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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는 우정를 주제로 하는 4 항이 있음.

새로운 전례주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미사의 입당송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시작과 밀접하게 연관된 ‘어떤 것’에 관해 깊이 생각하게 해줍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에게 주신 ‘부르심(聖召)’입니다. “주님, 당신의 길을 제게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제게 가르쳐 주소서.” (시편 25,4). 우리는 주님께 우리를 인도해달라고, 당신의 발자국을 보여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신 계명을 온전히 실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바랍니다. 그 계명은 곧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자 결심했을 것입니다.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상황들을 생각해봅시다. 저는 여러분이 저와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께 감사할 것이라고 여깁니다. 진심으로 겸손히 감사한다면 여러분은 더욱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어떤 내세울 만한 일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보통 우리는 어렸을 때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부모님으로부터 하느님께 기원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런 뒤에는 우리 주님께 대한 시선을 놓치지 않도록 우리의 선생님과 친구들, 지인들이 여러모로 도와주었습니다.

예수님께 여러분의 마음을 여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이야기를 그분께 털어놓으십시오. 모두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일반화해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느 날 여러분처럼 평범한 어느 그리스도인이 여러분의 눈을 뜨게 해줬습니다. 여러분의 눈앞에 심오하고도 새롭고 복음서처럼 유구한 전망(지평)을 열어줬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진지하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도들 중의 사도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그때 여러분의 심정은 어땠나요? 여러분은 십중팔구 혼란스러워서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유로운 의지로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하느님께 말씀드린 다음에야 비로소 현실에 안주하려던 안일한 마음이 사라지고 진정한 평화가 찾아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스스로 원했다는 사실이 바로 가장 초자연적인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굳세고도 그칠 줄 모르는 기쁨이 여러분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그 기쁨은 여러분이 예수님을 버리기 전에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특권층의 일원으로 선택된 사람들에 관해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고, 선택하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성경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에페 1,4)

이런 생각이 여러분의 자존심을 채워주거나,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여기도록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주신 성소의 뿌리이며, 이는 곧 우리가 겸손해야만 하는 근거가 됩니다. 우리는 화가의 붓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지는 않습니다. 걸작을 만드는 데 화가의 붓이 한몫하긴 하지만, 우리는 화가만을 믿을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창조주이자 모든 인류의 구원자이신 그분의 손에 들린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 미사에서 방금 요한 성인의 복음 말씀을 읽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치유의 기적을 베푸신 장면입니다.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에 우리 모두 다시 한번 감동받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불행을 무심하게 바라보지 못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려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특별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엄존할 때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결코 무관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 존경심을 보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움츠러들 때, 다른 사람들의 양심을 무분별하고 무자비하게 침해할 수 있는 위험이 움튼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요한 9,1) 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자비를 이렇게 간단하게 묘사하는 성경 말씀에 저는 자주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딘가로 가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인간의 고통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그분의 제자들이 보인 반응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요한 9,2)

충동적인 판단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조차 제자들과 똑같이 행동한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첫 번째 충동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나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증거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런 생각을 혼자만 하지도 않습니다. 자신들의 성급한 판단을 여기저기 퍼뜨립니다.

제자들의 행동을 그나마 호의적으로 보자면, ‘근시안적’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별로 없습니다. 시종일관 그런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는 바리사이 같은 자들이 있는 법이니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리사이들을 얼마나 비난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하고 말한다.” (마태 11,18-19)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명성을 비방하는 조직적인 움직임에 고통받으셨습니다. 그분의 흠잡을 데 없는 행동을 중상하고 욕하며 상처 입히는 비난들이 쏟아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성적인 결함을 가졌고 개인적으로도 실수를 저지르지만, 자신의 그런 단점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스승으로 따르려 합니다. 그들이 지닌 인간적 나약함이란 워낙 흔하고 피할 수 없는 것들이지요.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마저도 예수님과 똑같이 비난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의 한계를 알고 있다고 해서 누군가의 명성을 해코지하는 죄와 불의가 용납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비록 그런 말을 지어내는 사람들은 그저 “이상한데”라고 큰 소리로 말하며 자신들의 행적을 지우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 (마태 10,25)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또한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자기 형제에게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마태 5,22)

이렇게 부당하게 남을 헐뜯는 태도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어떤 사람들은 마치 ‘시선을 왜곡하는 안경’을 쓰고 있는 듯합니다. 원론적으로 볼 때, 이런 사람들은 도덕적인 삶의 가능성을 거부하거나, 최소한 옳은 일을 하려는 끊임없는 노력들을 부정합니다.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은 미리 왜곡해버린 모습들로 얼룩져버립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가장 고귀하고 이타적인 행동들조차 단지 착하게 보이려고 꾸며낸 위선적인 작태에 불과한 것입니다.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이런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들은 선한 일을 확실히 찾아냈을 때 그 일을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그 선한 일 안에 숨겨진 결점을 반드시 찾아낼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서 말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임금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마음을 다스리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적인 의미의 다스림을 상상하려 해선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지배하시거나, 군림하시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기” (마태 20,28) 때문입니다.

