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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하느님의 친구들»에 복음 → 가르침, 비유와 우화 항이 있음.

우리가 주님의 말씀, 곧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9) 하신 말씀을 묵상할 때에, 우리는 우리 삶의 유일한 목적, 곧 ‘성화’를 분명하게 깨닫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거룩해지게 하려고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미묘한 유혹처럼 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이 신성한 초대를 참으로 마음에 받아들인 사람은 아주 소수일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보다시피, 우리는 도구로 쓰이기에 거의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인류의 다른 사람들과 견주어 소수입니다. 우리 자신도 보잘것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확고한 말씀, 권위에 찬 말씀이 메아리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요 누룩입니다. 그리고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합니다”(갈라 5,9). 우리가 각각의 모든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언제나 가르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백이면 백 모든 사람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구속하셨고, 당신의 구원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시고자 적은 수의 보잘것없는 우리를 활용하고자 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어느 누구도 나쁘게 대우하지 않습니다. 잘못은 잘못이라고 해야 하지만, 그 잘못을 고쳐 줄 때에는 친절하게 고쳐 주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 사람을 도울 수도, 거룩하게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사는 법을, 서로 이해하는 법을, 관대하게 넘어가 주는 법을, 형제자매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요한 성인께서 말씀하셨듯이,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놓으십시오. 그러면 사랑을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의 일터, 가정, 사회생활에서 조성되는 매우 우울한 상황에서조차 이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저는 극히 하찮은 기회조차도 놓치지 않고 활용하여 우리 자신을 성화하고, 공동 구속 활동을 달콤하고 고무적인 과제로 인식하며 우리와 함께 날마다 같은 고민을 나누는 사람들을 성화해야 합니다.

이제 다시 복음 말씀으로 돌아가, 우리의 모범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바라봅시다.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어머니를 통하여 예수님께 그분의 오른편과 왼편 자리를 요청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들에게 화가 났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3-45).

또한 제자들이 카파르나움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보다 먼저 와 계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2-36).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사랑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주님은 가르침을 주시고, 그 가르침을 이해시켜 주시며, 살아있는 본보기를 보여 주십니다. 그분은 집에서 놀고 있는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불러, 사랑스럽게 껴안으십니다. 우리 주님의 침묵이 얼마나 웅변적입니까! 이로써 주님은 모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어린이 같은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단순한 영혼, 겸손한 영혼이 받을 상이 무엇인지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영혼은 주님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껴안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한 것을 마음에 새기고 철저하게 믿으십시오. 우리 주님을 더욱 가까이 따르고 하느님과 온 인류에게 진정한 봉사를 하고 싶다면, 우리 자신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재능, 건강, 명성, 야망, 승리, 그리고 성공을 향한 자기 욕심마저도 떨쳐 버려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을 찬미하고 모든 영광을 그분께 돌리겠다는 숭고한 지향을 간직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떨쳐 버리려면 한 가지 규칙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따르면 됩니다. “주님, 무슨 일이든 오직 당신께서 원하시는 경우에만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저는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양심을 꼬드기는 이기심과 허영심에 치명타를 날릴 수 있습니다. 동시에, 하느님을 더욱더 열렬히 가깝게 모시도록 이끄는 사심 없는 행동을 통해서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한다면, 우리 마음이 온갖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4-26) 그레고리오 성인도 다음과 같은 설명을 남겼습니다. “자기 자신마저 버리지 않는다면, 사물들을 끊고 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 자신 밖으로 나와서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자기 자신을 떠난다면, 자신을 버리는 사람은 누구란 말입니까? … 여러분은 우리 자신의 두 가지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죄에 떨어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빚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조되었을 때의 모습은 한 가지였는데, 우리 자신 때문에 또 다른 모습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죄에 떨어진 자신은 끊어 버리고, 은총으로 빚어진 자신은 굳건히 지키십시오. 그러므로 교만한 사람이 그리스도께로 회심하여 겸손해지면, 이미 자신을 버린 것입니다. 욕정에 가득 찬 사람이 변하여 절제하는 생활을 하게 되면, 그 사람도 마찬가지로 예전의 자신을 버린 것입니다. 수전노가 탐욕을 버리고, 남의 재산을 갈취하는 대신 자기 재산을 아낌없이 베푼다면, 그는 틀림없이 자신을 부인한 것입니다.”

