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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는 순결를 주제로 하는 5 항이 있음.

‘육신의 욕망’이 우리 감각의 무질서한 성향이라고 싸잡아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성적 욕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성욕은 잘 관리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나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욕 또한 거룩해질 수 있는 고귀한 인간적 실체(實體)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불순함에 관해서가 아니라 ‘순결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점을 주목해주십시오. 그리스도께서도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마태 5,8) 라고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룩한 소명을 받아 결혼함으로써 이러한 순결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모든 인간적 사랑에 앞서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에만 열정적으로 응답하도록 성소(聖召)를 받습니다. 관능의 노예가 되는 것과는 전혀 별개로, 결혼한 사람이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거나 모두 스스로를 다른 사람에게 아낌없이 내어주기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순결’이라는 미덕에 관해 말할 때마다 저는 ‘거룩한 순결’이라는 단서를 달고 얘기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순결, ‘거룩한 순결’은 스스로 “순결하다”고, “오염되지 않았다”고 자만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비록 하느님의 은총이 매일매일 적들의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시기는 하지만, 우리 자신들의 발이 흙투성이라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만 합니다. 제가 보기엔, 이 주제에만 국한해서 배타적으로 글을 쓰거나 강론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하고 우리네 사회생활에 있어서 굉장히 소중한 다른 미덕들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순결’이 그리스도교의 유일무이한 핵심 덕목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성화(聖化)를 위한 노력을 계속해 나가려면 순결은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우리가 순결하게 살지 못하면 사도직을 위한 헌신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순결은 사랑의 결과물입니다. 우리의 영혼과 육신, 능력과 감각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맡기도록 이끌어주는 사랑의 결과가 바로 순결인 것입니다. 순결은 결코 부정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쁜 긍정입니다.

저는 앞서 ‘육신의 욕망’이 감각의 무질서한 성향이라고 싸잡아 말할 수는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제가 말하는 ‘육신의 욕망(탐욕)’이란 가장 쉽고 쾌락적인 길에 탐닉하는 ‘굳세지 못함’, ‘나태함’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라 해도 개의치 않고, 누가 봐도 손쉬운 방법을 택하는 성향 말입니다.

이런 상태에 빠지는 것은 죄악의 오만한 동요 속으로 자기 자신을 완전히 빠뜨리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바로 이 점을 바오로 성인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로마 7, 21-24) 계속해서 바오로 사도의 대답을 들어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으로…” (에페 1,3-14) 그렇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육신의 욕망을 이겨내기 위해 싸울 수 있고,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겸손하다면 우리에게 항상 주님의 은총이 주어질 것입니다.

인간적 사랑의 거룩함 

부부의 사랑은 순결하고 숭고하며 신성한 것입니다. 사제로서 저는 온 마음을 다해 이 사랑을 축복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전승은 예수님께서 카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셨다는 사실을 통해 하느님께서 결혼에 부여하신 가치를 확인합니다. 이와 관련해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성인은 이렇게 썼습니다. “인간 삶의 근원을 거룩하게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우리 구세주께서 혼인잔치에 가셨습니다.”

결혼은 두 사람의 몸이 하나가 되는 성사입니다. 신학은 “혼인성사의 주제가 남편과 아내의 몸”이라고 가르침으로써 이 같은 사실을 매우 강조해서 표현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나누는 사랑을 거룩하게 하시고, 또한 축복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결혼을 영혼의 결합일 뿐 아니라 육신의 결합이라고 여기십니다. 결혼의 소명을 받았건 아니건 간에 어떤 그리스도인에게도 결혼의 가치를 과소평가할 권리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지으셨고 또한 지성을 부여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지성은 하느님의 지혜로부터 온 한 점 불꽃과도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또 다른 선물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자유의지 덕분에 우리는 이해하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 몸 안에 출산의 능력을 심어주셨습니다. 이 능력을 통해 우리는 주님만이 가지신 창조의 권능에 동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사랑의 힘으로 이 세상에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교회의 몸을 키워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성(性)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성(性)은 생명과 사랑과 결실을 맺어주시는 하느님의 거룩한 선물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그리스도교의 성(性)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 땅에 존재하는 아름답고 고귀하며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들 중 그 어떤 것도 무시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간단명료하게 가르쳐줍니다. 우리들 삶의 규범이 결코 이기적인 쾌락의 추구가 돼선 안 된다고 말입니다. 오직 희생과 절제만이 진정한 사랑으로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진실하게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도록 초대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은 다음과 같이 역설적으로 표현합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태 10,39)

끊임없이 자기 자신만 생각하며 오직 자기만족만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을 얻기 어려우며, 현세의 삶에서도 불행을 피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줄 때만이 이 땅에서 행복할 수 있습니다. 결혼생활뿐만 아니라 삶의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얻는 행복은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준비하고, 그 기쁨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 사랑에는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결혼생활이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기쁨이 있고, 가정을 꾸리고 돌보는 열망과 열정이 있으며, 남편과 아내의 사랑이 있고,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는 행복이 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슬픔과 고난이 동반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육신은 소진하고, 마음은 갈수록 쓰라리며, 겉보기에 항상 똑같은 날들이 단조롭게 이어지면서 인성(人性)이 위협받습니다.

