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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는 회개를 주제로 하는 3 항이 있음.

우리는 사순시기의 시작을 맞이했습니다. 참회와 정화, 그리고 회개의 시기입니다.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고 보면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가 그리 쉬운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우리의 첫 회개는 확실히 정말로 소중합니다. 우리들은 첫 회개의 순간을 저마다의 유일무이한 시간으로 기억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우리가 확실히 이해했던 특별한 시간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그다음에 계속 이어지는 회개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회개할 때마다 점점 더 많은 것들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회개 안에 깃든 은총의 활동이 계속되게 하려면 우리의 영혼을 젊게 유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 간청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 알게 해달라고, 무엇을 잘못했을 때 어떻게 하면 당신께 용서를 구할 수 있는지 깨닫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주일 전례에서 “그가 나를 부르면 나 그에게 대답하고” (시편 91,15) 라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돌봐주시고, 인간이 당신께 얘기하기를 기다리면서 언제나 우리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그분은 항상 우리 얘기를 듣고 계시지만, 특별히 지금 이 순간에 더욱 경청하십니다. 우리 마음은 준비돼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화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분은 우리 얘기를 듣고 계시며, 우리의 “부서지고 꺾인 마음”(시편 51,19)을 결코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귀 기울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악(惡)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선(善)으로 가득 채우도록 하기 위해 우리 삶에 개입하길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를 해방하여 영예롭게 하리라.” (시편 91,15). 그러므로 우리는 영광을 희망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영적 생활(영성생활)을 일궈갈 ‘내적 움직임’을 다시 한번 시작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영광에 대한 희망이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키웁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라는 이 세 가지 신학적 미덕, 즉 ‘향주덕(向主德)’은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을 닮게 해줍니다. 이들 향주덕은 이미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순시기를 더 잘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참회의 정신과 정화를 위한 열망은 바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라는 세 가지 향주덕으로부터 옵니다. 사순시기는 금욕의 외적인 실천만을 늘릴 수 있는 기회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사순시기가 가지는 깊은 의미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사순시기에 우리가 행하는 금욕의 외적 실천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결과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위험한 안전(安全) 

“지극히 높으신 분의 보호 속에 사는 이, 전능하신 분의 그늘에 머무는 이” (시편 91,1).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위험한 안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얘기를 경청하신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신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그렇게 확신한다면 우리는 완전한 마음의 평화를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함께 나누려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원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그분께 다가간다면, 그것은 우리가 새로운 회개를 준비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삶의 방향을 새롭게 정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감에 보다 주의 깊게 귀 기울이며, 이를 실천에 옮기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영감이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하느님께서 불러일으키시는 거룩한 갈망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첫 번째 결정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참으로 따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결정한 이후, 그분의 말씀을 충실히 이행해가는 여정에서 우리가 많이 성장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할 일이 여전히 많다는 게 사실이지 않습니까? 특히 우리 안에 여전히 너무도 많은 교만(驕慢)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실제로 다시 변화해야만 합니다. 더욱 성실하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은 줄어들고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커지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요한 3,30)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오로 성인이 얘기한 새로운 목표를 향해 쉼 없이 전진해야 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 2,20) 이것은 고귀하고 숭고한 바람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뜻하며 이것이 바로 거룩함인 것입니다. 만약 세례 때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 안에 심어주신 거룩한 삶을 우리가 그대로 살고 싶다면,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면 우리는 거룩함을 키워가야 합니다. 이 거룩함을 꺼리고 피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삶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거부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불길은 계속 지펴져야 합니다. 그 사랑의 불길은 우리 영혼의 힘을 모아 매일 커져야 합니다. 불길은 무언가를 계속 태움으로써 유지됩니다. 만약 우리가 계속 불을 지피지 않는다면 꺼져버릴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얘기를 기억합시다. “만약 여러분이 스스로 ‘이만큼 왔으면 충분하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길을 잃은 것입니다. 더 멀리 나아가십시오. 계속 가십시오. 같은 장소에 머무르지 마십시오. 되돌아가지 마십시오. 길 밖으로 벗어나지 마십시오.”

