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그리스도의 발자국 (1955년 4월 3일 강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주님께서는 이 명백하고 틀림없는 말씀 안에서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하는 참된 길을 우리에게 남겨 주셨습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하는 방식이 매우 특별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저나 여러분 같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소명을 받아들여, 우리의 생각과 입술 안에, 그리고 우리가 하는 가장 평범하고 일상적인 행동들을 포함한 모든 일에 언제나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길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이 땅에 사시면서 뚜렷한 발자국을 남기셨습니다. 이 발자국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사악한 자들이 아무리 없애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표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히브 13,8). 저는 이 말씀이 참으로 좋습니다! 사도들과 당시 사람들을 위하여 어제 사셨던 바로 그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오늘 똑같이 살아 계시고,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가엾은 인간은 때때로 예수님께서 이처럼 영원한 현재로 존재하고 계심을 깨닫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은 다른 곳들을 보느라 지쳐 있고 또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감실 가까이 다가가 기도를 시작하면서, 복음서의 눈먼 이가 했던 것처럼 주님께 간청합시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 18,41). 저의 이성을 밝혀 주시고, 저의 마음 깊숙이 그리스도의 말씀들을 심어 주소서. 저의 영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굳세게 하시어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참으로 명확하고 선명합니다! 이번에는 신약 성경의 마태오 복음 11장으로 가보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여러분은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유일한 모범이신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이 발을 헛딛지 않고 방황하지 않으려면, 주님께서 걸으신 길을 그분 발자국을 따라 그대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분의 겸손하고 온유하신 마음으로 들어가 그분의 계명과 사랑의 샘에서 생명의 물을 마셔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여러분 자신을 그리스도와 일치시키고, 여러분 동료 사이에서 실제로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제 이야기에 틀림이 없음을 확실히 하고자, 다른 말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마태오 복음 16장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더욱 분명히 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하느님의 길은 극기와 고행과 자아 포기의 길이지만, 슬프거나 두려운 길은 아닙니다.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골고타의 가시관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본보기를 깊이 성찰해 봅시다. 그분의 자기 부정, 그리고 그분이 겪으신 모든 일, 곧 굶주림, 목마름, 피로, 압박감, 피곤함, 학대, 오해, 눈물에 관하여 생각해 봅시다(마태 4,1-11; 8,20; 8,24; 12,1; 21,18-19; 루카 2,6-7; 4,16-30; 11,53-54; 요한 4,6; 11,33-35 등 참조). 그러나 동시에 온 인류를 구원하신 그분의 기쁨도 생각해 봅시다. 이제 저는 여러분이 주님의 길을 자주 묵상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바오로 사도께서 에페소 신자들에게 주님의 발자국을 뒤따르라고 초대하는 말씀을 여러분의 정신과 마음에도 깊이 새겨 주고 싶습니다.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 5,1-2).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자신을 포기하시고 희생 제물로 봉헌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인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희생으로 값을 치러 여러분을 죽음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여러분도 자기를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제가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한다고 느끼실 수 있겠지만,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이기적이거나 물질주의적이거나 편안함만을 추구하거나 방탕하거나 어리석게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동료들에게 좋은 평가만을 받으려고 하거나 존경과 감사 받기를 갈망하거나 즐거운 생활만을 추구한다면, 여러분은 길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 오직 좁고 허름하고 엄격한 고행의 길을 여행하는 사람들만이 성인들의 도시에 들어가 임금님과 더불어 영원히 안식을 누리고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자유의지로 십자가를 짊어지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닮겠다고 말하지만, 행동은 그 말이 거짓임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주님을 깊이 있게 알지도 못할 것이고 그분을 참으로 사랑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이 점을 확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변덕과 허영과 사리사욕이 요구하는 수많은 것들을 자발적으로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주님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고행의 소금과 은총으로 단련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이 비참해질 것이라는 생각은 제발 버리십시오. 자기감정과 환상에 매몰되어 담대하게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고 극기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그 사람이 얻을 수 있는 행복은 얼마나 슬프고 보잘것없는 것이겠습니까!

