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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하느님의 친구들»에 회개 → 다시 시작하기 항이 있음.

성주간 화요일 미사 전례문에서는 ‘참된 하느님다움’과 ‘거짓 하느님다움’을 구별하도록 도와줍니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겸손’은 우리의 비참함과 위대함을 동시에 깨닫게 이끌어 주는 덕목입니다.

우리의 비참함은 참으로 명백합니다. 저는 지금 우리의 자연적 한계, 곧 사람들이 꿈꾸었으나 시간 부족으로 결코 이룰 수 없었던 위대한 야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피할 수 있었으나 피하지 않았던 잘못과 타락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개인적 결함들을 경험합니다. 더욱이 마치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분명히 깨닫게 하려고 모든 실패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처럼 보이는 때도 있습니다.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주님께 바라라”(시편 27,14: 성주간 화요일 미사 입당송). 교회는 우리에게 믿음과 사랑 가득한 희망으로 살아가라고 가르칩니다. “네 마음 굳세고 꿋꿋해져라”(상동). 우리가 하느님께 모든 희망을 두고 있다면, 진흙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어찌 중요하겠습니까? 어느 순간 (그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곤경에 떨어질지라도, 마치 정상적인 치료 절차에 따르듯이 곤경에서 빠져나오면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새롭게 시작하면 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길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세상 한가운데서 다른 사람들의 성화를 위하여 봉사하고, 날마다 자기 직업을 통해서 자신을 성화하도록 부르십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상식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위대한 믿음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모세의 율법에, ‘타작 일을 하는 소에게 부리망을 씌워서는 안 된다.’(신명 25,4)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소에게 마음을 쓰시는 것입니까? 어쨌든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물론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기록된 것입니다. 밭을 가는 이는 마땅히 희망을 가지고 밭을 갈고, 타작하는 이는 제 몫을 받으리라는 희망으로 그 일을 합니다”(1코린 9,9-10).

그리스도인 생활을 한낱 숨 막히는 율법 준수쯤으로 낮추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억압적 율법들은 사람들에게 분노와 긴장을 자아냅니다. 오히려, 장갑이 손에 맞듯이 개개인의 환경에 맞는 그리스도인 생활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크건 작건 날마다 자신의 일을 하면서도, 초자연적 전망을 잃지 않으며, 끊임없이 기도하고 희생하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피조물들을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나귀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쉬지도 못하게 한다면, 또는 너무 많이 때려서 정신을 못 차리게 한다면, 나귀가 어떻게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몸도 어린 나귀와 비슷합니다. 예루살렘에서 하느님께 선택을 받은 옥좌가 나귀였습니다. 나귀가 우리를 태우고 이 지상의 거룩한 길을 걸어가지만, 그 고삐를 잘 조절해야만 우리가 기대했던 대로 활기차고 쾌활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참회의 정신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어울리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하느님이시요 인간이신 주님께서 활동하시는 장면들을 음미하십시오. 인간으로서 또 하느님으로서 우리를 어루만지시며 용서를 베푸시고 당신 자녀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놀라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오늘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복음은 언제나 참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느낄 수 있고 눈치를 챌 수 있으며, 심지어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것을 우리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되는 실패에도 또다시 일어나 전진하는 한 하느님의 보호는 더욱 강력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내적 생활의 본모습입니다.

우리가 내면의 그리고 외적인 장애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받을 상이 없을 것입니다. “경기를 하는 사람도 규칙대로 경기를 하지 않으면 승리의 화관을 얻지 못합니다”(2티모 2,5). 그리고 “싸울 상대가 없으면 진정한 싸움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이 없으면 상도 없을 것입니다. 패배하는 자가 없으면 승리하는 자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겪는다고 해서 낙심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 어려움을 통해서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 투쟁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사도직 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도록 도와줍니다. 예수님께서 올리브 동산에서 그리고 나중에 십자가 위에서 조롱받으시고 버림받으시는 그 극심한 수난의 순간들을 묵상하면서, 이런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분의 마음에 드는 제자가 되려면 그분의 충고를 마음 깊이 새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그래서 저는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주님, 저에게 십자가가 없는 날이 하루도 없게 해 주소서!” 그러면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의 내면은 더욱 강해지고 우리의 죄악을 넘어 하느님의 편이 될 것입니다.

예컨대, 못을 하나 잡으십시오. 여러분이 망치로 벽에 못을 박는데 아무런 저항이 없으면, 거기에 무엇을 걸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우리가 희생을 통해서 단련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주님의 도구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 만일 우리가 온갖 어려움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그것을 활용한다면, 어렵고 불쾌한 일들이 엄습하여 고통스럽고 불안할 때에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처럼 큰소리로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할 수 있습니다”(마르 10,39).

영적 투쟁을 하는 하느님의 자녀는 기쁨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표정, 포기와 체념의 슬프고 침울한 얼굴을 하고 다녀서는 안 됩니다. 그와는 반대로, 일할 때나 쉴 때나 기쁠 때나 힘들 때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늘 생각하며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어려움과도 기꺼이 맞붙을 수 있어야, 참으로 사랑에 빠진 사람의 투쟁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언제나 승리하시는 하느님과 결합되어 우리도 승리자가 됩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충실하게 따르려고 노력하였을 때에 저에게는 아쉬운 것이 없었습니다.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시편 23,2-4).

가끔은 인내와 끈기로 적절한 때를 기다리는 것도 영적 투쟁에서 이길 수 있는 최선의 전략입니다. 더욱더 희망을 지니십시오. 피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여러분의 내적 생활에는 패배의 아픔도 있을 것이며,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을 것입니다. 아무도 그러한 불행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것들을 이겨 낼 수 있는 확실한 수단을 주셨습니다. 이미 이야기하였듯이, 우리는 모두 그 수단을 이용해야 하며, 필요할 때마다 언제나 또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매주,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주저하지 않고 거룩한 용서의 성사, 참회의 성사를 받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은총의 옷을 차려 입고 산과 산 사이를 가로지를 수 있으며(시편 104,10 참조), 그리스도인이 수행해야 하는 임무의 언덕을 도중에 멈추지 않고 오를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확고한 목표를 세우고 고해성사를 받으면서 우리 주님께 더욱 큰 희망을 갖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면,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아는 사람들이 누리는 기쁨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로마 8,31) 낙관적인 사람들이 됩시다. 희망의 힘으로 무장한 우리는 증오가 뿌려 놓은 더러운 오물들을 깨끗하게 씻어 낼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기쁨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아름다움과 공정함을 펼쳐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하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도 같은 아름다움을 주님께 되돌려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