사순시기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충실하게 따르며 성장하고 있는가? 거룩함에 대한 열망이 성장하고 있는가? 일상에서 실천하는 너그러운 사도직 활동이 성장하고 있는가? 내 동료들과 함께하는 일상의 일에서 성장하고 있는가?

우리 모두 조용히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한번 변화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고, 우리 행동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분명히 비추어지려면, 우리가 변화해야만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카 9,2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 말씀을 다시 하고 계십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라고 우리 귀에 속삭이시면서 말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박해 시기, 또는 순교의 기회가 있을 때뿐만 아니라 모든 상황에서, ‘예전의 우리’를 부정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지금의 우리’를 고백하도록 합시다. 우리가 행하고 생각하는 모든 일에서,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에서 우리의 고백이 이뤄지도록 합시다.”

바오로 성인은 이렇게 화답합니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 (에페 5, 8-10)

회개는 한순간의 일이고 거룩해지는 것(聖化)은 평생의 과업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에 심어주신 사랑의 거룩한 씨앗은 자라나기를 원하고 행동으로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대로 한결같이 일치하는 열매를 맺길 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상황에서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처음 회개했던 순간의 그 빛과 강렬한 느낌을 되찾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도움을 간구하며 양심의 깊은 성찰을 갖추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주님과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다시 회개하고자 한다면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요한 성인은 성모 마리아께서 하신 놀라운 말씀들을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성모님은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일꾼들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요한 2,5) 그것이 성모님 말씀의 전부였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뵙고 “주님,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하고 묻도록 하신 것뿐입니다.

저는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일반적인 그리스도교적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사도직이란 거대한 가르침의 과업입니다. 여러분은 실제적이고 개인적이며 충실한 사귐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하느님을 향한 갈망을 심어줘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새로운 지평을 발견할 수 있도록 자연스러우면서도 솔직하게 도와줘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신앙을 살아내는 여러분의 본보기를 통해, 거룩한 진실의 힘이 넘치는 사랑의 언어를 통해 그 일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대담해지십시오! 사도들의 모후이신 성모님의 도움에 의지하십시오. 성모님은 결코 우리의 어머니 되심을 그만두지 않으실 것이므로 당신 자녀들 한사람 한사람이 자신의 임무와 마주하도록 해주실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에게 다가와 당신의 삶을 묵상하는 이들에게 항상 크나큰 호의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들을 주님의 십자가로 이끌어 주시고 성자의 모범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곳에 데려가 주십니다. 이러한 만남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정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행동이 여러분과 저처럼 더 젊은 형제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맏아들과 화해를 이루도록 전구(轉求)해주십니다.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스스로를 온전히 당신께 내어드리려는 수많은 회개와 결심들 이전에 성모님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찾고, 변화를 열망하며, 새로운 삶에 나서도록 북돋워주십니다. 그리하여 성모님께서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당부하신 “무엇이든지 그(예수님)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요한 2,5) 라는 말씀이 우리들의 실제적인 헌신과 그리스도교의 성소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성모님의 말씀은 우리의 모든 개인적 삶을 밝혀주십니다.

주님 앞에서 나누신 성모님의 이 대화는 우리의 신앙에 진정 새로운 활력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 대화에서 우리는 주님의 어머니이자 우리의 어머니이신 분께 대한 공경과 사랑에 관해 생각하게 됐습니다. 5월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 대한 사랑을 키워갈 수 있는 기회를 우리가 잘 이용하길 원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과 우리의 만남을 통해서 말입니다. 일상의 작은 일과 작은 배려들을 통해 당신 자녀인 우리가 성모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성모님께 보여드리도록 애씁시다. 우리의 거룩함과 우리의 사도직이 무언가를 실제로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드립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주시는 구원사업에 기여하기 위해 우리가 쉼 없이 노력하고 있음을 성모님께서 보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성모 마리아, 저희의 희망, 하느님의 종, 상지(上智)의 옥좌(玉座) 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Sancta Maria, spes nostra, ancilla Domini, sedes Sapientiae, ora pro nob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