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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하느님의 친구들»에 일상 생활 → 천국을 바라보며 항이 있음.

지금 바로 우리 곁 감실 안에 현존하시며 우리를 이끄시는 하느님(예수님께서 우리 곁에 이처럼 가까이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 든든한 일입니까!)의 도움으로, 우리는 오늘 망덕(望德), 곧 희망의 덕에 관하여 묵상하고자 합니다. 이 향주덕은 하느님의 너그러운 선물이며, 이 선물 덕분에 우리 마음은 희망 속에서 기뻐합니다(로마 12,12). 우리가 충실하기만 하다면, 영원한 사랑이 우리를 기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 오직 두 가지 생활 방식만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힘쓰면서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느님을 제쳐 두고 동물처럼 살며, 많건 적건 간에 인간적 생각에 따라 지내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하지만 자신의 불신앙을 자랑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저는 지나친 믿음을 지닌 적이 없습니다. 저는 다른 모든 인류 형제를 사랑하듯이 참으로 그들을 사랑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영웅적이기까지 한 그들의 선의를 존경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아쉬움을 느끼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빛과 따뜻함, 그리고 희망의 향주덕에서 오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는 행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믿음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며, 그의 시선은 언제나 하느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의 눈은 초자연적인 것들을 바라봅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일하고, 열정적으로 도전하고 사랑하지만, 그의 눈은 언제나 하늘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성 바오로 사도는 이 점을 아주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세례를 통하여 세속에 대해서)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콜로 3,1-3).

그러나 이 세상에는 위와 같이 겁 많고 경솔한 방식으로도, 비록 초자연적 동기는 아니고 단지 인류애에 따른 것이지만, 고귀한 이상을 추구하는 강직한 개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온갖 역경에 부딪힙니다. 그들은 기꺼이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며, 고통과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도와줍니다. 저는 그들이 고귀한 이상을 위하여 온 마음을 다해 끈기 있게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언제나 감동하고 존경심까지도 생깁니다. 그렇지만 제가 여러분에게 상기시켜 드려야 할 점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단지 우리 자신의 일이라면 그 시작부터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내 손이 이룬 그 모든 위업과 일하면서 애쓴 노고를 돌이켜 보았다. 그러나 보라, 이 모든 것이 바람을 잡는 일. 태양 아래에서는 아무 보람이 없다”(코헬 2,11).

이러한 불안함이 희망을 질식시키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세속적 노력이 무의미하고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참된 희망을 향한 길이 열립니다. 그 희망은 모든 인간적 노력을 승화시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지점으로 바꾸어 줍니다. 꺼지지 않는 불빛이 우리의 모든 일을 비추어 실망의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운 세속적 계획이 그 자체로 끝나 버리고 우리의 영원한 본향과 창조 목적, 곧 하느님을 사랑하고 찬미하며 하늘에서 영원히 그분을 차지하도록 창조되었음을 시야에서 흐리게 하고 만다면, 아무리 빛나는 노력도 반역에 불과하며, 심지어 동료들까지 타락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자신이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 밖에서 행복을 찾던 때의 쓰라린 경험을 탁월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주님, 주님을 위하여 저희를 내셨기에, 주님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찹찹하지 않삽나이다.” 모든 것을 부족함 없이 채워 주시는 사랑이신 한 분 하느님 말고 다른 것에 희망을 둠으로써 자신의 희망을 더럽히고 타락시키고 말았다는 자기 환멸보다 더 큰 비극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저에게 일어난 일이 여러분에게도 똑같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저의 감성과 지성으로 확신하는바, 제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제 마음을 참된 희망으로 가득 채웁니다. 그 희망은 초자연적 덕이지만, 우리에게 부어지면 우리 본성에 적응하여 매우 인간적인 덕이 되기도 합니다. 제가 끝까지 충실하면 하늘나라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저는 행복합니다. 제가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이 저를 기쁘게 합니다. “주님은 선하신 분”(시편 106,1)이시고, 주님의 자비는 무한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확신 덕분에 저는, 하느님을 담고 있는 것들만이 지워지지 않는 영원함을 드러내고 항구한 가치를 지닐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희망은 이 세상의 것들로부터 저를 분리시키기는커녕, 새로운 방식, 곧 모든 것 안에서 우리의 타락한 본성과 창조주요 구원자이신 하느님 사이의 관계를 발견해 내는 그리스도인다운 방식으로 세상의 현실에 더욱 가까이 접근하도록 이끕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물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어떠해야 하는가?” 우리의 마음은 행복을 열망하며 사랑을 찾아 열심히 달려갑니다. 세상은 우리의 그러한 마음을 잡아끄는 좋은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곳곳에 평화와 기쁨의 씨앗을 뿌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성공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주변의 모든 사람도 행복하게 만들고 싶어 합니다.

