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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하느님의 친구들»에 복음 → 기적 항이 있음.

우리 주님처럼 저도 고깃배와 그물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복음 장면들에서 명확하고 확고한 결심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루카 성인은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그물을 씻고 있던 어부들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들이 있는 쪽으로 오시어 시몬의 배에 오르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의 배에 오르시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여러분은 삶을 복잡하게 하려고, 다른 사람들의 불평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복잡하게 하시려 정답고 사랑스럽게 우리가 가는 길에 끼어드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배에서 군중을 가르치신 다음,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어부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였으며, 그 결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그러하였듯이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던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10-11).

여러분의 배, 곧 여러분의 재능, 희망, 업적은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리스도께서 자유롭게 오르시도록 해 드리지 않는다면, 또 그분의 손 안에 놓여 있지 않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배를 우상으로 섬기고 있지 않은지 확인해 보십시오. 만일 여러분의 배에 그리스도께서 안 계시고 여러분 혼자 있다면, 여러분은 곧바로 난파의 위험에 떨어질 것입니다. 오직 주님께서 선장으로 계실 때에만, 여러분의 삶은 폭풍우와 암초에서 안전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손 안에 두십시오. 여러분의 생각, 여러분이 상상했던 용맹한 모험, 커다란 인간적 야망, 고상한 사랑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통해서 지나가게 하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은 조만간 여러분의 이기심과 더불어 저 바닥으로 가라앉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배를 하느님께서 지휘하시는 데 동의한다면, 만일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주인이 되시는 데 동의한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안전하겠습니까? 그분께서 가 버리신 것처럼 보여도, 그분께서 주무시는 것처럼 보여도, 그분께서 무관심하신 것처럼 보여도, 비록 폭풍이 일고 주위가 온통 칠흑같이 어두워져도 여러분은 안전합니다. 마르코 성인은 그러한 상황에 놓인 사도들과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마르 6,48, 50-51).

친애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수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 저는 여러분에게 많은 영혼들의 슬픔, 고통, 학대, 글자 그대로의 순교, 영웅적 행위들에 관하여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 주님께서 잠들어 계시고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루카 성인은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을 어떻게 돌보시는지 보여 줍니다. “그들이 배를 저어 갈 때에 예수님께서는 잠이 드셨다. 그때에 돌풍이 호수로 내리 몰아치면서 물이 차 들어와 그들이 위태롭게 되었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곧 잠잠해지며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느냐?’ 하셨다”(루카 8,23-25).

만일 우리가 주님께 우리 자신을 드린다면, 그분도 우리에게 자신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조금도 거리낌 없이 그분 손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행동으로 주님께서 배의 주인이심을,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주님 뜻대로 하시기를 바란다는 것을 보여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성모님께 전구를 간청하면서, 이러한 결심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믿음으로 삽시다. 희망으로 견딥시다. 예수님께 아주 가까이 붙어 있읍시다. 참으로, 참으로, 참으로 그분을 사랑합시다. 열심히 살고, 사랑의 모험을 즐깁시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 안에, 하느님과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초라한 배에 오르시어, 주님이요 스승으로서 우리 영혼을 소유하시도록 합시다. 우리를 믿음의 생활로 불러 주신 주님과 언제나 밤낮으로 함께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성실하게 보여 드리도록 합시다. “저를 부르셨기에, 저 여기 있습니다”(1사무 3,9). 우리는 착한 목자이신 그분의 목소리, 그분의 부르심에 이끌려, 오직 그분의 울타리 안에서만 이제와 영원히 참된 행복을 발견하리라 확신하며 그곳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저는 가끔 여러분에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 위에서 군중을 가르치신 감동적인 복음서 장면을 상기시켜 드렸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따르는 많은 사람을 보면서 영혼들을 향한 열정을 불태우셨고, 이제 이 위대한 스승께서는 제자들이 그 열정을 본받기를 바라십니다. 그분은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라.”(루카 5,4)는 말씀에 이어,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이 이야기에서 배울 것이 많이 있지만, 지금 그 자세한 내용을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여기에서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가 기적을 체험하고 보인 반응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그의 말은 진실이고, 또한 우리 각자에게도 꼭 들어맞는 말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럼에도 단언하건대, 저는 살면서 사람의 손을 통해 이루어진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의 역사를 수없이 많이 목격하였고, 날마다 감동하여 외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 없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저는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은 마치 자유에 대한 아름다운 찬가로 들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 없이 여러분을 창조하셨지만, 여러분 없이 여러분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으십니다.”여러분이나 저나 우리는 모두 불행히도 하느님을 거슬러 들고 일어날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아마도 행동으로) 그분을 거부하거나,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루카 19,14)라고 소리 지를 가능성을 언제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평범하게 행동하면서도 초자연적 전망을 지니고 그같이 행동한다면, 우리는 참 하느님이시요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모범을 단순하게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의 삶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보십시오. 여느 노동자들과 똑같이 남들의 주의를 끌지 않은 채 30년을 지내시면서, 마을에서는 목수의 아들로 알려졌습니다. 그분의 공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이하고 별난 행동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동포들과 마찬가지로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태도에는 유별난 것이 없었기에, 유다는 그분을 지목하려고 표시를 해야 했습니다. “내가 입 맞추는 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마태 26,48). 예수님에게는 특별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살다 가신 우리 주님의 행동 방식은 저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특별한 성소를 받은 요한 세례자는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습니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솔기가 없는 헐렁한 통옷을 있으셨고, 다른 사람들처럼 먹고 마셨으며, 이웃의 기쁨과 슬픔에 함께하셨고, 친구들이 제공하는 안식처를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생계를 위하여 목수 요셉의 곁에서 여러 해 동안 일하신 사실을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 주님께서 하신 그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제 충고는 아주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깨끗한 옷을 입고, 깨끗한 외모를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깨끗한 영혼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 것들을 내려놓으라고 가르치신 주님조차도 그것들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오천 명이 넘는 굶주린 사람들을 넉넉하게 먹이신 빵의 기적을 일으키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요한 6,12-13). 이 장면을 주의 깊게 묵상한다면, 여러분은 인색한 수전노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배우지만, 또한 하느님께서 주신 재능과 재화를 잘 관리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마르코 성인에게서 또 다른 눈먼 사람의 치유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마르 10,46). 그 눈먼 거지는 군중의 움직임을 느끼고 “무슨 일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불타올라 외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