아버지께 받으신 사명을 다하시려고 우리 주님께서 걸으신 길은 날마다 자신이 가르치신 대로, 특히 그분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도발적이고 거룩한 말씀대로 사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은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은 옷보다 소중하다. 까마귀들을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골방도 곳간도 없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가 새들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 그리고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오늘 들에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루카 12,22-24.27-28)

우리가 하느님의 거룩한 섭리에 더욱더 자신을 맡기고 하느님의 변함없는 보호를 굳게 믿기만 한다면, 수많은 근심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은 전형적인 이교인들, “이 세상 다른 민족들”(루카 12,30)의 모습입니다. 삶에 대한 초자연적 시야가 닫혀 있는 그들과 달리, 믿음이 굳건한 그리스도인에게 온갖 근심 걱정은 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벗이요 사제요 아버지로서 상기시켜 주고 싶은 것은, 우리 삶의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 덕분에 하늘에 계신 전능하신 아버지,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계시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것들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루카 12,30). 그러므로 이 지상 여정에서 무척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철저히 떨쳐 버리고, 낙관적인 마음으로 살아갈 이유가 충분하다는 점을 여러분에게 각인시켜 주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섭리하십니다. 저를 믿으십시오.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헛되이 내일 일을 걱정하며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수많은 사람이 가엾게도 그 같은 노예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 대신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대로 세상 것들을 다스리는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창세 1,26-31 참조).

언제나 여러분 자신의 주인이 되기를 바란다면 모든 것을 내려놓는 노력이 참으로 필요하며, 더욱이 아무런 두려움과 망설임도 없이 내려놓아야 합니다. 개인적 임무이건 가정과 관련된 임무이건 그 어떠한 임무를 수행할 때에도, 하느님과 그분의 교회와 여러분의 가정과 직업 그리고 온 인류에게 봉사한다는 관점에서 정직하게 인간적 수단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참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충분하고 무엇이 부족한가가 아니라, 여러분이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배운 대로 재화들은 단지 수단일 뿐이라는 그리스도교 진리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들에 결정적 의미를 부여하지 마십시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19-21).

이 세상 재물 위에 행복을 쌓으려고 하는 사람이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는 사례들을 여럿 보았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고 그릇된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그의 마음은 불만과 슬픔으로 가득 찼고, 끝없는 불행의 길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조차 자신의 헤아릴 수 없는 노고로 얻은 재물의 노예요 피해자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는 결코 음란하거나 무질서하거나 공허한 사랑에 짓눌린 마음 안에는 거처를 마련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랑에 마음의 닻을 내립시다. … 하늘의 보물을 열망합시다.”

물론 여러분의 권리를 포기하라고 권유하는 것도 아니고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수행 중인 우리에게 그것은 하느님께서 초대하신 성덕을 향한 전투에서 도망치는 것만큼이나 비겁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품위에 맞게 사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특히 여러분의 일에서) 힘껏 노력해야 합니다. 때로는 빈곤 때문에 힘들어도, 낙담하지도 말고 항거하지도 마십시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을 이겨 내고자 할 수 있는 모든 올바른 수단을 사용하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하느님의 섭리를 시험하는 셈이 됩니다. 여러분은 싸우는 동안에도, 모든 것이 함께 선을 이룬다는 것을, 심지어 결핍과 빈곤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로마 8,28)을 기억하십시오. 지금부터는 온갖 사소한 어려움과 불편함 정도는 웃으면서 맞이하는 습관을 기르십시오. 이제 추위와 더위, 여러분이 느끼기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의 결핍, 쉬고 싶을 때 쉬지 못하는 것, 배고픔, 외로움, 배은망덕, 인정받지 못함, 모욕 따위는 쾌활하게 대처하십시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참으로 명확하고 선명합니다! 이번에는 신약 성경의 마태오 복음 11장으로 가보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여러분은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유일한 모범이신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이 발을 헛딛지 않고 방황하지 않으려면, 주님께서 걸으신 길을 그분 발자국을 따라 그대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분의 겸손하고 온유하신 마음으로 들어가 그분의 계명과 사랑의 샘에서 생명의 물을 마셔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여러분 자신을 그리스도와 일치시키고, 여러분 동료 사이에서 실제로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제 이야기에 틀림이 없음을 확실히 하고자, 다른 말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마태오 복음 16장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더욱 분명히 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하느님의 길은 극기와 고행과 자아 포기의 길이지만, 슬프거나 두려운 길은 아닙니다.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골고타의 가시관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본보기를 깊이 성찰해 봅시다. 그분의 자기 부정, 그리고 그분이 겪으신 모든 일, 곧 굶주림, 목마름, 피로, 압박감, 피곤함, 학대, 오해, 눈물에 관하여 생각해 봅시다(마태 4,1-11; 8,20; 8,24; 12,1; 21,18-19; 루카 2,6-7; 4,16-30; 11,53-54; 요한 4,6; 11,33-35 등 참조). 그러나 동시에 온 인류를 구원하신 그분의 기쁨도 생각해 봅시다. 이제 저는 여러분이 주님의 길을 자주 묵상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바오로 사도께서 에페소 신자들에게 주님의 발자국을 뒤따르라고 초대하는 말씀을 여러분의 정신과 마음에도 깊이 새겨 주고 싶습니다.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 5,1-2).

