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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하느님의 친구들»에 믿음(신덕) → 살아있는 희망과 활동적인 희망 항이 있음.

이 눈먼 사람이 보여 준 확고한 믿음의 모범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살아 있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볼 수 없을 때, 영혼이 근심에 휩싸이고 모든 빛이 사라졌을 때, 하느님께서 명령하실 때, 이 눈먼 사람처럼 행동합니까? 실로암 못의 물에 어떤 힘이 있어서 그 눈먼 사람이 눈을 씻었을 때 치료가 되었을까요? 물론 신비스러운 안약이나, 연구소에서 만든 값비싼 약들이 효과가 더 좋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믿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명령대로 행동하였고, 앞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성경 구절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복음서 저자가 그 못의 이름인 ‘파견된 이’의 의미를 설명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파견된 이’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파견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누구도 죄에서 해방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를 고쳐 주시려고 파견되신 거룩한 의사,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에 대한 완전한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의 질병이 더욱 심각하고 희망이 없을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욱 굳건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 주님께 한마음으로 기도합시다.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의 뜻 따르도록 저를 가르치소서”(시편 143,10). 요컨대, 우리 입술은 창조주의 이끄심에 효과적으로 응답하고자 하는 열망을 진심으로 표현해야 하며,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그분의 계획을 따르고자 힘써야 하고, 그분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사랑한다면, 다음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곧 믿음의 가치는 단지 그것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지키겠다고 결심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예리코를 떠나는 길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이야기하십니다. 당신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마르 10,52). 이제 당신은 우리 주님께서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였고, 그분을 따라 길을 나서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당신은 주님의 발자국을 따라 걷고 그분의 옷을 입으며 그분 자신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믿음은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빛 안에서, 외적 행동과 희생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당신이 새로운 길을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은 이미 제가 이야기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발걸음과 보조를 맞추어 너그럽게 일해야 하며, 동시에 길을 가로막는 것을 모두 뿌리 뽑고 제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로 가십니다. 그분께서 여러분에게, 나에게 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영혼 때문에 목마르시고 시장하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목마르다”(요한 19,2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들에게 목말라하시고,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영혼에 목말라하십니다. 또한 하늘의 영원한 영광으로 이끌어 주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 우리가 인도해야 하는 모든 영혼에 목말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로 가셨는데, “잎사귀밖에는 달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마태 21,19). 얼마나 애석한 일입니까! 똑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벌어지지 않나요? 우리에게 믿음과 겸손의 힘이 부족하다면 슬픈 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주님께 보여 드릴 만한 희생과 선행이 있나요? 우리의 그리스도 신앙이 속 빈 강정에 불과한 것이면,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무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 맺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자 나무가 즉시 말라 버렸다”(마태 21,19). 이 복음 말씀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신앙을 굳건히 하고 그에 걸맞은 생활을 함으로써 언제나 주님께 열매를 맺어 드릴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촉구합니다.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맙시다. 우리 주님께서는 인간적 노력의 결실에 의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운 가장 원대한 계획도 주님 눈에는 한낱 어린이의 놀이에 불과합니다. 그분께서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고 사랑입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인간이 그분께 와서 영원히 당신 나라에서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이 지상에서 우리는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또 잘 해내야 합니다. 우리는 하루하루의 일상적인 일들을 성화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은 주님을 위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하여, 자랑하려고 일을 한다면,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달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 잎사귀들이 아무리 무성하다 한들, 주님께서도 우리 동료들도 그 사이에서 아무런 열매를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수덕 수련? 신비 신학? 사람들이 어떻게 부르건 상관없습니다. 수덕 수련이건 신비 신학이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것은 하느님 자비의 선물입니다. 여러분이 묵상하려고 노력하면, 하느님께서는 도움을 거절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믿음뿐 아니라 믿음의 행동도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알고 있었듯이, 그리고 저도 분명하게 이야기하였듯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날마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한 행동은 이미 관상이며 합일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살아야 하며, 비록 각자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세상 문제들의 한가운데서 각자의 영적 여정(수많은 종류의 여정이 있습니다)을 떠나기에 앞서서 갖추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한 기도와 행위 때문에 우리의 일상 활동이 지장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고상한 인간적 열정 속에서 주님께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온갖 염려와 일들을 하느님께 봉헌할 때, 그것들은 세상을 거룩하게 만듭니다. 만지는 것을 모두 금으로 바꾸었던 미다스 왕의 신화에 관하여 제가 얼마나 자주 이야기하였습니까! 우리는 비록 개인적으로 결함이 있지만, 우리가 만지는 것을 모두 초자연적 공로라는 금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나 일어나 성읍을 돌아다니리라. 거리와 광장마다 돌아다니며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으리라”(아가 3,2). 저는 성읍뿐 아니라, 세상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모든 나라와 민족, 큰 도로와 샛길까지 영혼의 평화를 찾아다닐 것입니다. 저는 일상 업무들을 하는 가운데 아무런 장애도 없이 평화를 발견합니다. 장애가 되기는커녕, 일상 업무들은 제가 더욱더 사랑하고 더욱더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는 길이요 근거가 됩니다.

만일 누가 우리를 불러 세우고, 영혼의 새 어두운 밤과 낙담과 반대와 투쟁과 고난을 일으켜 공격한다면, 시편 작가가 우리의 입술과 마음에 이 말씀을 담아 줄 것입니다. “환난 가운데 내가 그와 함께 있으리라”(시편 91,15). 예수님, 당신의 십자가에 견주면 제 십자가는 그 어떤 가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상처 옆에 나란히 있는 저의 작은 긁힘은 그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무한하고 순수하며 지대한 사랑에 견주면, 당신께서 제 어깨에 얹으신 이 자그마한 슬픔이 그 어떤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 그리고 제 마음은 거룩한 굶주림으로 가득 차 있고, 우리 주님께 말과 행동으로 고백합니다. “저희는 사랑 때문에 앓고 있습니다”(아가 5,8 참조).

우리 안에는 하느님을 향한 갈증이 있습니다. 그분의 눈물을 이해하려는 갈망, 그분의 미소와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갈망이 있습니다. 이를 표현하는 최선의 방법은 다음의 성경 말씀을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시편 42,2). 그 영혼은 나아가 하느님 안에 잠기고, 신성을 부여받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샘물을 마시려고 입을 벌리는 목마른 나그네가 됩니다(집회 26,1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