여러분도 그렇게 외치고 싶은 열정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길가에서, 아주 짧고도 빠르게 지나가는 인생의 도상에서 주님께 외치고 싶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완덕에 이르려는 결심을 하는 데에 더 많은 은총, 더 많은 빛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고 싶지 않습니까? 이처럼 거듭거듭 외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입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이 기적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을 천천히 묵상해 보도록 권고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자비하신 성심과 우리 자신의 천박한 마음이 얼마나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지 깨닫도록 도와줍니다. 특히 여러분이 시련과 유혹을 당할 때에, 그리고 여러분 자신의 조그만 의무를 충실히 이행해야 할 때에, 또는 영웅적 행동이 요청될 때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다”(마르 10,48). 예수님께서 여러분 곁을 지나가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심장 박동은 더욱 빨라지고, 간절한 마음으로 그분을 향하여 외치기 시작합니다. 그때 여러분의 친구들, 늘 해오던 관행, 안락한 삶, 주변 환경 등이 모두 공모하여 여러분을 꾸짖습니다. “조용히 해. 소리치지 마. 예수님을 부르는 사람이 누구야? 그분을 성가시게 하지 마.”

그러나 가엾은 바르티매오는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욱더 크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처음부터 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신 주님, 그가 인내심을 가지고 기도하게 해 주십시오. 그는 주님과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저희의 외침을 듣고 계시지만, 기다리십니다. 저희가 주님을 필요로 한다는 확신을 갖기를 바라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리코를 떠나는 길목에서 기다리던 눈먼 사람처럼 우리도 끈질기게 간청하기를 바라십니다. “그 사람을 본받읍시다. 비록 우리가 청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곧바로 주시지 않을지라도, 비록 많은 사람이 우리의 기도를 만류하더라도, 끊임없이 계속해서 기도합시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마르 10,49).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단 한 번만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매 순간 우리를 찾고 계심을 늘 명심하십시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너의 게으름과 안락함과 이기심과 어리석음과 사소한 문제들을 내려놓아라. 몰골사납게 엎드려 있는 땅바닥에서 일어나라. 더 성장하고 더 성숙해지고 초자연적인 일들에까지 시야를 넓혀라.’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마르 10,50). 그는 겉옷을 벗어 던졌습니다! 여러분이 전쟁을 경험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래 전에 저는 한 가지 서약을 한 직후에 전쟁터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군인들의 외투, 수통, 그리고 기념품, 편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진 등이 들어 있는 배낭이 널려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패자들의 것이 아니라 승자들의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적의 방어선을 뚫고 질주하는 이들에게 불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아가는 바르티매오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께 가까이 다가가는 데에는 반드시 희생이 필요합니다. 길을 가는 데 방해가 되는 외투, 배낭, 수통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전투에서도, 그리스도 왕국을 확장시키는 사랑과 평화의 행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교황님 그리고 모든 영혼에게 봉사하려면,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기꺼이 버려야 하고, 밤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게 해 주는 외투도 없이, 사랑하는 가족의 기념품도 없이, 기운을 차리게 해 주는 물도 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과 사랑에서 우리가 배우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이제 놀랍고도 감동적인 대화,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하는 대화가 시작됩니다. 여러분과 저는 바르티매오입니다.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시작하시며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 그 눈먼 이가 대답합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51). 얼마나 논리적입니까! 여러분 자신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정말 볼 수 있습니까? 여러분도 때때로 예리코의 눈먼 사람에게 일어난 일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여러 해 전에 이 성경 구절을 묵상할 때를 저는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비록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예수님께서 저에게 무언가를 기대하신다는 것을 깨닫고는 열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저는 주님께서 새로운 어떤 일을 제가 감당하기를 바라신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고, “스승님, 제가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외침에 힘입어 그리스도께 거듭거듭 간청하였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제 우리 주님께 한마음으로 기도합시다.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의 뜻 따르도록 저를 가르치소서”(시편 143,10). 요컨대, 우리 입술은 창조주의 이끄심에 효과적으로 응답하고자 하는 열망을 진심으로 표현해야 하며,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그분의 계획을 따르고자 힘써야 하고, 그분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사랑한다면, 다음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곧 믿음의 가치는 단지 그것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지키겠다고 결심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예리코를 떠나는 길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이야기하십니다. 당신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마르 10,52). 이제 당신은 우리 주님께서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였고, 그분을 따라 길을 나서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당신은 주님의 발자국을 따라 걷고 그분의 옷을 입으며 그분 자신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믿음은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빛 안에서, 외적 행동과 희생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당신이 새로운 길을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은 이미 제가 이야기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발걸음과 보조를 맞추어 너그럽게 일해야 하며, 동시에 길을 가로막는 것을 모두 뿌리 뽑고 제거해야 합니다.

