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 목록

4«하느님의 친구들»에 일상 생활 → 남과 함께 사랑과 공존 항이 있음.

우리가 주님의 말씀, 곧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9) 하신 말씀을 묵상할 때에, 우리는 우리 삶의 유일한 목적, 곧 ‘성화’를 분명하게 깨닫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거룩해지게 하려고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미묘한 유혹처럼 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이 신성한 초대를 참으로 마음에 받아들인 사람은 아주 소수일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보다시피, 우리는 도구로 쓰이기에 거의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인류의 다른 사람들과 견주어 소수입니다. 우리 자신도 보잘것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확고한 말씀, 권위에 찬 말씀이 메아리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요 누룩입니다. 그리고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합니다”(갈라 5,9). 우리가 각각의 모든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언제나 가르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백이면 백 모든 사람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구속하셨고, 당신의 구원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시고자 적은 수의 보잘것없는 우리를 활용하고자 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어느 누구도 나쁘게 대우하지 않습니다. 잘못은 잘못이라고 해야 하지만, 그 잘못을 고쳐 줄 때에는 친절하게 고쳐 주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 사람을 도울 수도, 거룩하게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사는 법을, 서로 이해하는 법을, 관대하게 넘어가 주는 법을, 형제자매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요한 성인께서 말씀하셨듯이,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놓으십시오. 그러면 사랑을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의 일터, 가정, 사회생활에서 조성되는 매우 우울한 상황에서조차 이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저는 극히 하찮은 기회조차도 놓치지 않고 활용하여 우리 자신을 성화하고, 공동 구속 활동을 달콤하고 고무적인 과제로 인식하며 우리와 함께 날마다 같은 고민을 나누는 사람들을 성화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종류의 사랑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까? 성경에서는 라틴어 단어 ‘dilectio’를 사용함으로써 그것이 단순히 애정의 느낌이 아님을 분명하게 이해시키고자 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의지에 따른 확고한 결정을 뜻합니다. ‘dilectio’는 ‘선택’이라는 뜻을 지닌 ‘electio’에서 옵니다. 덧붙여 이야기하자면, 그리스도인에게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기를 원하는 것’, 곧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차별도 없이 영혼들의 선익을 위한 일을 하기로 결심하는 것, 또 그들이 그 무엇보다도 최고의 선익인,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는 영혼들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촉구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우리가 먼저 가까이 다가갔는데 우리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인간적으로 매력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악을 악으로 되갚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어렵더라도 온 마음으로 그들에게 봉사할 기회를 내팽개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그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dilectio’라는 사랑은 대상이 믿음의 형제들과, 특히 하느님의 뜻에 따라 가까이서 일하는 사람들, 곧 부모, 배우자, 자녀, 형제자매, 친구, 동료, 이웃일 때에 훨씬 더 다정해집니다. 하느님을 향한, 그리고 하느님께 바탕을 둔 고귀하고 순수한 인간적 사랑인 이러한 애정이 없으면, 박애도 없을 것입니다.

사랑의 첫 표현들 가운데 하나는, 영혼을 겸손의 길로 이끄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가장 작고 연약한 피조물조차도 우리보다 나을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잘못과 혐오스러운 일들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무수히 범하는 불충실함에서 벗어나려고 치열하게 투쟁하고는 있지만, 우리는 역시 죄인임을 압니다. 그러니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나쁘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또는 어떻게 우리 마음 안에 광신적인 열광, 편협함, 오만함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겸손은 우리의 손을 잡고 최선의 방법으로 이웃을 대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모든 사람에 대하여 이해심을 갖도록 하고,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살게 하며,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결코 분열을 초래하거나 장벽을 만들지 않으며, 언제나 일치를 증진시키는 도구로서 행동하게 합니다. 인류의 평화와 일치, 개인 권리들의 상호 존중을 향한 우리의 심오하고 강력한 열망은 허망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형제애로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 열망은 우리 인간 본성에 가장 깊숙이 새겨진 어떤 것을 반영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우리의 형제애는 상투적인 말이나 허황된 꿈이 아니며, 비록 어렵지만 우리가 참으로 도달해야 하는 목표입니다.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사람들, 사랑에 실망하거나 겁에 질려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떠한 말을 하더라도, 그러한 종류의 애정이 참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창조되었고 하느님을 거슬러 무익하고 거친 저항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참된 애정을 지니기가 무척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한 애정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애정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함께 필연적으로 빚어 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그것을 바란다면, 예수님도 그것을 바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일상생활의 고통, 희생 그리고 이타적 헌신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고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확신하건대,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심 덕목인 이 사랑은 때때로 익살스럽게 풍자되어 온 내용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그토록 끊임없이 선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사랑은 단지 선포해야 하는 주제일 뿐이고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일까요?

우리가 주위를 둘러본다면, 사랑은 단지 환상 속의 덕목일 뿐이라고 생각할 만한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자연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메마름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이란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지속적이고 강렬하며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영혼들 안에서 사랑이라는 첫 열매를 맺으시는 성령의 활동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율법을 완수하게 될 것입니다.”(갈라 6,2)라는 성 바오로 사도의 충고 말씀에 대하여, 교회 교부들 가운데 한 분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써, 선행이 미흡하여 아직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나약함을 쉽게 견딜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사랑 안에서 자라게 하여 준 그 길이 가리키는 방향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저만치 밀쳐놓고 인도적 활동이나 사회사업에 먼저 투신한다면,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 이웃의 환자를 돌보느라 그리스도를 외면하지 맙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환자를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예수님께 여러분의 시선을 맞추십시오. 그분은 변함없이 하느님이시지만 우리를 섬기시고자 자신을 낮추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필리 2,6-7 참조). 오직 그분께서 가리키시는 길을 따라감으로써만 우리는 값어치 있는 이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받는 이와의 동일시, 결합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그분의 헌신적인 삶, 한없는 사랑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희생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궁극적 선택의 자리에 세우십니다. 우리는 이기적이고 격리된 삶을 사는 것과, 다른 이들을 섬기는 데에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는 것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