이미 알고 있는 분도 계시겠지만, 스페인 문학 황금기의 한 작가가 이야기한 꿈이 생각납니다. 그 작가는 자기 앞에 있는 두 갈래 길을 봅니다. 하나는 넓고 평탄하며 편안한 길입니다. 안락한 여관과 음식점도 많고 볼거리와 즐길 것도 수없이 많습니다. 이 길을 따라서 수많은 군중이 시끌벅적한 음악과 공허한 웃음소리 가운데 말이나 수레를 타고 갑니다. 이 길의 끝은 천 길 낭떠러지이지만, 천박하고 덧없는 기쁨에 도취된 많은 사람이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 길은 세상 것에 마음을 두고 물질적 육체적 쾌락을 끝없이 추구하며 거짓 행복을 자랑하고 안락함과 쾌락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길입니다. 그들은 고통과 자기 부정과 희생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두려워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고, 미친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제정신이 아닌 사람은, 시기심과 탐욕과 음욕의 노예인 그들입니다. 그들의 종말은 더 큰 고통입니다. 무의미하고 사소한 것들을 얻으려고 세상의 참다운 행복과 천상의 영원한 행복을 대가로 치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겠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5-26)

앞서 이야기한 작가의 꿈에서, 또 하나의 길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습니다. 너무 가파르고 좁아서 말을 타고는 갈 수 없는, 누구나 걸어서 가야 하는 길입니다. 지그재그 현기증 나는 험한 길이지만,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은 꾸준히 움직입니다. 가시덤불이 우거진 길도, 돌과 바위가 가로막은 길도 조심조심 나아갑니다. 때로는 옷이 찢기고, 심지어는 살도 찢어집니다. 그러나 이 길의 끝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낙원이요 영원한 행복이요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 길은 거룩한 성인들, 자기를 낮춘 겸손한 사람들,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의 길입니다. 가파른 언덕길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무리 무거운 십자가일지라도 사랑으로 짊어진 채 나아갑니다. 십자가의 무게에 눌려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 계속해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여행자들의 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길을 가다 넘어지는 고통을 겪을지라도 다시 일어나 계속 움직일 힘을 새롭게 얻는다면, 넘어지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성인이란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람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들에게는 겸손함과 거룩한 완고함이 있습니다. 잠언에 이르기를, ‘의인은 하루에 일곱 번 쓰러져도 일어난다.’(잠언 24,16 참조)고 하였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가엾은 피조물이기에 나약함과 타락을 경험하며 깜짝 놀라고 낙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 안에서 용기를 얻으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감사합니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시편 18,2). 주님 홀로 언제나 저의 힘이시요 피신처이시며 방패이십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내적 생활의 진보를 바란다면, 겸손하십시오. 끊임없이 신뢰심을 가지고 우리 주님께, 그리고 주님의 어머니시며 우리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도움을 간청하십시오. 넘어진 상처가 아무리 심각할지라도 한 번 더 십자가를 끌어안고, 좌절하지 말고 조용히 말씀드리십시오. “주님, 저는 주님의 도움으로 뒤로 물러서지 않고 싸울 것입니다. 주님의 초대에 충실히 응답할 것입니다. 가파른 오르막길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하루하루 단조로운 일과도 감내할 것이며, 도중에 만나는 위험한 바위와 엉겅퀴들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가 저를 돕고 있으며, 이 길의 끝에서 끝없는 기쁨과 사랑이 넘치는 영원한 행복이 저를 기다리고 있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작가는 같은 꿈에서 세 번째 길을 발견합니다. 이 길은 두 번째 길과 마찬가지로 좁고 가파르며 바위투성이입니다. 이 길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무수한 역경 속에서도 엄숙하고 당당하게 걸어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끝은 첫 번째 길과 마찬가지로 끔찍한 낭떠러지입니다. 이 여행자들은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야심으로 하느님의 일을 오염시키고 거짓 지향과 헛된 열정을 지닌 위선자들입니다. “단지 존경을 받으려고 힘들고 고된 일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또한 오직 세속적 보상을 받으려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계명들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입니다. 인간적 이익을 위해서 덕을 실천하는 사람은 단지 몇 푼을 위해서 값을 헤아릴 수 없는 가보를 내다 파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얻을 수도 있었지만, 일시적 명예를 얻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 그래서 사람들은 말하기를, 위선자들의 희망은 거미줄과 같다고 합니다.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해서 거미줄을 만들었지만, 결국은 죽음의 바람 한 줄기에 날아가 버립니다.”

