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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하느님의 친구들»에 책임감 → 책임과 자유 항이 있음.

여담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이것은 지금까지 말해 온 것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저는 저를 찾아온 어느 누구에게도 정치에 관한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저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제가 지향하는 것은, 거룩한 교회를 섬기고자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힘입어 저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오푸스데이에 관한 기본적 사실을 밝히는 것입니다. 제가 이 주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 교도권이 설정한 것 외에는 아무런 규제 없이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사안에 참여하는 데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고 그에 따른 의무를 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위하여 제가 걱정하는 유일한 것은, 여러분이 그 한계를 넘어 신앙에 명백히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제가 여러분에게 분명히 그렇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법으로부터 여러분을 이탈시키지 않는 한, 여러분의 의견은 마땅히 존중될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얻어내신 자유의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갈라 5,1). 또한 그들은 극단적 분파들로서, 자신들의 세속적 견해를 교의로 둔갑시키려는 자들 또는 신앙의 가치를 부인하고 중대한 오류들에 휘둘려 사람을 타락시키는 자들입니다.

여기 계신 하느님 앞에서 다시 한 번 자문해 봅시다. “주님, 어째서 우리에게 이러한 힘을 주셨습니까? 어째서 우리에게 당신을 선택할 수도 거부할 수도 있는 권한을 부여하셨습니까? 주님께서는 저희가 이 힘을 좋은 곳에 사용하기를 바라십니다. 주님은 제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십니까?”(사도 9,6 참조) 그분의 대답은 간단명료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자유는 진리에 봉사할 때에만, 또 온갖 유형의 노예 상태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추구할 때에만 진정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리스도교의 무궁무진한 보화, 곧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로마 8,21)를 사방에 선포하고픈 저의 열망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갑니다. 이것이 ‘선의’의 본질적 의미이며, 이 ‘선의’로써 우리는 “악에서 구별해 낸 선을 추구”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근본적인 점에 관하여 묵상해 보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양심상 지녀야 하는 책임을 통감하게 합니다. 우리를 위한 선택은 우리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가장 고귀한 면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에 의해서 선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은 부모님에게서 가톨릭 신앙을 물려받았고, 하느님의 은총 덕분에 세례로 새로 태어난 그 순간부터 초자연적 생명이 우리 영혼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생 내내 날마다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한 분이시며 유일하신 하느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며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순명에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으며,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태도 그대로 악마의 유혹들을 거부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

사제로 한평생을 살면서 인간의 자유에 대한 저의 사랑에 관하여 이야기하거나 소리 높여 외칠 때마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자유에 대한 저의 변론이 신앙을 위태롭게 할 것처럼 의심하고 불신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소심한 분들에게, 믿어도 좋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직 신앙을 공격하는 자유만이 그릇된 자유, 목표 없는 자유, 객관적 원칙 없는 자유, 무법적이고 무책임한 자유입니다. 한마디로 방종입니다. 불행히도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자유를 옹호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이야말로 참으로 신앙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을 수 있다는 뜻으로 양심의 자유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반대할 수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의도적으로 그러한 태도를 취한다면, 그는 죄를 범하는 것이고 가장 중요하고 첫째가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5).

저는 온 힘을 다해서 양심의 자유를 옹호합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을 방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진리를 향한 정당한 갈망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찾고 그분을 알며 그분을 경배할 막중한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이웃에게 신앙 실천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어느 누구도 하느님에게서 신앙을 받은 사람들을 해칠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묘한 가짜 문제들과 요구에 휘말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사기, 변덕, 편의주의, 게으름에서 오는 것들입니다. 빠른 걸음으로 하느님께 나아가려면, 우리 앞길을 방해하는 장애물과 무거운 짐을 없애야 합니다. 세상 것들을 갖고 있으면 마음의 가난은 멀어집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진 것을 내려놓고,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는 헛된 망상에 속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대로, “여러분에게 무엇이 충분한지 찾아내십시오. 그리고 더 많은 것을 바라지 마십시오. 적정선을 넘으면 마음의 편안함이 아니라 근심이 생깁니다. 그것은 당신을 드높게 해주기는커녕, 짓누를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충고를 할 때에, 저는 예외적이거나 복잡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 가운데, 종잇조각을 책갈피로 쓰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그 종이에 하느님의 현존을 잊지 않게 도와주는 간절한 기도를 정성스럽게 쓰곤 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은 그 보물을 간직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결국 그 허접한 종이들에 집착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갖추어야 하는 덕목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저의 부족한 점들을 낱낱이 말씀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도 저와 비슷한 일들이 벌어질 것이기에 그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한 상황이 된다면 저는 여러분에게 영적 지도자를 찾아가 상담을 받을 것을 권장하고 싶습니다. 때때로 최선의 치유책은 짧은 시간이나마 어떤 것 없이 지내는 작은 극기입니다. 또는 출퇴근 등 이동을 할 때에 가끔은 통상적인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절약한 돈으로 적은 금액이나마 자선을 베푸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여러분이 세상 것들을 내려놓을 마음을 참으로 지니고 있다면, 효과적이고 지나치게 야단스럽지 않은 방법을 찾아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마음을 열어 고백하고 싶은 것 하나는, 제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깊은 사랑입니다. 저는 그것을 최고의 스승이신 분에게 배웠고, 그분의 모범을 참으로 충실하게 따르고 싶습니다.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모든 사람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과 부드러움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복음사가는 그분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을 가리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제자”(요한 13,23)라고 묘사하지 않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