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 목록

4«하느님의 친구들»에 영웅적 행동 → 거룩함을 위한 투쟁에 항이 있음.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기는 하지만, 결코 잊지 못할 일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발렌시아에 있는 주교좌성당에 기도하러 가서 가경자 요한 리다우라의 무덤 옆을 지날 때였습니다. 제가 듣기로, 이 사제는 이미 여러 해 전에, 얼마나 오래 사셨냐는 질문을 받고 아주 자신 있게 발렌시아 사투리로 “아주 조금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섬기는 데 쓴 시간은 아주 조금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여기 있는 많은 분들에게, 세상 한가운데서 자신의 환경에서, 자신의 직업과 업무에서 주님을 가까이 따르고 섬기기로 결심한 해를 헤아리는 데 한쪽 손의 다섯 손가락도 여전히 충분하지는 않은가요? 얼마나 오래 사는가는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주님의 초대를 영혼에 깊이 새기고 그 확신을 불태우는 것입니다. 주님의 초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거룩함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적 생활을 바르게 연마하여 그리스도인 덕목들을 날마다 실행에 옮기려고 노력할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의무를 간신히 이행하거나, 평균적으로 이행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상대적으로 뛰어난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 그대로 가장 엄격하고 정확한 의미에서, 영웅적 실천을 목표로 싸워야 합니다.

내적 생활, 우리는 이것이 필요합니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건네시는 부르심에 응답하고 싶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듯이 ‘수염의 마지막까지(모든 면에서)’ 참으로 순수한, 시성될 수 있는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 분이시고 유일하신 스승님의 제자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해 세우시고 은총을 베푸시는 것은 일상의 세계에서 성덕을 위하여 투쟁하라는 뜻이며, 또한 사도직을 수행할 의무를 내리시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인간적인 시각에서 보더라도, 하느님께서 우리는 선택하셨다는 사실에서 당연히 다른 영혼들에 대한 관심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 교부들 가운데 한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무언가 여러분에게 유익한 것을 발견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에 관하여 말하고 싶어 합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따라 주님의 길을 가기를 원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집회나 목욕탕에 가다가 시간 여유가 있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에게 함께 가자고 초대합니다. 이 인간적 행위를 영적 영역에도 적용하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을 향하여 갈 때에, 혼자서 가지 마십시오.”

만일 쓸모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면, 또는 상황의 어려움에 관한 변명을 늘어놓는 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면, ―왜냐하면 그리스도교가 시작된 이래로 지금까지 언제나 어려움이 있었으므로―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동료 이웃을 끌어들이는 것의 성공 여부는 대개 우리 자신이 어떤 내적 생활을 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성인이 되어야만,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실제로 성인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충실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의 사도적 노력이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믿기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하느님과 동료 이웃들은 모두 우리에게 변함없는 충실성을 요구합니다. 말 그대로 진정한 충실성, 미봉책이나 타협이 아닌 자세한 부분까지 한결같은 충실성,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기쁘게 실천하는 완전한 충실성을 요구합니다.

물론, 우리의 목표는 달성하기 어렵고 저 높은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거룩하게 태어나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맙시다. 거룩함은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응답이 서로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저술가 가운데 한 분은 하느님과의 일치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자라는 모든 것은 작게 시작합니다. 그것이 점차 크게 자라는 것은 꾸준히 계속해서 영양분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만일 철저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면, 비록 여러분이 종종 자기 자신을 극복하거나 나약한 몸으로 저 높은 곳에 계속 오르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주 세심한 부분까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성덕은 여러분의 노동과 일상 의무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행함으로써 얻을 수 있으며, 이것들은 거의 언제나 사소한 현실들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배를 하느님께서 지휘하시는 데 동의한다면, 만일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주인이 되시는 데 동의한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안전하겠습니까? 그분께서 가 버리신 것처럼 보여도, 그분께서 주무시는 것처럼 보여도, 그분께서 무관심하신 것처럼 보여도, 비록 폭풍이 일고 주위가 온통 칠흑같이 어두워져도 여러분은 안전합니다. 마르코 성인은 그러한 상황에 놓인 사도들과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마르 6,48, 50-51).

친애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수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 저는 여러분에게 많은 영혼들의 슬픔, 고통, 학대, 글자 그대로의 순교, 영웅적 행위들에 관하여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 주님께서 잠들어 계시고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루카 성인은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을 어떻게 돌보시는지 보여 줍니다. “그들이 배를 저어 갈 때에 예수님께서는 잠이 드셨다. 그때에 돌풍이 호수로 내리 몰아치면서 물이 차 들어와 그들이 위태롭게 되었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곧 잠잠해지며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느냐?’ 하셨다”(루카 8,23-25).

만일 우리가 주님께 우리 자신을 드린다면, 그분도 우리에게 자신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조금도 거리낌 없이 그분 손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행동으로 주님께서 배의 주인이심을,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주님 뜻대로 하시기를 바란다는 것을 보여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성모님께 전구를 간청하면서, 이러한 결심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믿음으로 삽시다. 희망으로 견딥시다. 예수님께 아주 가까이 붙어 있읍시다. 참으로, 참으로, 참으로 그분을 사랑합시다. 열심히 살고, 사랑의 모험을 즐깁시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 안에, 하느님과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초라한 배에 오르시어, 주님이요 스승으로서 우리 영혼을 소유하시도록 합시다. 우리를 믿음의 생활로 불러 주신 주님과 언제나 밤낮으로 함께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성실하게 보여 드리도록 합시다. “저를 부르셨기에, 저 여기 있습니다”(1사무 3,9). 우리는 착한 목자이신 그분의 목소리, 그분의 부르심에 이끌려, 오직 그분의 울타리 안에서만 이제와 영원히 참된 행복을 발견하리라 확신하며 그곳으로 들어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