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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하느님의 친구들»에 겸손 → 진실과 성실 항이 있음.

물론, 우리의 목표는 달성하기 어렵고 저 높은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거룩하게 태어나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맙시다. 거룩함은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응답이 서로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저술가 가운데 한 분은 하느님과의 일치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자라는 모든 것은 작게 시작합니다. 그것이 점차 크게 자라는 것은 꾸준히 계속해서 영양분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만일 철저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면, 비록 여러분이 종종 자기 자신을 극복하거나 나약한 몸으로 저 높은 곳에 계속 오르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주 세심한 부분까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성덕은 여러분의 노동과 일상 의무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행함으로써 얻을 수 있으며, 이것들은 거의 언제나 사소한 현실들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에 따르는 의무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의무들은 여러분을 안전하고 확실하게 성덕에 이르게 인도해 줄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앞에 놓인 온갖 어려움들에 관하여 미리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은 여정의 시작부터 그러한 어려움들에 대해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영적 지도자의 도움과 안내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에게 여러분의 모든 거룩한 열망, 여러분의 내적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일상적인 문제들, 실패와 성공에 관하여 털어놓을 수 있습니다.

영적 지도를 받을 때는 솔직해지십시오. 아무것도 숨기지 말고, 여러분들의 영혼을 지도자에게 열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이 곧고 평탄한 길이 가시밭길로 바뀔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사소했던 것들이 끝에 가서는 올가미처럼 목을 조를 것입니다. “길을 잃은 사람이 갑작스러운 악재 때문에 희생자가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거나 장기간 자신의 영혼을 등한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견실했던 그의 덕행들은 서서히 사라져 갔고, 반면에 그의 악덕들은 조금씩 조금씩 자라나서, 결국은 비참한 추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 집은 예기치 못한 어떤 사고로 갑자기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집은 토대부터 잘못이 있었거나, 거주자들이 오랫동안 무관심하여 처음에는 사소했던 결함들이 끝에 가서는 견고한 구조물을 부식시킨 것입니다. 그리하여 폭풍이 몰려오거나 폭우가 내리면, 집은 폭삭 무너질 수밖에 없고, 이로써 오랫동안 무관심했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여러분은 고해성사를 보러 갔던 집시의 이야기를 기억합니까? 이것은 다만 이야기요 농담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백 내용을 결코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저는 집시들에 대해서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가엾은 사람! 그 집시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몹시 죄송해하며 말했습니다. “신부님, 제가 고삐를 하나 훔쳤습니다.” 그 정도라면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고삐에는 노새가 매여 있었습니다. … 그리고 또 고삐 하나에 노새 한 마리, … 또 고삐 하나에 노새 한 마리가 매여 있었습니다.” 이렇게 스물을 헤아렸습니다. 나의 자녀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우리가 항복하여 고삐를 훔치게 되면, 나머지도 따라옵니다. 악한 성향들이 줄줄이 따르고, 비참함과 타락과 수치를 가져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에도 비슷한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약간 매서운 말이었는데, 결국은 서로 차갑게 대하는 관계가 되고, 냉랭한 무관심 속에서 살게 됩니다.

“여우들을 잡아라, 저 작은 여우들을. 우리 포도밭을, 꽃이 한창인 우리 포도밭을 망치는 저것들을”(아가 2,15). 작은 일에도 모두 충실하고 또 충실하십시오. 만일 우리가 이렇게 살려고 노력한다면, 성모 마리아의 두 팔을 향하여 자녀답게 달려가는 것 또한 배울 것입니다. 처음부터 여러분에게 상기시켰던 것처럼, 우리는 모두 아주 어립니다. 우리의 나이는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로 결심한 그때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참하고 나약하지만 하느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위대함과 거룩한 순결 안에서 강한 힘을 찾게 될 것입니다.

다른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실화인데, 아주 오래전의 일이고 그 내용도 여러분의 성찰에 도움이 될 것이므로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여러 교구에서 오신 사제들에게 피정 지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돕고 싶었던 저는 친구처럼 함께 이야기하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자고 초대하였습니다. 우리 사제들도 형제적 도움과 조언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가운데 한 사제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태도가 다소 거칠었지만 정직하고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의 마음 안에 있을 수 있는 어떠한 상처라도 치유해 보고자 정중하면서도 단호하게 그의 내면의 것을 끌어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갑자기 그는 이런 말로 저를 당황하게 하였습니다. “저는 제 당나귀가 몹시도 부럽습니다. 그 녀석은 일곱 본당에서 일해 왔지만, 그 녀석에 대해서는 전혀 나쁘게 말하지 않습니다. 저한테도 그러면 참 좋을 텐데요!”