그분의 왕국은 평화와 기쁨과 정의의 나라입니다. 우리의 임금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관념적 추론에 시간을 낭비하길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행동을 기대하십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치유자(治癒者)이십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은총을 우리의 영혼 깊이 스며들게 한다면, 그분은 우리의 이기심을 낫게 해주십니다. 가장 나쁜 병은 위선이라고 예수님은 가르치셨습니다. 위선은 우리들 자신의 죄를 숨기게 만드는 교만인 까닭입니다. 우리는 그분께 온전히 진실해야 합니다. 그분께 온전히 진리만을 말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얘기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언제나 원하시는 바를 말하십시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마태 8,2). 주님은 제 약점을 아십니다. 그런 조짐을 저도 느낍니다. 제 결점들 때문에 저도 고통받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께 상처를 보여드립니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대놓고 보여드려야 합니다. 만약 우리의 상처가 곪았다면 그 고름까지도 보여드려야 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수많은 영혼을 치료하셨습니다. 그러니 제 마음에 당신을 모셨을 때, 또는 감실에 계신 당신의 현존을 제가 묵상할 때, 당신이야말로 거룩한 치유자임을 제가 깨닫도록 도와주소서.

그분은 스승이십니다. 오직 그분만이 하느님을 향한 한없는 사랑을, 하느님 안에 계신 무한한 사랑을, 인간을 향한 끝없는 사랑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우리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웁니다. 그분은 모든 인류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포기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따른다면, 다른 사람들과 고통을 나누지 않고 이기적인 방법으로 우리 삶을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섬기며 살아가기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을 관대하게 대하며, 여러분의 말과 모범을 통해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기대하는 그리스도교적 헌신의 정도를 보여줘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런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열망을 마음에 품길 기대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거듭 말씀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요한 7,37) 그리고 우리는 대답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잊어버리도록 가르치소서. 그래서 우리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당신과 다른 사람들을 대하게 하소서. 그렇게 하면, 우리가 글씨 쓰는 법을 배울 때와 똑같이 우리 주님께서 당신 은총으로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마구잡이로 글씨를 쓸 때 선생님이 손을 잡고 글쓰기를 직접 가르쳐주셨던 기억을 갖고 계시죠?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보이는 기쁨을 맛보기 시작할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또 하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다운 행동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기쁨 또한 맛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우리의 행동에서 모두가 하느님의 경이로움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친구이십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 불렀다.” (요한 15,15) 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친구 말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부르셨습니다. 그분이 먼저 다가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그분은 당신의 사랑을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사랑을 주실 뿐입니다. 그분은 가장 분명한 표징으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13) 그분은 라자로의 친구였습니다. 예수님은 라자로의 죽음을 보시고 그를 위해 우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죽음으로부터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만약 우리의 내적 삶이 죽어 뻣뻣해져서 냉정하고 반항적이며 완고해져 버린다면, 그 모습을 보시고 그분은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내 친구여, 일어나 걸어라.” (요한 11,43, 루카 5,24) 그러니 주님께서는 결코 삶이라고 할 수 없는 그런 편협한 삶에서 떠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요한 성인은 성모 마리아께서 하신 놀라운 말씀들을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성모님은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일꾼들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요한 2,5) 그것이 성모님 말씀의 전부였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뵙고 “주님,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하고 묻도록 하신 것뿐입니다.

저는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일반적인 그리스도교적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사도직이란 거대한 가르침의 과업입니다. 여러분은 실제적이고 개인적이며 충실한 사귐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하느님을 향한 갈망을 심어줘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새로운 지평을 발견할 수 있도록 자연스러우면서도 솔직하게 도와줘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신앙을 살아내는 여러분의 본보기를 통해, 거룩한 진실의 힘이 넘치는 사랑의 언어를 통해 그 일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대담해지십시오! 사도들의 모후이신 성모님의 도움에 의지하십시오. 성모님은 결코 우리의 어머니 되심을 그만두지 않으실 것이므로 당신 자녀들 한사람 한사람이 자신의 임무와 마주하도록 해주실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에게 다가와 당신의 삶을 묵상하는 이들에게 항상 크나큰 호의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들을 주님의 십자가로 이끌어 주시고 성자의 모범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곳에 데려가 주십니다. 이러한 만남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정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행동이 여러분과 저처럼 더 젊은 형제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맏아들과 화해를 이루도록 전구(轉求)해주십니다.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스스로를 온전히 당신께 내어드리려는 수많은 회개와 결심들 이전에 성모님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찾고, 변화를 열망하며, 새로운 삶에 나서도록 북돋워주십니다. 그리하여 성모님께서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당부하신 “무엇이든지 그(예수님)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요한 2,5) 라는 말씀이 우리들의 실제적인 헌신과 그리스도교의 성소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성모님의 말씀은 우리의 모든 개인적 삶을 밝혀주십니다.

주님 앞에서 나누신 성모님의 이 대화는 우리의 신앙에 진정 새로운 활력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 대화에서 우리는 주님의 어머니이자 우리의 어머니이신 분께 대한 공경과 사랑에 관해 생각하게 됐습니다. 5월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 대한 사랑을 키워갈 수 있는 기회를 우리가 잘 이용하길 원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과 우리의 만남을 통해서 말입니다. 일상의 작은 일과 작은 배려들을 통해 당신 자녀인 우리가 성모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성모님께 보여드리도록 애씁시다. 우리의 거룩함과 우리의 사도직이 무언가를 실제로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드립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주시는 구원사업에 기여하기 위해 우리가 쉼 없이 노력하고 있음을 성모님께서 보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성모 마리아, 저희의 희망, 하느님의 종, 상지(上智)의 옥좌(玉座) 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Sancta Maria, spes nostra, ancilla Domini, sedes Sapientiae, ora pro nob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