이렇게 쉽지 않은 현실을 여러분에게 상기시켜 주는 이유는, 여러분 행동의 동기를 주의 깊게 성찰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고쳐야 할 것은 고치고, 모든 것이 하느님과 여러분의 동료들에게 봉사하도록 올바른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곁을 지나가셨음을, 지나가시면서 우리에게 사랑의 눈길을 주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은총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2티모 1,9).

그러므로 여러분의 지향을 정화하십시오.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모든 일을 하고, 날마다 기쁜 마음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십시오. 이러한 생각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저는 수천 번 되풀이하여 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단순히 어려움과 고통을 (그것이 신체적인 것이건 윤리적인 것이건) 견디는 단계를 넘어 그것들을 사랑하고, 우리를 비롯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하느님께 봉헌한다면, 그것들이 우리를 괴롭히지는 않으리라고 장담합니다.

이제 우리가 짊어진 십자가는 더 이상 아무런 이름도 없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 구원자께서 몸소 그 십자가를 짊어지셨음을 알기에 위안을 받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우리도 예수님께 협력하여야 합니다.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던 시몬은 마땅히 휴식을 누릴 자격이 있었지만, 예수님을 도와 자신의 어깨를 빌려드려야 했습니다(마르 15,21 참조). 사랑에 빠진 영혼에게는 그리스도를 위한 키레네 시몬이 되어, 그분의 고통받는 인성에 동참하고, 누더기 상태로 전락하는 것이 결코 불행이 아닙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느님과 가까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어 이 일을 하도록 선택하셨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덕분에 오푸스데이 안의 제 자녀들이 놀라운 기쁨을 누렸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기쁨이 확산되었습니다. 이 일에 관하여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이야기하였고, 저는 이 명백한 진실에 대하여 언제나 똑같은 대답을 합니다. 다른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행복은 그들이 결코 삶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그들은 불행에 직면하여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결점과 나약함에도 희생정신으로 살려고 날마다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길이 다른 사람들에게 더 쉽고 더 즐거운 것이 되도록 자신을 끊임없이 기꺼이 내어놓습니다.

지금 제가 말하고 있는 동안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가운데 여러분이 자신의 과거 행동을 되돌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불안하게 만들고 평화를 앗아간 원흉은, 거룩한 은총의 부르심에 맞갖게 살지 못했다는 자책이 아니었습니까? 또는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며 위선의 길을 걸어왔다는 자책인가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웃에 대한 봉사를 단지 겉으로만 실천하는 것은 아쉬운 일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대로 완전한 포기 속에서 자신을 끊고 제멋대로의 감정을 버리며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내어놓는 일을 내면에서는 거부하는 자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감실 앞에서 묵상하는 시간에는 단순히 사제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 이상의 일이 벌어집니다. 마치 그분이 각 개인의 내밀한 기도 안에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만 같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몇 가지 제안과 지침을 주겠지만, 실제로 받아들이고 성찰하는 당사자는 여러분 자신입니다. 제가 제시하는 것들을 여러분 자신과 하느님 사이의 인격적이고 내적인 대화에 활용하고 여러분의 실제 상황에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우리 주님께서 비추시는 빛 안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고, 주님 은총의 도움으로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도 온갖 좋은 일을 해 주신 우리 주님께 감사하며, 시편 저자와 함께 노래합시다. “나를 멸망의 구덩이에서, 오물 진창에서 들어 올리셨네. 반석 위에 내 발을 세우시고 내 발걸음을 든든하게 하셨네”(시편 40,3). 또한 여러분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과 사악한 위선에 빠져 그릇된 길을 간 것에 대하여 용서를 청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의 선익만을 열망한다고 말씀드리십시오. 이렇게 할 때에 여러분은 사실상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담대해지고 너그러워지십시오. 그리고 앞으로는 더 이상 우리 주님과 사람들을 속이지 않겠다고 선언하십시오.