성 마태오는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마태 9,20). 이 여자는 얼마나 겸손합니까!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태 9,21). 언제나 바르티매오처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의 믿음을 큰 소리로 고백하는 굳은 믿음의 소유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만나시는 사람들 중에는, 이렇게 전혀 닮지 않은 두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 여인도 굳은 믿음을 지녔지만 크게 소리치지 않습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예수님께로 다가갑니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 자신의 병이 치유되리라는 확신이 그 여인에게는 있었습니다. 여인이 그렇게 하자마자,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여인을 바라보십니다. 그분은 이미 여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계시며, 그 여인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22).

“그 여인은 조심스럽게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 여인은 믿음으로 다가갔습니다. 그 여인은 믿었고, 자신이 치유되었음을 알았습니다. … 우리도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옷을 만져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우리의 믿음이 어떠해야 하는지 알겠지요? 겸손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리스도께 그러한 말씀을 들을 만합니까? 우리는 그분께 다가갑니까? 군중 속의 가엾은 여인에게 하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옷자락 술을 조금 만지고 잠시 느끼도록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을 받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 영혼과 신성을 모두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그분을 먹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에게 말하듯이, 사랑 자체이신 분께 말하듯이 친밀하게 대화를 나눕니다. 이 모든 것은 환상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이제 내가 많은 어부들을 보내어 그들을 잡아 올리겠다. 주님의 말씀이다”(예레 16,16). 우리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앞에 놓인 위대한 일에 대한 설명입니다. 우리가 대화할 때, 또는 책에서 이 세상을 종종 바다에 비유합니다. 이것은 아주 좋은 비유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에도 바다처럼 잔잔한 때와 폭풍이 부는 때, 고요한 시기와 세찬 바람이 몰려오는 시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성난 파도 한가운데서 힘겹게 헤엄을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날씨에 여행을 하고 있으며, 겉보기에는 쾌활하고 활기가 넘쳐도 실제 그들의 여정은 우울합니다. 그들이 터트리는 함박웃음은 자신들의 좌절과 분노를 은폐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삶에는 사랑도 이해도 없습니다. 물고기들처럼 사람들도 서로 잡아먹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할 일은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하느님의 그물로 들어가도록, 서로 사랑하도록 안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예레미야 예언자가 묘사하였고 예수님께서도 종종 사용하신 비유적 표현인 ‘어부’가 되려고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

우리 주님과 동행하여 그분께서 사람 낚는 거룩한 활동을 하시는 모습을 봅시다. 우리는 겐네사렛 호숫가의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군중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루카 5,1) 그분께 몰려듭니다. 마치 그들이 지금 주님께 몰려드는 듯합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보이지 않나요? 그들은 비록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느님의 메시지를 듣고 싶어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잊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종교를 이상한 것으로 여기면서 그게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영혼에게나 선택의 때가 조만간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범상한 설명들은 충분히 들었습니다. 사기꾼 예언자들의 거짓말은 더 이상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비록 그때에는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그러한 사람들은 우리 주님의 가르침으로 자신들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기를 갈망합니다.

루카 성인의 묘사를 살펴봅시다.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루카 5,2-3).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습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그리스도는 배의 주인이십니다. 고기를 잡으려고 준비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셨고, 자신의 형제들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영광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도직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서투름과 믿음 부족이 일에 방해가 됩니다.

“시몬이 대답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루카 5,5). 매우 사리에 맞는 대답입니다. 보통은 밤 시간이 고기 잡기에 좋은 때인데, 이번에는 허탕이었습니다. 낮 시간에 하는 고기잡이의 요점은 무엇이었습니까? 베드로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그는 그리스도의 제안에 따라 행동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우리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의존하여 일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루카 5,6-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바다로 나가셨을 때, 단지 고기를 잡는 것만 생각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라고 말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5,8.10)라고 이르십니다. 이제 새롭게 사람을 낚는 일에 하느님의 모든 능력과 효력이 함께할 것입니다. 사도들은 인간적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놀라운 위업을 위한 도구로 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