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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하느님의 친구들»에 겸손 → 겸손과 인간의 존엄성 항이 있음.

겸손의 덕이 우리의 기를 꺾는다고 생각하거나 겸손의 덕을 멸시하는 사람은 절대 믿지 마십시오. 우리가 진흙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그리고 깨졌다가 다시 본모습을 회복하게 된 그릇임을 아는 것은 끊임없는 기쁨의 원천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눈에 우리가 작다는 것, 우리가 작은 어린이요 자녀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자신이 가난하고 나약하다는 것을 알고, 또한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도 아는 사람보다 더 기쁜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가 낙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세상의 삶이 우리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여러 장애물들이 우리의 개인적 야망을 가로막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초자연적 삶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로마 8,31) 거듭 강조하듯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불쌍합니다.

끝으로, 성주간 화요일 미사의 두 가지 청원, 우리의 입술과 마음에서 화살처럼 튕겨 나오는 기도를 다음과 같이 바칩시다. “오 전능하신 하느님, 이 거룩한 신비를 끊임없이 경축하는 저희가 하늘의 선물을 받기에 합당한 자 되게 하소서”(영성체 후 기도). “오 주님, 저희가 주님 뜻에 따라 끊임없이 봉사하게 하소서”(보편 지향 기도). 자녀 여러분, 봉사야말로 우리의 역할입니다. “저희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이 시대에 믿는 이들이 공로를 쌓고 믿는 이들의 수가 더욱 많아지게 하여 주소서”(보편 지향 기도).

사랑의 첫 표현들 가운데 하나는, 영혼을 겸손의 길로 이끄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가장 작고 연약한 피조물조차도 우리보다 나을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잘못과 혐오스러운 일들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무수히 범하는 불충실함에서 벗어나려고 치열하게 투쟁하고는 있지만, 우리는 역시 죄인임을 압니다. 그러니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나쁘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또는 어떻게 우리 마음 안에 광신적인 열광, 편협함, 오만함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겸손은 우리의 손을 잡고 최선의 방법으로 이웃을 대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모든 사람에 대하여 이해심을 갖도록 하고,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살게 하며,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결코 분열을 초래하거나 장벽을 만들지 않으며, 언제나 일치를 증진시키는 도구로서 행동하게 합니다. 인류의 평화와 일치, 개인 권리들의 상호 존중을 향한 우리의 심오하고 강력한 열망은 허망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형제애로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 열망은 우리 인간 본성에 가장 깊숙이 새겨진 어떤 것을 반영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우리의 형제애는 상투적인 말이나 허황된 꿈이 아니며, 비록 어렵지만 우리가 참으로 도달해야 하는 목표입니다.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사람들, 사랑에 실망하거나 겁에 질려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떠한 말을 하더라도, 그러한 종류의 애정이 참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창조되었고 하느님을 거슬러 무익하고 거친 저항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참된 애정을 지니기가 무척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한 애정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애정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함께 필연적으로 빚어 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그것을 바란다면, 예수님도 그것을 바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일상생활의 고통, 희생 그리고 이타적 헌신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고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확신하건대,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심 덕목인 이 사랑은 때때로 익살스럽게 풍자되어 온 내용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그토록 끊임없이 선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사랑은 단지 선포해야 하는 주제일 뿐이고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일까요?

우리가 주위를 둘러본다면, 사랑은 단지 환상 속의 덕목일 뿐이라고 생각할 만한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자연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메마름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이란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지속적이고 강렬하며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영혼들 안에서 사랑이라는 첫 열매를 맺으시는 성령의 활동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율법을 완수하게 될 것입니다.”(갈라 6,2)라는 성 바오로 사도의 충고 말씀에 대하여, 교회 교부들 가운데 한 분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써, 선행이 미흡하여 아직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나약함을 쉽게 견딜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사랑 안에서 자라게 하여 준 그 길이 가리키는 방향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저만치 밀쳐놓고 인도적 활동이나 사회사업에 먼저 투신한다면,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 이웃의 환자를 돌보느라 그리스도를 외면하지 맙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환자를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예수님께 여러분의 시선을 맞추십시오. 그분은 변함없이 하느님이시지만 우리를 섬기시고자 자신을 낮추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필리 2,6-7 참조). 오직 그분께서 가리키시는 길을 따라감으로써만 우리는 값어치 있는 이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받는 이와의 동일시, 결합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그분의 헌신적인 삶, 한없는 사랑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희생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궁극적 선택의 자리에 세우십니다. 우리는 이기적이고 격리된 삶을 사는 것과, 다른 이들을 섬기는 데에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는 것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