이제 하늘에 계신 복되신 어머니께 우리를 당신 팔로 안아 주시고 아드님의 자비를 얻어 주시도록 기도할 때입니다. 그리고 몇 가지 실천 사항을 결심해 보십시오. 하느님과 여러분 자신이 아주 잘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발전을 가로막는 사소한 결점을, 비록 아픔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끊어버리십시오. 교만, 관능적 욕망, 그리고 초자연적 실재에 대한 불감증은 서로 힘을 모아 여러분에게 속삭일 것입니다. “그래? 하지만 그것은 얼마나 하찮고 대수롭지 않은 일인가!” 유혹에 속아 넘어가지 말고,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그래, 이번에도 나는 거룩한 부르심에 나를 맡길 거야.” 사랑은 특별히 작은 일에서 드러나므로, 여러분은 옳은 결심을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희생은, 비록 아무리 어려운 것일지라도, 대개는 아주 사소한 행위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심장 박동처럼 멈추지 않으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귀중합니다.

위대하고 특별한 사건의 영웅들 가운데 어머니는 얼마나 많이 있었을까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는 진정한 영웅인 어머니를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화려하게 묘사되지도 않고, 신문이나 방송에서 주요 뉴스로 다루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분들의 삶은 끊임없이 자신을 포기하는 삶이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 자신을 위한 시간, 자기표현이나 성공을 위한 기회들을 기꺼이 양보하여 자녀들에게 행복의 양탄자를 깔아 주는 삶이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다른 예를 들어 봅시다. 바오로 사도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1코린 9,25). 먼저 여러분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사람들이 자기 몸을 가꾸고 건강을 지키고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려고 좋든 싫든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르는지 살펴보십시오. 제대로 보답받지도 못하면서 인간을 무한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애틋하게 생각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억제해야 할 것을 억제함으로써 우리 마음과 정신을 더욱 주님께 집중하는 것이 그렇게 불가능합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의미가 왜곡되어 전달되었기 때문에, 고행과 참회라고 하면 몇몇 성인들의 놀라운 일화에서 언급되는 엄격한 단식과 거친 옷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오늘 강론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을 우리 행동의 모범으로 삼고 본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자명한 기본 전제로 설정하였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침을 펴시기에 앞서 광야로 나가시어 40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것은 사실입니다(마태 4,1-11 참조). 그러나 그전에, 그리고 나중에 주님께서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루카 7,34)라는 비방을 적들에게서 들을 만큼 자연스러운 삶 안에서 절제를 실천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에게서 참으로 단순한 삶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야단스럽지 않은 조용한 참회 행위를 하라고 당부하십니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16-18).

우리는 참회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옮길 때에, 하느님을 향하여 바라보고 마치 자녀처럼, 어린아이처럼 행동하여야 합니다. 어린아이는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실뭉치, 머리 없는 군인 인형, 병뚜껑 등을 단념하면서까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보여 줍니다. 비록 값비싼 것들은 아니지만 어린아이에게는 단념하기 쉽지 않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사랑이 이기고, 기쁜 마음으로 그것들을 아버지께 드립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길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세상 한가운데서 다른 사람들의 성화를 위하여 봉사하고, 날마다 자기 직업을 통해서 자신을 성화하도록 부르십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상식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위대한 믿음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모세의 율법에, ‘타작 일을 하는 소에게 부리망을 씌워서는 안 된다.’(신명 25,4)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소에게 마음을 쓰시는 것입니까? 어쨌든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물론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기록된 것입니다. 밭을 가는 이는 마땅히 희망을 가지고 밭을 갈고, 타작하는 이는 제 몫을 받으리라는 희망으로 그 일을 합니다”(1코린 9,9-10).

