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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밭고랑»에 정의 → 사회 정의 항이 있음.

이기주의에 패배해서 사람들의 건전하고 즐거운 생활을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다면, 또한 이기적으로 이웃의 물적 혹은 정신적 비참을 보면서 아무 느낌도 들지 않는다면 당신이 어떻게 하든 나는 엄한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약 그대가 그대의 동료들과 형제인 사람들에게 거룩한 형제애를 느끼지 않고, 그리스도인 자녀의 대가족으로부터 떨어져 산다면, 당신은 불쌍한 버려진 아이라는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대는 이렇게 썼습니다: 북부지방으로 가고 있던 한 젊은 사람이 우리 그룹에 합류했습니다. 그는 광부였습니다. 그는 노래를 잘 불렀고 우리들과 어울렸습니다. 그가 내릴 역에 도착할 때까지 저는 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가 내릴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네들과 함께 여행을 계속하게 되었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저는 곧 저 “주님, 저희들과 함께 머무시지오!”를 머리에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믿음을 가지고 다시 그에게 요구하기를,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동반자로서의 우리들 하나하나 안에서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뵈옵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대중들은 떠나가서 “정당화된 불평의 길”로 내려가고 있었고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을 계속합니다.

그것은 고통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영적으로나 또는 물질적으로 청빈한 사람들에게 불만을 품도록 만들었나요!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사람과 비천한 사람 사이에 한번 더 자리잡고 계시게 될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들과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계급의 선입견을 향유할 수 없는데, 그것은 그가 모든 사람의 문제들에 흥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문제들을 우리들의 구원자이신 분의 정의와 사랑을 가지고 해결하도록 돕기를 시도합니다.

“주님은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라고 그가 썼을 때 그 사도는 이미 그 점을 지적해냈습니다. 저는 그의 말을 이렇게 옮기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의 인종, 곧 하느님의 자녀라는 인종이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의 싸움을 싸우고 —그리고 이기는— 그 이상은 오직 기도와 희생으로, 믿음과 사랑으로 실현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도하고, 믿고, 고난을 당하고, 그리고 사랑합시다.

더 열심히 일해 주십시오. 어쨌거나 업무상의 사안은 어디까지나 업무상의 일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일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일 뿐 근본적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일 중독’이 얼마나 하느님과의 일치를 막고 있는 것인가.

그대가 저 그리스도를 위한 형제애적인 일의 이상을 이해하게 될 때 그대는 더 나아지고, 더 안심되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될 수 있는 한 행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퍽 많은 사람들이 자기네들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만을 따라감으로써 이 세상을 왜곡되고 모질게 만드는 데 열중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언제나 그리고 모든 일에서 성실하고 개방된 형제애를 가지고 사람들을, 어떤 사람이라도 대면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대가 하느님을 대면하면서 산다는 것을 저에게 이해시키려고 시도하지 마십시오.

돈,가문, 계급, 지위, 지성 등에 의해 얻은 특권을 악용해 어려운 사람들에게 창피를 주는 사람들은 모두 어리석고 교만하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대가 조직한 모임에 참석한 후에, 그 노동자가 열중해서 말하고 있던 것을 메모했습니다. 이곳에서 들은 것 같은 고결함이나 정직, 상냥함이나 관대함 등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감탄한 그 사람은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좌익과 우익의 물질주의에 비교하면, 이것은 참된 혁명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확립해 주신 형제애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없을 테니 열심히 노력해서 그 가르침이 힘을 잃지 않도록 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