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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는 순종를 주제로 하는 3 항이 있음.

그분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셨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들 마음속에서 당신의 쉴 곳을 찾고 계십니다. 저는 결코 진실을 왜곡하지 않고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그분께 각자의 무지함과 배은망덕함에 대한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가는 우리 영혼의 문을 스스로 닫아 버리지 않도록 은총을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희생해야 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은 권리를 요구하지 않고 섬기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어떻게 순종하셨을까요?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립 2,8) 여러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곤혹스러워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우리의 삶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조용한 삶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다르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하느님의 뜻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 여러분 스스로가 바뀌어야만 한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여러분의 뜻에 맞춰서 하느님의 뜻을 왜곡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요청하신 일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칩니다. 주님처럼 “죽음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저는 매우 기쁩니다. 그들은 교회에 봉사하기 위해, 또한 모두의 선익(善益)을 위해서 자신의 열망과 직업적 노동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순명(順命)을 배웁시다. 섬김을 배웁시다. 스스로를 거리낌 없이 내어주며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길 원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리더십입니다. 우리 내부에 자만심이 커져서 우리가 뭐든 할 수 있는 슈퍼맨이란 생각을 하게 될 때, 그 순간이 바로 “아니요”라고 말할 때인 것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승리는 겸손의 승리일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스스로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일치시킬 수 있습니다. 마지못해 안절부절못하며, 시큰둥하게 하는 게 아니라, 아주 기쁘게 말입니다. 우리 자신을 잊을 때 찾아오는 기쁨이야말로 사랑의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삶은 무의미하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이렇게 되새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을 다른 사람들과 떨어뜨려 구분하라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 는 것입니다. (요한 13, 34-35) 이는 항상 다른 사람들과 어우러져 함께 살아가라는 의미이며 모두가 평등하다는 뜻입니다. 또한 세상 안에서 주님을 섬기기 위해 우리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잘 알도록 만들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길이 땅 위에 이미 열려 있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말로만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고, 실제 일어난 사건들을 통해 이를 입증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법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의 도입부를 기억하십니까? 루카 성인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처음부터 다 다루었습니다.” (사도 1,1)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말이 아닌, 스스로 행동하심으로써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를 가르치면서 당신 자신이 본보기가 되었고, 우리의 스승이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기 예수님 앞에서 각자의 양심을 계속 성찰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 그리스도인 형제들과,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도록 노력할 준비가 되어 있나요? 우리는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될 준비가 되어 있나요? 그렇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께, 그리고 제 자신에게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또 한 명의 그리스도가 되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그렇게 소명 받은 여러분은 과연 스스로에게 하느님의 아드님이 하셨던 대로 할 일을 해왔고, 또한 그렇게 가르쳐 왔다고 말할 수 있나요? 여러분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마음을 쏟고 있나요? 그래서 그분 뜻대로 선하고 고귀하고 거룩한 인간 구원의 가치를 다른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나누도록 독려할 수 있나요?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나요? 세상의 한가운데서 일상생활을 하며 그리스도의 삶을 살고 있나요?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번듯한 말로만 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을 위해 우리 자신을 바치라는 초대입니다. 우리 자신을 죽여야 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순명하셨습니다.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리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드높이 올리신” (필립 2,9)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한다면, 십자가는 곧 우리의 부활과 ‘드높이 올려짐’을 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 그리스도의 삶이 한 걸음 한 걸음씩 채워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느님의 착한 자녀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저마다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결점이 얼마나 많은지와는 상관없이, 좋은 일을 하려고 두루 돌아다니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애썼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산다면, 누구에게나 당연히 닥쳐올 죽음의 순간에 우리는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평범하게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기쁘게 죽음을 맞는 것을 저는 보아왔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가 선한 일을 한다면, 우리들 각자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순종하며 십자가를 짊어진다면, “정녕 되살아나신” (루카 24,34) 주님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어린아이로 오신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이 점을 생각해봅시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스스로 죽으심으로써, 겸손하고 소박하게 순명하심으로써 이기신 것입니다.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인간의 평범한 삶을 거룩하게 하심으로써 죽음에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위치로, 하느님 자녀의 위치로 끌어올리셨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인 우리가 있는 곳까지 내려오셔서 우리를 주님의 위치로 끌어올리신 것입니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 마태오 성인은 자신이 쓴 복음서에서 요셉의 충실함을 계속 강조합니다. 요셉 성인은 하느님의 계명을 흔들림 없이 지켰습니다. 그 계명의 의미가 때로는 모호했고, 또 하느님의 다른 계획들과의 연관성을 알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은 굳세게 계명을 수행했습니다.

교부(敎父)들과 영성가들은 요셉 성인의 굳건한 믿음을 자주 강조합니다. 헤로데의 마수로부터 벗어나 이집트로 피신하라고 한 천사의 명령과 관련해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다음과 같이 해설합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 요셉 성인은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 참 이상하다. 얼마 전에 천사님께서 이 아기(예수님)가 자기 백성들을 구할 거라고 직접 말씀하셨는데, 이제 와서는 세상을 구원한다는 그 아기가 자기 자신조차 구할 수 없다니. 그래서 우리가 피난을 가야 하고 긴 여행을 거쳐 낯선 땅에서 오래도록 지내야 한다니, 이건 천사님의 약속과 모순이지 않은가’… 하지만, 요셉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천사가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참조 마태 2,13) 하고 모호한 말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언제 돌아올지 묻지 않습니다. 요셉은 반항하지 않고 순명하고 믿으며, 이 모든 시련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요셉의 믿음은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그는 곧바로 순종합니다. 정말 문자 그대로 ‘즉시’ 순명합니다. 이 가르침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요셉의 믿음이 능동적이었고, 그의 순명이 사건의 흐름에 그저 따라가는 수동적인 복종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무기력한 순응이나 타성(惰性), 그리고 적극성의 부족 등과는 일말의 연관성도 없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자신을 전적으로 하느님의 보호에 맡겼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항상 자신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을 성찰했고, 그리하여 ‘하느님의 일’을 그토록 높은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지혜인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요셉 성인은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계획은 인간의 계획들을 단박에 뒤엎어버리는 논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일생 동안 다양한 상황들과 마주했지만, 요셉 성인은 결코 생각을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요셉 성인은 자신의 인간적 경험을 믿음의 봉사에 적용합니다. 이집트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이스라엘로) 가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마태 2,22). 다시 말해,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일하는 법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요셉 성인은 꿈을 통해 갈릴래아로 돌아오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가 옳았음을 확인시켜 준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요셉 성인의 믿음은 충만해지고 확신에 찼으며, 완벽해집니다. 그의 믿음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실제적인 헌신과 지혜로운 순명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믿음과 함께 사랑이 찾아왔습니다. 그의 믿음은 하느님께 대한 요셉 성인의 사랑을 키웠습니다. 하느님은 요셉의 선조인 아브라함과 야곱과 모세와 맺은 약속을 이뤄주시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요셉 성인의 믿음은 또한 아내인 마리아와 아들 예수에 대한 애정을 자라나게 했습니다. 이런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위대한 사명으로 발전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여러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 갈릴래아에 사는 한 목수를 통해 이 세상에서 그 일을 시작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류의 구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