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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나는 대로 이미 여러 이야기를 하였지만) 여러분이 날마다 하느님과 이웃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들을 더 자세하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제가 위대한 참회를 폄하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 길로 이끌어 주신다면, 오히려 그러한 참회는 매우 훌륭하고 거룩하며 필요하기까지 할 것입니다. 다만 언제나 여러분의 영적 지도자에게 허락을 받는 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교만의 결과인 타락의 심각성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참회를 하는 것이 적절하겠습니다. 다른 한편, 여러분이 계속해서 자그마한 것일지라도 내적 싸움에서 승리하여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를 열망한다면, 자신이 위대한 영웅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이나 교만이 스며들 여지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예컨대 웃고 싶지 않을 때에도 웃는 것입니다. 장담하건대, 웃음은 때때로 고행용 의복을 한 시간 동안 입고 있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우리는 사소한 것도 드릴 것이라고는 거의 없지만, 무엇이든 기쁘게 받아주시는 아버지를 둔 어린아이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극기 고행을 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다만 거기에는 사랑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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