다시 주님께 눈을 돌려봅시다. 토마스 사도에게 하신 예수님의 부드러운 질책이 여러분에게도 들릴 것입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이제 우리도 토마스 사도와 더불어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뉘우침 속에서 외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저는 절대적으로 당신을 주님으로 인정합니다. 지금부터, 저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언제나 주님의 가르침을 참으로 소중히 여길 것이며, 충실히 따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복음서의 한 장면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는데, 아마도 제자들이 근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대담하게 질문하였습니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 ’”(루카 11,2).

이 대답에서 놀라운 점은 어떤 것입니까? 제자들은 날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고, 우리 주님께서는 평범한 대화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자비의 위대한 비밀, 곧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계시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답게 아버지를 신뢰하며 그분과 대화하고 시간을 함께 보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에, 안타깝게도 영혼 없는 찬양, 온갖 이론과 형식을 앞세우는 추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찬양은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과 일대일로 나누는 인격적 대화가 아니라 허공을 향한 막연한 외침일 뿐입니다. 그럴 때면 우리 주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7-8).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교부는 이 성경 구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제가 이 구절에서 이해하는 바로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긴 시간 동안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말을 끝없이 늘어놓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우리 주님 자신이 과부의 본보기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 과부는 간절한 애원으로 불의한 재판관의 고집을 꺾었습니다. 또 다른 본보기는 한밤중에 먹을 것을 구하러 벗을 찾아간 사람입니다. 그는 우정 때문이 아니라 끈질긴 간청 덕분에 벗을 잠자리에서 일어나게 하였던 것입니다(루카 11,5-8; 18,1-8 참조). 이 두 가지 본보기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끝없이 말을 늘어놓는 기도가 아니라, 필요한 것을 단순하게 끊임없이 간청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쨌든, 여러분이 묵상을 해보려고 해도 집중을 하지 못해서 하느님과 대화를 할 수 없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또는 마치 사막에 있는 듯 마음이 메마르고, 어떠한 생각도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사랑하는 마음이 무뎌졌다면, 제 충고를 들어보십시오. 제가 그러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늘 하였던 일입니다. 먼저 하느님 아버지 앞에 머무십시오. 그다음에는 이렇게 말하십시오. ‘주님, 저는 기도할 줄 모릅니다. 주님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 순간, 여러분은 분명히 기도를 시작한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어울리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하느님이시요 인간이신 주님께서 활동하시는 장면들을 음미하십시오. 인간으로서 또 하느님으로서 우리를 어루만지시며 용서를 베푸시고 당신 자녀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놀라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오늘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복음은 언제나 참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느낄 수 있고 눈치를 챌 수 있으며, 심지어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것을 우리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되는 실패에도 또다시 일어나 전진하는 한 하느님의 보호는 더욱 강력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내적 생활의 본모습입니다.

우리가 내면의 그리고 외적인 장애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받을 상이 없을 것입니다. “경기를 하는 사람도 규칙대로 경기를 하지 않으면 승리의 화관을 얻지 못합니다”(2티모 2,5). 그리고 “싸울 상대가 없으면 진정한 싸움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이 없으면 상도 없을 것입니다. 패배하는 자가 없으면 승리하는 자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겪는다고 해서 낙심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 어려움을 통해서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 투쟁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사도직 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도록 도와줍니다. 예수님께서 올리브 동산에서 그리고 나중에 십자가 위에서 조롱받으시고 버림받으시는 그 극심한 수난의 순간들을 묵상하면서, 이런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분의 마음에 드는 제자가 되려면 그분의 충고를 마음 깊이 새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그래서 저는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주님, 저에게 십자가가 없는 날이 하루도 없게 해 주소서!” 그러면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의 내면은 더욱 강해지고 우리의 죄악을 넘어 하느님의 편이 될 것입니다.

예컨대, 못을 하나 잡으십시오. 여러분이 망치로 벽에 못을 박는데 아무런 저항이 없으면, 거기에 무엇을 걸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우리가 희생을 통해서 단련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주님의 도구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 만일 우리가 온갖 어려움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그것을 활용한다면, 어렵고 불쾌한 일들이 엄습하여 고통스럽고 불안할 때에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처럼 큰소리로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할 수 있습니다”(마르 10,39).