그런 고난들에 직면했을 때 사랑과 기쁨이 끝나버렸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결혼과 인간의 애정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이 닥쳐온 바로 그때 우리의 진짜 감정이 드러납니다. 바로 그때 자기를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과 다정한 심성이 뿌리를 내려 진실하고 깊은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냅니다. 이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합니다.

진실한 사랑은 모든 혼인관계에서 충실함과 정직함을 요구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이와 관련해,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생활하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활동을 수행할 때 기쁨이나 만족을 느낄 수 있도록 하셨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다양한 인간 활동으로부터 오는 기쁨이나 만족은 선한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그 반대로 오직 만족 자체만 목표로 삼아 이를 추구한다면, 그래서 만족이 지향해야 할 선(善)함을 무시한다면, 이는 만족의 진정한 본성을 왜곡시킨 것이며 만족을 죄로, 또는 죄를 짓게 되는 상황으로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정결(貞潔)은 단순히 금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안에 깃들어 있는 의지(意志)에 대한 명확한 긍정입니다. 삶의 어떤 상황에서건 정결은 사랑을 항상 생기 넘치게 유지해주는 미덕입니다. 육체적인 성숙에 눈뜨기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걸맞은 정결이 있고, 결혼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어울리는 정결이 있습니다. 또한 독신생활을 하도록 하느님께 부르심 받은 이들에게 맞는 정결이 있으며, 기혼자로 하느님께 선택받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정결도 있습니다.

저는, 토비야가 사라와 결혼하기 전에 대천사 라파엘이 그에게 준 굳세고도 명확한 조언이 떠오릅니다. “그러자 라파엘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내 말을 들으시오. 그러면 나는 누가 마귀에게 휘둘릴 수 있는지 당신에게 보여줄 것이요. 자기 자신에게서, 자신의 마음에서 하느님을 배제하고, 분별력 없는 말이나 노새처럼 욕정에 몸을 던지는 방식으로 결혼생활을 시작하려는 사람은 마귀의 힘에 좌우되는 이들이기 때문이요.”

정결의 미덕이 없다면, 결혼생활에서 순수하고 진실하며 기쁨에 찬 인간의 사랑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정결의 미덕은 부부로 하여금 성(性)의 신비를 존중하게 합니다. 또한 그 신비에 충실하며 인격적으로 헌신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저는 불순한 것에 관해 얘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혐오스럽고 의미 없는 궤변에 빠져들지 않도록 항상 애써왔습니다. 대신에 저는 정결과 순결, 그리고 사랑에 대한 기쁨에 찬 확신에 관해서 여러 차례 말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결혼생활에서의 정결과 관련해 저는 모든 부부들에게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데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오히려, 서로 애정을 드러내는 일은 결혼생활의 뿌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부부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그들이 서로 존중하고 서로에게 성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품위 있고 단순하며 단정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바라십니다. 저는 또한 부부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부부가 서로에게 사랑을 표현할 때 그 결과로 부부관계가 존엄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부부의 관계가 결실을 맺어 출산(出産)에까지 이르면, 부부의 사랑은 엄존(儼存)할 것입니다.

이렇게 삶의 원천이 되는 일들을 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선물을 거스르는 범죄입니다. 이는 곧, 인간은 사랑이 아닌 이기심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마치 공범(共犯)처럼 바라보게 되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지며 불화가 싹트게 됩니다. 그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불화는 십중팔구 치유하기 불가능해집니다.

부부의 사랑에 정결이 깃들어 있다면, 그들의 결혼생활은 진실한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진심으로 대하고 서로 이해하게 되며, 부부 사이의 일치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性)이라는 하느님의 선물이 왜곡될 때 부부의 친교는 망가져버리고, 더이상 서로를 솔직하게 바라볼 수 없게 됩니다.

부부는 서로에 대한 진지하고 순결한 애정을 기반으로, 또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자녀들을 세상에 데려오는 기쁨을 바탕으로 그들의 삶을 함께 꾸려야만 합니다. 부부는 그들 자신의 안락함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하며,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대가족을 이루는 것은 확실히 행복하고 보람 있는 삶을 보증합니다. 이기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의 그릇된 옹호자들은 정반대로 이야기하겠지만 말입니다.