그리스도인 생활을 한낱 숨 막히는 율법 준수쯤으로 낮추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억압적 율법들은 사람들에게 분노와 긴장을 자아냅니다. 오히려, 장갑이 손에 맞듯이 개개인의 환경에 맞는 그리스도인 생활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크건 작건 날마다 자신의 일을 하면서도, 초자연적 전망을 잃지 않으며, 끊임없이 기도하고 희생하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피조물들을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나귀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쉬지도 못하게 한다면, 또는 너무 많이 때려서 정신을 못 차리게 한다면, 나귀가 어떻게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몸도 어린 나귀와 비슷합니다. 예루살렘에서 하느님께 선택을 받은 옥좌가 나귀였습니다. 나귀가 우리를 태우고 이 지상의 거룩한 길을 걸어가지만, 그 고삐를 잘 조절해야만 우리가 기대했던 대로 활기차고 쾌활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참회의 정신

이제 진지하게 결심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굳은 결심을 할 수 있도록, 또한 여러분의 모든 극기 고행이 순수한 지향 안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이행될 수 있도록 주님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여러분이 감실 옆의 깜빡거리는 램프처럼 은은하고 조용하게 주님께 봉사할 수 있도록 간청하십시오. 여러분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거룩한 손님께 확고한 답변을 드릴 수가 없다면, 저의 말을 잘 경청해 보십시오.

참회는, 비록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저항하고 헛된 망상 때문에 빠져나가려 하더라도, 여러분 스스로 정한 시간표대로 정확하게 이행하여야 합니다. 제 시간에 시작하고, 분명한 이유가 없이는 어렵고 힘든 일이더라도 나중으로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참회란 하느님과 이웃, 그리고 여러분 자신에 대한 의무를 받아들여, 해야 할 일 하나하나에 필요한 시간을 스스로 찾아내는 것입니다. 참회자는 지쳐서 기운이 없거나 마음이 냉랭해지더라도 기꺼이 기도 시간을 지켜야 합니다.

참회란 여러분 자신의 가족부터 시작해서 여러분 주변 사람들에게 언제나 사랑을 넉넉하게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통받는 사람, 병약한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해야 합니다. 비록 짜증나고 성가시게 하는 사람들에게도 인내롭게 응대해야 합니다. 또한 필요한 상황이 된다면, 특히 정의롭고 공정한 이유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필요하다면, 우리의 계획과 일을 중단하거나 변경해야 합니다.

참회란 성가신 일이 날마다 수도 없이 생기더라도 명랑함을 잃지 않는 것이며, 비록 일을 시작할 때 지녔던 열정을 순간적으로 잃었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고, 대접받은 음식이 무엇이더라도 신경 쓰지 않고 기쁘게 먹는 것입니다.

부모들에게, 그리고 대개 감독하거나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참회란, 필요할 때마다 바로잡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상황도 고려하고 잘못의 유형도 참작하여야 하며, 겁을 먹거나 감정적으로 되어 객관성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참회의 정신은, 우리가 그린 장밋빛 청사진, 절묘한 솜씨로 대성공을 거두는 미래 모습에 너무 집착하지 않도록 합니다. 우리의 3류 솜씨를 접어두고 모양과 색상을 주님의 선택에 맡긴다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생각나는 대로 이미 여러 이야기를 하였지만) 여러분이 날마다 하느님과 이웃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들을 더 자세하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제가 위대한 참회를 폄하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 길로 이끌어 주신다면, 오히려 그러한 참회는 매우 훌륭하고 거룩하며 필요하기까지 할 것입니다. 다만 언제나 여러분의 영적 지도자에게 허락을 받는 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교만의 결과인 타락의 심각성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참회를 하는 것이 적절하겠습니다. 다른 한편, 여러분이 계속해서 자그마한 것일지라도 내적 싸움에서 승리하여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를 열망한다면, 자신이 위대한 영웅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이나 교만이 스며들 여지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예컨대 웃고 싶지 않을 때에도 웃는 것입니다. 장담하건대, 웃음은 때때로 고행용 의복을 한 시간 동안 입고 있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우리는 사소한 것도 드릴 것이라고는 거의 없지만, 무엇이든 기쁘게 받아주시는 아버지를 둔 어린아이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극기 고행을 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다만 거기에는 사랑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7-10).