군중 속에서 어떤 사람이 우리 주님께 질문을 드립니다. 그 사람은 모세에게 계시된 가르침을 알고 있었으나 본질적 이해에 도달하지 못하였으므로, 자신의 무익한 결의론 때문에 혼란에 빠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입술을 여시어 그 율법 교사에게 차분하고 확실하게 대답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주님과 제자들이 함께 다락방에 모여 있는 장면을 생각해 봅시다. 주님께서는 파스카 축제를 바로 앞두고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성심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불타올라 그들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만일 여러분이 복음서의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 주님께 가까이 가고 싶다면, 제가 늘 권장하듯이 여러분 자신이 그 장면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인물처럼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많은 보통 사람들을 제가 압니다.) 여러분은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일 수도 있고, 마르타처럼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진지하게 마음을 열고 자신의 걱정을 예수님께 담대히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루카 10,39-40 참조).

거듭 이야기하건대, 성령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선행을 배워라”(이사 1,17). 저는 이 말씀을 우리의 내적 투쟁의 여러 가지 측면에 적용시켜 보고자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완결되고 완성된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덕목은 날마다 치열한 노력의 결과로서 발전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라도 일을 하나 떠올려보십시오. 그 일을 배우려고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먼저 우리가 성취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얻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찾아냅니다. 그다음에는 확고한 습관이 생길 때까지 끈기 있게 반복해서 여러 수단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한 가지를 배우자마자, 거기에서 모르는 다른 것들을 발견하고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갈 자극을 받습니다.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한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키워 나가는 애덕에는 한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도무지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일에 대하여 우리는 결코 충분히 감사드릴 수 없습니다. 당신의 피조물인 우리를 향한 하느님 자신의 사랑은 그러한 것입니다. 그 사랑은 헤아릴 수 없고 한량없이 흘러넘칩니다.

산상 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린 마음으로 기꺼이 경청하는 모든 사람에게 거룩한 사랑의 계명을 가르치십니다. 주님께서는 설교를 마무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5-36).

자비는 단순히 동정하는 것 그 이상입니다. 자비는 사랑이 넘쳐흐르는 것이며, 또한 정의가 넘쳐흐르는 것입니다. 자비는, 강력하고 자기희생적이며 너그러운 사랑을 품고 인간적이면서 신적인 두근거림으로 온전히 살아 있는 마음을 한결같이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 바오로 사도는 사랑의 송가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4-7).

저의 기도 방법 하나는, 아마 여러분에게도 유익할 것입니다만, 가끔 지극히 영적인 내용들조차도 물질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사용하시던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주변 삶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미지들을 활용하시고 비유를 통해 가르치시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예컨대, 목자와 양 떼, 포도나무와 가지, 배와 그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등입니다.

하느님 말씀의 씨가 우리 마음에 뿌려졌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위하여 어떤 땅을 준비하였습니까? 돌밭입니까? 가시덤불입니까? 하잘것없는 인간적 근심들이 말씀의 씨의 숨을 막아 버리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 햇빛과 비가 알맞으며 비옥하고 좋은 땅을 준비하게 하소서. 여러분의 씨가 좋은 땅에 뿌리를 내려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하십시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 15,5). 9월이 오면 포도나무는 수확을 앞둔 포도들의 무게 때문에 구부러지고, 유연하게 얽히며, 길고 호리호리한 가지들로 풍성해집니다. 나무줄기를 통해서 오는 수액을 공급받기 때문에 그 가지들에는 열매들이 가득한 것입니다. 그러지 않았면, 몇 개월 전에 우리가 알던 그 조그만 싹에서는 우리 눈을 즐겁게 해 주고 마음에 생기를 돋우는 달콤한 열매를 맺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시편 104,15 참조). 우리는 여기저기에서 반쯤 땅에 묻힌, 메마른 가지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지들도 한때는 나무에 붙어 있었으나, 지금은 시들고 죽어 ‘열매 맺지 못함’의 완벽한 표상을 보여 줍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여기 보물이 묻혀 있습니다. 그 보물을 발견한 행운아의 무한한 기쁨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고생도 고통도 끝났습니다. 그는 가진 것을 모두 팔아 보물이 묻힌 밭을 삽니다. 그의 보물이 있는 곳에 그의 마음도 있습니다(마태 6,21 참조). 우리의 보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따르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던져 버리는 일을 망설여서는 안 됩니다. 쓸모없는 짐을 일단 버리게 되면, 우리의 배는 하느님 사랑의 안전한 항구로 직행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