복음서가 기록한 요셉 성인 

복음사가 마태오 성인과 루카 성인은 요셉 성인이 다윗과 솔로몬의 가계, 즉 이스라엘의 왕족 집안 출신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분의 선조들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명확히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의 두 계보(系譜) 중 어떤 것이 유다 율법에 따른 예수님의 양아버지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 또한 어떤 것이 예수님의 육신을 낳아주신 어머니 성모 마리아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울러 요셉 성인의 출신이 인구조사를 위해 다녀왔던 곳인 베들레헴인지, 아니면 그가 살았고 일했던 나자렛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그가 유복한 집안 출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시 세상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그는 단지 한 사람의 노동자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힘들고 초라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요셉 성인이 하신 바로 그 일을, 인간의 육신을 취하신 하느님께서 선택하셔서 우리 인간들과 똑같이 생계를 위해 삼십 년 동안 종사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요셉 성인이 장인(匠人)이었다고 일러줍니다. 몇몇 교부(敎父)들은 그분이 목수였다고 설명합니다. 유스티누스 성인은 예수님의 생애에 관해 얘기하면서 요셉 성인이 쟁기와 멍에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세비야의 이시도르 성인이 요셉 성인의 직업을 대장장이라고 결론 지은 것은 아마도 그 영향을 받은 듯합니다. 어쨌든 간에 요셉 성인은 오랜 세월 고되게 땀 흘려 얻은 손재주로 이웃 시민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주던 기술자였던 것입니다.

복음서는 놀랍도록 착실한 성인의 모습을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그분은 어떤 경우에도 두려워하거나 자신의 삶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여러 문제에 직면해서 어려운 상황들을 잘 대처하며,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책임감을 갖고 솔선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요셉 성인을 나이든 남자로 묘사하는 전통적인 그림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비록 그런 그림들이 성모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童貞)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긴 하지만,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저는 그분이 건강하고 젊은 남자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성모님보다는 조금 나이가 들었겠지만, 자신의 인생과 일에 있어서 전성기를 맞은 젊은 남자였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정결의 미덕을 실천하기 위해 굳이 늙고 기력이 없어질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겠지요. 순결이란 사랑으로부터 오는 것이니까요. 젊음의 힘과 유쾌함은 결코 고귀한 사랑의 장애물이 아닙니다. 요셉 성인이 성모 마리아와 결혼했을 때, 그러니까 성모님의 거룩한 모성(母性)의 신비를 알고 성모님과 함께 살게 됐던 그때 요셉 성인은 젊은 마음과 육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주고자 하신 고결함을 존중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피조물들과 삶을 나누고자 오셨다는 또 하나의 징표였던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한 사랑에 대해 조금도 알 수 없으며,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정결의 의미를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얘기했지만, 요셉 성인은 갈릴래아 출신의 장인(匠人)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일 뿐이었습니다. 갈릴래아 지방의 나자렛처럼 보잘것없는 마을 사람의 삶에 무슨 내세울 것이 있었을까요? ‘일(노동)’ 말고는 아무것도 없지요! 항상 끊임없는 노력을 필요로 하는 매일 매일의 일이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가 저물면 그다음 날을 위해 휴식하며 기력을 되찾을 가난하고 작은 집이 있을 뿐이었겠지요.

하지만, 요셉이라는 이름은 히브리말로 “하느님께서 더하실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의 거룩한 삶에 전혀 예상치 못한 영역을 더해주십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에 의미를 주는 중요한 영역, 거룩한 영역을 부여하십니다. 이를테면 요셉의 겸허하고도 거룩한 삶에 동정 마리아와 우리 주님 예수님의 삶을 더해주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한없이 너그러우십니다. 요셉 성인은 당신의 아내인 성모 마리아의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새겼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루카 1, 28-29).

요셉 성인은 평범한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에게 위대한 일들을 하게 하시고 그를 신뢰하셨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각각의 모든 사건들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바를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성경이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찬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태 1,19). 히브리말로 ‘의로운 사람’은 ‘착하고 충실한 하느님의 종’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 (참조 창세 7,1. 18,23-32) 혹은 이웃에게 훌륭하게 행동하고 자애로운 사람을 의미합니다. (참조 토빗 7,5. 9,9) 그러므로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고 자기의 온 생애를 형제와 동료들을 위해 바침으로써 스스로의 사랑을 증명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은 요셉 성인의 삶을 지탱해주며,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지켜주는 버팀목입니다. 요셉 성인의 헌신은 충직한 사랑과 사랑 넘치는 믿음, 그리고 믿어 의심치 않는 희망이 하나로 맺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 요셉 축일은 하느님께서 주신 그리스도교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약속을 새롭게 하는 좋은 기회입니다.

여러분이 진정 믿음, 희망, 사랑으로 살고자 할 때, ‘여러분의 약속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무시하고 내버려뒀던 것을 다시 시작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새롭게 한다’는 것의 의미는 ‘하느님 손 안에 머무른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의 숱한 인간적인 잘못과 실수,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우리의 약속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에 대한 우리의 충실함을 확인하여 새롭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의 사랑을 행동으로 드러냄을 뜻합니다.

사랑에는 어느 정도 기준이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사랑이 자기만족을 위한 충동이거나 자기 인격의 이기적인 충족을 위한 수단인 듯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런 건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기쁨을 불러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의 뿌리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한 희생과 고통 없이는 진정한 사랑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다가올 영원하고 충만한 삶에 도달할 때까지 사랑에는 희생과 고통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고통은 달콤하고 사랑스러워집니다. 고통은 내적 기쁨의 원천이지만, 이것은 진짜 아픔입니다. 왜냐하면 저마다의 이기심을 이겨내고, 사랑을 우리들 각자의 원칙으로, 또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원칙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