아마도 지금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발자국을 더 가까이 따라가라는 재촉을 강하게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주님의 희생에 우리의 작은 희생을 보탤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비롯한 모든 인류의 죗값을 치르시고자, 그리고 주님 섬기기를 거부하고 반대하는 사탄의 계속되는 악행 때문에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우리가 이런저런 사소한 문제에 계속 집착하거나 주님의 사랑을 찬미하며 작은 희생도 봉헌하지 않으면서, “주님, 사랑 넘치는 주님의 성심에 상처를 입히는 죄악들 때문에 제 마음이 아픕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위선적입니까? 참회와 진정한 보속은 자선의 길, 자신을 내어 주는 길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도와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보속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부터, 서둘러 사랑에 빠지십시오. 사랑은 불평과 반항을 하지 않습니다. 종종 우리가 참고 견디는 역경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분의 손을 묶고 우리의 미래를 준비시키시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기쁘게 주는 이는, 마치 자신이 하느님께 호의를 베푸는 양 야단법석을 떨지도 않고 귀찮아하지도 않으면서, 기꺼이 사랑의 마음으로 주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고, 양심에 걸리는 이런저런 잘못들에 대하여 용서를 청하십시오. 말로 지은 죄들, 머릿속을 계속해서 맴도는 덧없는 생각들, 지금은 걱정과 불안과 조바심만을 남긴 중대한 결정들에 대하여 주님께 자비를 청하십시오. 여러분이 행복해질 수 있음을 믿으십시오! 주님께서는 몸소 걸으셨던 행복의 길을 우리도 똑같이 걸어오면서 참으로 기쁘고 즐겁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다만, 자기 고집대로 그 길에서 벗어나 이기심과 육체적 욕망들을 추구하고, 더욱이 위선자의 길을 걸을 때에는 비참한 종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진실함과 충실함과 성실함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영을 반영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기 신념대로 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 받은 선물을 활용하여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루카 19,13 참조). 그 선물이란 자유와 해방을 주는 진리입니다(요한 8,32 참조). 그러나 여러분은 저에게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그렇게 성실하게 살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에 필요한 모든 수단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기도하는 방법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을 보여 주셨으며, 또한 우리 영혼 안에서 활동하시는 위대한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성사라고 부르는 ‘은총의 가시적 표지들’을 남기셨습니다. 그것들을 이용하십시오. 더욱 경건하게 사십시오. 날마다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달콤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지는 것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착한 제자로서 주님을 따름으로써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의 씨앗을 뿌리면서 세상 순례를 할 수 있도록 초대하신 분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우리는 삶도 죽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어떠한 고통과 슬픔에도 움츠러들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에게 고통과 슬픔은 정화의 수단이며, 어떠한 생활환경에서도 이웃에 대한 참된 사랑을 보여 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많은 결심은 아니더라도 몇 가지 확실하고 구체적인 결심을 하도록 이끌고 싶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행복을 바라신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다면, 비록 십자가 없는 순간이 잠시도 없을지라도, 여러분은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더 이상 사형 틀이 아닙니다. 그곳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옥좌입니다. 그리고 그 곁에 주님의 어머니요 또한 우리 어머니께서 계십니다. 복되신 동정녀께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힘을 얻어 주시어, 당신 아드님의 발자국을 확고하게 따라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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