아, 안타깝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목표는 가치가 있기는 하지만 너무 낮고 그들의 이상도 빠르게 변질되고 사라집니다. 그들은 모든 것 가운데 최고 봉우리이자 무한한 것을 열망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느님의 바로 그 사랑이며, 끝없는 기쁨 속에서 그 사랑을 충만하게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여러모로 알고 있듯이, 이 세상에 종말이 오면 우리가 살아온 여기 지상의 일들은 모두 끝이 납니다. 각 개인의 경우로 보면, 그러한 상황이 더욱 빠르게 이루어집니다. 사람이 죽을 때에, 자신이 지상에서 이룬 부와 특권을 무덤으로 가져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희망으로 가득한 마음을 하느님께 들어 올리고,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제가 당신께 피신하니,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시편 31,2). 오, 주님, 저의 희망은 오로지 주님께 있습니다. 주님의 손으로 이제와 영원히 저를 이끌어 주소서.

만일 여러분이 투쟁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더욱더 닮아 가고 그분을 알고 사랑하려는 노력을 참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느님의 자녀로 행동하는 왕다운 길을 진지하게 출발하자마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거룩한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주님과 일치하고자 하는 우리의 희망을 지탱해 주는 핵심 기둥으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 앞에 놓인 일들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미리 경고하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삶을 사는 데에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성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겪은 고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 그 밖의 것들은 제쳐 놓고서라도, 모든 교회에 대한 염려가 날마다 나를 짓누릅니다”(2코린 11,24-28).

주님과 나누는 대화에서 제가 좋아하는 것은 날마다 일어나는 일상적인 현실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극심한 역경과 영웅적 업적을 상상하거나 이론적인 공상을 하는 것은 피하려고 합니다. 중요한 점은, 언제나 우리가 움켜쥐려고 해도 빠져나가고 그리스도인에게도 금보다 더 소중한 시간을 잘 활용하는 것입니다. 그 시간은 장차 우리가 누릴 영광을 미리 맛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겪는 어려움들은 바오로 사도가 겪은 어려움들과 견주어 볼 때 그렇게 심하지도 않고 횟수도 적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기심, 비열함, 정욕, 쓸모없고 우스꽝스러운 자만, 그 밖의 많은 결점들과 약점들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낙심하고 말 것입니까? 전혀 그럴 것이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와 더불어 우리도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10).

가끔 우리가 의도한 것과는 정반대로 일이 전개될 때에, 자연스럽게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주님, 제가 하는 일이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잘못되고 있습니다!” 그때가 우리의 방법을 바로잡고 주님께 말씀드릴 때입니다.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 꾸준히 전진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저의 힘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일을 하는 동안에도 눈을 들어 계속 하늘나라를 향하라고 여러분에게 강조하였습니다. 하늘나라를 향한 희망 덕분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뻗치신 강하신 손을 붙잡을 수 있으며, 초자연적 전망을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들이 불끈하여 우리를 공격하고 이기심의 좁은 감옥에 가두어 놓으려 할 때에도, 또는 유치한 허영심에 사로잡혀 우리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착각을 할 때에도, 끈기 있게 견디어 냅시다. 확신하건대, 저 위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모시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을 이기고 정복하는 힘은 다음과 같이 거듭 외치는 데서 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이 외침은, 우리가 하느님을 버리지 않는 한 당신의 자녀를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확고하게 약속하신 하느님께 드리는 메아리입니다.

희망의 덕을 자라게 하여 우리의 믿음을 굳건히 합시다. 참으로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 우리의 믿음을 키우고, 우리 안에 주님을 향한 사랑을 더욱 키워 주시도록 간청합시다. 우리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히 가치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경험으로 볼 때,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주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포기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심장은 단 하나의 사랑으로 놀라운 조화를 이루며 고동칩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사랑은 어떨까요? 그리스도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보잘것없고 가엾은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희생 제사를 완성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상급에 관하여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2-3). 하늘은 지상 나그네인 우리 여정의 종착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가셔서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거기에는 제가 그렇게도 공경하는 성모님과 성 요셉, 그리고 모든 천사와 성인들이 계십니다.

사도 시대에조차도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희망을 빼앗아 버리려는 이단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2-14). 우리의 길은 거룩한 예수님,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자신이십니다(요한 14,6 참조).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떨어져 나와 분리되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길은 마침내 영원한 행복에 이르리라는 것은 확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