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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하느님의 친구들»에 수덕 투쟁 → 겸손한 투쟁 항이 있음.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여러 해 동안 경험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알퐁스 도데의 「타라스콩의 타르타랭」에 나오는 것처럼 헛되고 유치한 꿈을 계속 꿉니다. 자기 집의 복도에서 실제로는 쥐들밖에 만나지 못하는데도 사자 사냥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저는 여러분이 평범한 일상의 의무들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하느님과 동행하는 것이 얼마나 훌륭한 일인지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벌이는 일상의 투쟁들은 우리 주님께 충만한 기쁨을 드립니다. 오직 우리 주님과 우리 각자만이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만히 휴식을 취하면 휘황찬란한 기회들에 현혹되는 일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실제로 그런 기회들은 거의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여러분을 둘러싼 사소하고 평범한 일들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을 보여 드릴 기회는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로니모 성인께서 말씀하셨듯이, “사소한 일들에서도 영혼의 위대함이 똑같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창조주께서 하늘과 땅, 태양과 바다, 코끼리, 낙타, 말, 황소, 표범, 곰, 사자를 만드신 데 대해서도 흠숭을 드리지만, 또한 개미, 모기, 파리, 벌레 같은 작은 피조물, 모양은 알지만 이름조차 모르는 것들을 지으신 데 대해서도 같은 흠숭을 드립니다. 크건 작건 모든 피조물에 배인 창조주의 솜씨를 찬미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 봉헌된 사람은 거창한 일뿐 아니라 사소한 일에도 똑같이 열심입니다.”

1940년대 초반에 저는 매우 자주 발렌시아로 가곤 했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인간적으로 볼 때에 가진 것이라고는 없었습니다. 지금의 여러분처럼, 이 빈털터리 사제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과 더불어 황량한 물가에서 오후에 가능한 곳에서는 어디서든 기도를 바치곤 했습니다. 주님의 첫 번째 친구처럼 말입니다. 기억하십니까? 성 루카 복음사가는 바오로 사도와 자신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티로를 떠날 때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록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부인들과 아이들과 함께 우리를 도시 밖까지 배웅하였다. 이윽고 바닷가에서 우리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사도 21,5).

자, 때는 늦은 오후였습니다. 발렌시아의 아름다운 석양이 지는 가운데, 배 한 척이 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화강암처럼 강인하고 거무스레 보이는 어떤 사람들이 배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들은 웃옷을 벗고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는데, 마치 청동 인간처럼 살갗이 햇볕과 바람에 그을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배 뒤편에 매달린 그물을 끌어당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은빛 찬란한 물고기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이 놀라운 힘으로 그물을 당기자 그들의 발은 모래에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역시 햇볕에 그을린 어린이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그 아이는 작은 손으로 밧줄을 붙잡고, 무척 어색한 몸짓으로 밧줄을 끌어당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어부들은 그들의 마음이 부드러워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도움보다는 오히려 방해가 되는 이 어린이를 쫓아버리지 않고 함께 밧줄을 당기도록 해 주었던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저 자신에 대하여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밧줄을, 그리고 많은 것들을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어린이처럼 비록 나약하지만 우리 주 하느님의 계획에 따를 준비를 하고 그분 앞에 나선다면, 우리는 훨씬 더 쉽게 우리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물고기가 가득 찬 그물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하느님의 힘이 닿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많은 실패를 경험하였더라도,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성덕을 이루겠다는 불타는 열망, 강렬한 열정이 뿌리내리도록 합시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적 생활의 발전이 있을수록,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더욱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은총은 마치 우리 안에서 돋보기처럼 작용합니다. 아주 작은 먼지나 거의 보이지도 않는 모래 알갱이도 무한히 크게 보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총을 통해 영혼이 거룩한 감수성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극히 희미한 어둠에서도 양심은 고통스러워하며, 오직 지극히 맑으신 하느님 안에서만 기쁨을 얻게 됩니다. 이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바칩시다. “주님, 저는 참으로 성인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참으로 주님의 제자가 될 자격을 갖추고 무조건 주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바로 이 순간 여러분의 마음에 새겨진 위대한 이상을 날마다 새롭게 확고히 하겠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오, 예수님, 당신의 사랑 안에서 결합되어 있는 우리들이 참으로 인내롭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 영혼에게 일깨워 주신 그 열망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가끔 자문해 보십시오. ‘도대체 나는 왜 이 땅에 살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여러분의 일상 과제를 사소한 데까지 완벽하고 성실하게 끝마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성인들의 모범을 뒤따릅시다. 그분들은 우리와 똑같이 살과 뼈를 지닌 사람들로서 실패도 하고 나약함도 있었지만,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이기고 통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꽃 한 송이 한 송이에서 꿀을 모으는 벌들처럼, 성인들의 삶을 연구하고 그분들의 투쟁에서 하나하나 배우도록 합시다. 여러분과 저는 또한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서 수많은 덕행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그들의 고생과 자아 포기, 또 그들의 기쁨을 보면서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점에 너무 오래 머무르지 않아야 합니다. 형제적인 충고가 필요할 때에, 절대적으로 필요할 때에만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용기 있게 자신을 성찰한다면, 저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날마다 자신의 결점을 많이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도움으로 그것들을 없애려고 힘쓴다면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며, 비록 뿌리까지 완전히 없애지는 못할지라도 그것들을 이겨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러한 나약함을 넘어서, 만일 여러분이 참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상응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중대한 단점들을 치유하는 것을 도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들처럼 나약하고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 아무리 그것이 끔찍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고 더 너그럽게 대할 것이며, 동시에 더욱 간절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사람이 마음으로부터 하느님을 사랑하겠다고 결심하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그리스도인은 위선자들이 주님께 미끼처럼 던진 말처럼 스승님의 본보기를 성실하게 따름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스승님께서는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줄 압니다”(마태 22,16). 다시 말하자면, 비록 하느님의 뜻에 따라 (때로는 그것이 단지 인간적 이유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돌보는 일은 있을지라도 어떠한 차별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영혼에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더 발전하고 싶거나 주님께 더욱 헌신하고 싶은 열망이 솟구칠 때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인답게 살도록 이끌어 줄 북극성 같은 무언가를 찾을 때마다, 성령께서는 복음 말씀을 상기시키실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 기도는 모든 초자연적 노력의 토대입니다. 기도와 함께라면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없다면, 기도를 등한시한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저는 우리가 길을 갈 때에나 일을 할 때에나 언제나 우리 하느님과 잠시도 멈추지 않고 대화를 계속 나눔으로써 명상적 영혼이 되겠다고 굳게 결심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참으로 주님의 충실한 추종자가 되기를 바란다면, 이것이 유일한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