이제 진지하게 양심 성찰을 해보도록 합시다. 아마도 여러분이나 저는 그 시골 사제가 자신의 당나귀에 대해 보낸 찬사를 받을 자격은 없을 듯합니다. 우리는 아주 열심히 일하였고, 책임 있는 위치에 있었으며, 자신의 분야에서는 사람들이 보기에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앞에서 어떤가요? 후회할 만한 일은 없나요? 참으로 하느님과 사람들을 섬기려고 열심히 노력했나요? 아니면, 여러분 자신의 이기적인 계획과 개인적 영광과 야망을 추구하며 조만간 사라질 세속적 성공을 쫓아다닌 것은 아닌가요?

제가 다소 직설적으로 말하는 이유는, 저 자신도 다시 한 번 성실한 참회를 해보려는 것이고, 또 여러분도 각자 그렇게 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가 몸소 경험한 불성실함, 수많은 잘못, 나약함, 비겁함을 상기하면서, 우리도 베드로 사도처럼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참회의 기도를 바칩시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7). 저는 한 말씀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알고 계십니다. 저는 제 비참한 처지 덕분에 저의 힘이신 주님께 의탁하게 됩니다. ‘당신은 제 피신처’(시편 42,2)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출발합시다.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듯이, 우리가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고 할 때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겸손입니다. 잠언에 이르기를 “겸손한 이에게는 지혜가 따른다.”(잠언 11,2)고 합니다. 겸손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변명하지 않고 정직하게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거의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의 위대함에 자신을 열어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시요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는 이 사실을 얼마나 잘 이해하셨습니까!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탁월한 분이신 마리아께서는 이 땅에 계셨으며, 앞으로도 계실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신”(루카 1,52) 우리 주님의 권능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주님의 섭리가 자신에게서 다시 한 번 실현되었음을 기뻐하며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루카 1,48).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겸손을 보자마자 자신의 가장 순수한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거룩하게 변모하였습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 복되신 동정녀의 겸손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측량할 수도 없는 은총의 결과입니다. 이로써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의 태중에 오시는 거룩하신 성자의 강생에 협력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고, 양심에 걸리는 이런저런 잘못들에 대하여 용서를 청하십시오. 말로 지은 죄들, 머릿속을 계속해서 맴도는 덧없는 생각들, 지금은 걱정과 불안과 조바심만을 남긴 중대한 결정들에 대하여 주님께 자비를 청하십시오. 여러분이 행복해질 수 있음을 믿으십시오! 주님께서는 몸소 걸으셨던 행복의 길을 우리도 똑같이 걸어오면서 참으로 기쁘고 즐겁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다만, 자기 고집대로 그 길에서 벗어나 이기심과 육체적 욕망들을 추구하고, 더욱이 위선자의 길을 걸을 때에는 비참한 종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진실함과 충실함과 성실함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영을 반영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기 신념대로 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 받은 선물을 활용하여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루카 19,13 참조). 그 선물이란 자유와 해방을 주는 진리입니다(요한 8,32 참조). 그러나 여러분은 저에게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그렇게 성실하게 살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에 필요한 모든 수단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기도하는 방법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을 보여 주셨으며, 또한 우리 영혼 안에서 활동하시는 위대한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성사라고 부르는 ‘은총의 가시적 표지들’을 남기셨습니다. 그것들을 이용하십시오. 더욱 경건하게 사십시오. 날마다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달콤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지는 것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착한 제자로서 주님을 따름으로써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의 씨앗을 뿌리면서 세상 순례를 할 수 있도록 초대하신 분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우리는 삶도 죽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어떠한 고통과 슬픔에도 움츠러들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에게 고통과 슬픔은 정화의 수단이며, 어떠한 생활환경에서도 이웃에 대한 참된 사랑을 보여 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많은 결심은 아니더라도 몇 가지 확실하고 구체적인 결심을 하도록 이끌고 싶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행복을 바라신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다면, 비록 십자가 없는 순간이 잠시도 없을지라도, 여러분은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더 이상 사형 틀이 아닙니다. 그곳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옥좌입니다. 그리고 그 곁에 주님의 어머니요 또한 우리 어머니께서 계십니다. 복되신 동정녀께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힘을 얻어 주시어, 당신 아드님의 발자국을 확고하게 따라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스승님께서는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마태 22,16).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십시오. 가르치는 것을 멈추지 마십시오. 이 말씀은 참으로 진실하게 하느님의 길들을 보여 주라는 뜻입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자신의 결점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제 결점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고, 우리 주님께 충실하고자 애쓰면서 이런저런 잘못들을 고치기를 열망하고 이를 위해 투쟁하는 것을 말하기 좋아합니다. 우리의 결점들을 제거하고 극복하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길들을 가르치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약점들이 있지만, 먼저 삶으로 증거를 보여 주고, 그다음에는 가르침으로 증언합니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행적과 가르침”(사도 1,1)을 보여 주신 것과 똑같습니다. 그분은 행동으로 시작하셨고, 나중에 설교를 하셨습니다.

