 사라지고 정복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