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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하느님의 친구들»에 일상 생활 → 직업 항이 있음.

“만일 존경받는 중요한 인물이 앞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의 행동이 개선될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 아니 계신 데 없이 늘 함께하심을 깨닫고 감사하며 사랑을 드리는 사람의 말과 행동과 감정은 점점 더 성화되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 양심이 생생히 깨닫고, 또 우리가 하는 일은 어느 것 하나 제외됨 없이 모두 그분의 눈앞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다르게 반응하고 조심스럽게 일을 수행할까요! 이것이야말로 제가 지난 수 년 동안 선포해 왔던 거룩함의 비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본받으라고 우리 모두를 부르셨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니, 세상 한가운데서 일상생활을 계속하면서 그리스도를 모든 활동의 중심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 자기 자신의 직업이나 일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또 세상의 성화를 위하여 세상 안에서 고귀한 일에 성실하게 투신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또 자신의 직업에 대한 소명 의식이 부족하다면, 그 사람은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의 초자연적 의미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세상의 성화를 위한 하느님의 일꾼이 반드시 지녀야 할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직을 단지 몇몇 신심 활동의 이행으로 축소시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리스도인인 동시에, 분명한 의무를 지니고 있는 시민이요 근로자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성인이 되기를 바란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방식으로 그 의무를 완수하여야 합니다. 예수님 자신도 이렇게 촉구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직업 활동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여러분의 동료와 친구들을 비추는 등불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틈틈이 오푸스데이 회원들에게 묻습니다. 이는 저의 말을 경청하는 여러분 모두에게도 적용됩니다. “아무개가 좋은 그리스도인이면서 나쁜 기업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만일 그가 경영을 잘 배우지 않거나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는다면, 그는 직업 활동을 성화할 수도 그것을 주님께 봉헌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직업 활동의 성화는, 말하자면, 우리처럼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로 결심하고 동시에 세속 일에도 온전히 관여하는 사람들에게는 참된 영성의 연결 고리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영혼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소명대로 살아가려면, 우리는 좋은 표양을 보여야 합니다. 악표양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또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유부단하고 쓸모없다는 털끝만 한 의심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 여러분은 균형 잡힌 정의의 표양을 보이고 책임 있는 사람으로서 올바르게 행동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향하여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들어 올리면서 밭에서 쟁기질을 하는 농부를 비롯해서, 목수, 대장장이, 사무직 노동자, 학자 등 사실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동료들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만심을 버리고, 오직 하느님의 도우심으로만 승리를 얻을 수 있으며, 우리 혼자서는 땅에서 지푸라기조차 들어 올릴 수 없음을 마음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요한 15,5 참조).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자신이 사회적으로 어떤 지위에 있건 간에 자신의 직업을 통해서 주님의 평화와 기쁨을 모든 곳에 뿌리면서 자신의 일을 하느님의 일로 만들어야 할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완전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평화와 기쁨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평화는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깨달은 사람의 몫이며, 기쁨은 자신이 하느님의 축복에 둘러싸여 있음을 아는 사람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하느님 나라에서 큰 인물이며, 하느님의 거룩한 사제입니다.”

다시 한 번 바오로 사도의 목소리에 귀 기울입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1코린 15,58). 여러분은 보이지 않습니까? 일을 시작할 때에는 언제나 일의 성화를 목표로 해야 하며, 이를 위하여 온갖 덕을 동원해야 합니다.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여러 어려움에 굴복함 없이 꾸준히 일하고 불안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으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과 안락함을 추구하려는 마음을 극복하고 아낌없이 자신을 투신하려면 ‘절제’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과 사회와 우리 가족과 동료 일꾼들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려면 ‘정의’가 필요합니다. 각각의 경우에 적절한 방법을 선택해서 주저 없이 일에 착수하려면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강조하건대, 이 모든 일은 사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주님의 사도로서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인지 예민하게 바로바로 살피고 책임감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사랑은 달콤한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여기에 덧붙일 말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나자렛 작업장의 문을 열어 주시어 제가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하는 주님의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와 성 요셉과 더불어 주님을 보고 기도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거룩하신 세 분께서는 노동을 거룩하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주님, 가엾은 저희 마음에 빛을 비추시어, 매일매일의 일을 통하여 주님을 찾게 하시며, 그 일이 하느님의 일, 사랑의 노동이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로 가십니다. 그분께서 여러분에게, 나에게 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영혼 때문에 목마르시고 시장하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목마르다”(요한 19,2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들에게 목말라하시고,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영혼에 목말라하십니다. 또한 하늘의 영원한 영광으로 이끌어 주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 우리가 인도해야 하는 모든 영혼에 목말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로 가셨는데, “잎사귀밖에는 달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마태 21,19). 얼마나 애석한 일입니까! 똑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벌어지지 않나요? 우리에게 믿음과 겸손의 힘이 부족하다면 슬픈 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주님께 보여 드릴 만한 희생과 선행이 있나요? 우리의 그리스도 신앙이 속 빈 강정에 불과한 것이면,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무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 맺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자 나무가 즉시 말라 버렸다”(마태 21,19). 이 복음 말씀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신앙을 굳건히 하고 그에 걸맞은 생활을 함으로써 언제나 주님께 열매를 맺어 드릴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촉구합니다.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맙시다. 우리 주님께서는 인간적 노력의 결실에 의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운 가장 원대한 계획도 주님 눈에는 한낱 어린이의 놀이에 불과합니다. 그분께서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고 사랑입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인간이 그분께 와서 영원히 당신 나라에서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이 지상에서 우리는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또 잘 해내야 합니다. 우리는 하루하루의 일상적인 일들을 성화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은 주님을 위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하여, 자랑하려고 일을 한다면,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달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 잎사귀들이 아무리 무성하다 한들, 주님께서도 우리 동료들도 그 사이에서 아무런 열매를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땅 위에 영원한 도성을 세우시려고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히브 13,14 참조). “이 세상은 다른 세상, 곧 아무런 근심도 없는 본향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세속적 노력들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세속적 노력들을 성화하여 복된 믿음으로 열매를 맺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만이 모든 사람에게 어디서나 참된 평화와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1928년 이래, 저는 우리가 사회를 절실히 그리스도화할 필요가 있음을 끊임없이 역설해 왔습니다. 우리는 인류의 모든 차원에 초자연적 전망을 불어넣어야 하며, 우리는 각자 자신의 일상 업무와 직업을 초자연적 은총의 질서로 승화시키려 애써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모든 인간사가 세속적 실재들의 덧없음과 시간을 초월하여 새로운 희망으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을 품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말씀은 상처 입은 양심을 달래 주고 자극하며 또 안정시킵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활동하시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우리는 비록 의지가 박약하고 쓸모없으며 개인적 단점과 약점들로 짓눌리기는 하지만 날마다 싸울 준비가 되어 있음을 주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아브라함처럼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마 4,18) 주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거듭거듭 말씀드려야 합니다. 이로써 전능하신 하느님 덕분에 우리는 새로운 활력으로 일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온갖 근심, 증오, 의심, 무지, 오해 그리고 비관주의를 극복하는 생활 방식을 가르쳐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