제가 사제로서 여러분을 매우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무한히 선하시고 영원하신 아버지시므로 여러분을 더욱더 사랑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상기시켜 주었고, 제가 여러분을 책망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점도 밝혔습니다. 저는 언제나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그분의 양 떼를 사랑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저를 본받고는 있지만 아직은 미흡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설교를 할 때나 개인적으로 대화할 때에 어떤 결점을 지적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을 더욱 깊이 사랑하도록 도우려는 것이 저의 유일한 목적입니다. 그리고 제가 여러분에게 덕행의 부족을 일깨울 때에, 저 자신도 동일한 의무를 짊어지고 있음을 결코 잊지 않고 있습니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아주 성급하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실수를 하는 사람은 똑같은 잘못을 백 번도 더 저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말하고자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러한 실패를 이용하여 더욱 조심스럽게 미래를 살피고, 선행을 배우며, 더 위대한 성덕을 추구하려는 결심을 새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면서 겪는 실패들과 성공들을 통하여 언제나 사랑을 키우고,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리스도인 시민으로서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다하겠다는 결심을 더욱더 굳건히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의 선익을 위하여 고귀하고 충실하게 노력할 때에 명예와 책임을 소중히 여기며, 우리 주변의 거짓 신도들에게서 나오는 반응들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행동하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로워져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정의로워지려면, 자선을 행하려면, 그리고 하느님과 모든 이웃을 섬기려면 지혜로워져야 합니다. 지혜는 덕들의 어머니요, 온갖 선한 습관의 길잡이입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의 못남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이미 이야기하였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이므로 다시 요약해 보겠습니다. 겸손해지고, 영성 지도를 충실히 받으며, 고해성사에 충실히 임하십시오. 마음을 넓게 열고 여러분의 영혼을 지도해 줄 사람을 찾아가십시오. 마음을 닫아서는 안 됩니다. 벙어리 영이 들어가면, 그 영을 내보내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겸손과 성실함이 서로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 마음에 깊이 새기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덕목은 함께 작용하여 확고한 승리를 얻어 내는 바탕이 됩니다. 만일 벙어리 영이 영혼 속으로 들어오면, 모든 것이 파괴됩니다. 다른 한편, 만일 벙어리 영을 바로 내쫓는다면, 모든 것은 좋아질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해지고 삶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언제나 철두철미 빈틈없이, 그러나 예의를 갖추어 성실하게 살아갑시다.

한 가지를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제 마음과 육신에 대한 걱정보다 교만함이 더 걱정입니다. 겸손해지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완전히 올바르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옳은 판단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활짝 열고 영성 지도를 받으러 가십시오. 마음을 닫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거듭 강조하건대, 벙어리 영이 들어오면, 그를 내보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가엾은 아이를 기억해 봅시다. 제자들은 그 아이를 자유롭게 해 주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기도와 단식으로 그를 해방시켜 줄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주님께서는 세 가지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첫째, 소년이 들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벙어리 영이 아이를 사로잡고 있을 때에는, 영혼이 듣기를 거부합니다. 둘째, 소년이 말할 수 있게 해 주셨고, 셋째, 더러운 영을 쫓아내셨습니다.

먼저 여러분이 숨기고 싶은 것을 말하십시오. 벙어리 마귀를 몰아내십시오! 덫에 걸려 있는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작은 것부터 계속해서 바꾸어 나감으로써, 작은 눈덩이를 크게 키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의 영혼을 활짝 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실하게 임한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 생활 방식을 충실히 따르면서 반드시 행복해지리라고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명료성과 단순성, 이 두 가지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태도입니다. 우리 영혼을 완전히 열어야만, 하느님의 광채와 사랑이 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항상 나쁜 의도 때문에 온전히 솔직하지 못하게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때때로 잘못된 양심 때문에 솔직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양심을 너무 기형으로 만들어서, 자신에게 단순성이 부족하다는 점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여깁니다. 그들은 침묵을 좋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한 훈련을 받아서 하느님에 관하여 제법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무언가가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해서는 안 된다고 그릇된 확신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틀렸습니다. 성실함은 언제나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이유를 늘어놓더라도 핑계일 뿐입니다.

이제 우리의 이야기를 마칠 시간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 대화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정결의 덕을 기쁘고 굳건하게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하였습니다.

정결하신 동정녀 마리아의 전구를 통하여 하느님께 간청합시다. 지극히 아름다우신 성모님께 의지하며, 제가 수년 전부터 강조했던 충고를 마음에 깊이 새기십시오. 날마다 겸손하고 정결하고 성실하고 기쁘고 관대하게 살아가려고 힘껏 노력하지만 불안을 떨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드렸던 충고를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살면서 저지른 모든 죄들이 여러분에게 항의하며 대드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오히려 모든 것을 엄마에게 맡기는 어린이의 믿음으로 거룩하신 어머니를 부르십시오. 성모님께서 여러분의 영혼에 평화를 가져다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