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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는 하느님의 현존를 주제로 하는 3 항이 있음.

하느님께 드리는 응답 

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는 하느님 자비의 보호 아래 성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항상 마음에 새기고 하느님 자녀답게 행동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부르심이 확실히 뿌리내리게 하는 주요한 방법으로 무엇이 있을까요? 오늘 저는 그 가운데 두 가지를 제시하고자 하는데,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데 있어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나는 ‘내적 생활’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신앙에 대해 깊이 알게 해주는 ‘교리교육’입니다.

먼저 ‘내적 생활’에 관해 말씀드리면, 사실 이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정말로 드뭅니다. ‘내적 생활’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아마도 어두운 성전 같은 것을 상상할 것입니다. 저는 25년 넘게 ‘내적 생활’이란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줄곧 이야기해왔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의 ‘내적 생활’입니다. 왁자지껄한 도시에서, 대낮의 햇빛 속에서, 거리에서, 일터에서 늘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 가족과 함께 있거나 잠깐의 휴식을 취하며 살아가는 보통 그리스도인들의 ‘내적 생활’ 말입니다. 그들은 온종일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내적 생활’이란 지속적인 기도 생활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은 기도의 필요성을 진정 찾지 못했나요? 여러분을 거룩하게 이끄시는 하느님과의 친교로 나아가고픈 절실함이 없는 건가요? 바로 그것이 ‘항상 기도하는 사람들’이 이해했던 그리스도인의 신앙입니다. 이와 관련해 교부(敎父)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것을 인간이 사랑함으로써 인간이 하느님이 된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고, 우리 아버지이시며 우리를 위해 실제로 염려하시는 그분께 감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비록 감정의 문제는 아니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마치 영혼에 새겨진 자국처럼 조금씩 조금씩 우리에게 느껴집니다. 사랑을 다해 우리를 쫓아오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묵시 3,20). 여러분의 기도생활은 어떻습니까? 때때로 낮 동안에 그리스도와 더 길게 이야기하고픈 충동을 느끼지 않나요? ‘제가 나중에 모든 것을 털어놓을게요.’라고 하면서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는 대화를 그분과 나누고 싶지 않나요?

우리 주님과의 만남을 위해 특별히 예비된 이 기도 시간에 가슴은 넓어지고, 의지는 굳세어지며, 주님 은총에 힘입어 우리 마음속 인간의 현실세계를 초자연적인 내용으로 가득 채우게 됩니다. 그 결과 여러분의 행동을 개선하고 모든 사람들과 더욱 사랑 넘치는 관계를 맺으며, 사랑과 평화를 향한 그리스도교의 투쟁을 위해 마치 훌륭한 운동선수인 것처럼 마지막 힘까지 남김없이 쏟아내겠다는 명확하고도 실제적인 결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는 우리네 심장의 고동처럼, 우리의 맥박처럼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집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확인하지 않는다면, ‘관상생활(觀想生活)’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관상생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의 과업은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으려는 건물이 주님의 집이 아니라면 집 짓는 사람들의 수고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행의 필요성 

수도자가 아닌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거룩함에 이르기 위해서 세상을 등질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찾아야 하는 장소는 다름 아닌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수도복이나 주교의 표지와 같은 외적인 표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가진 모든 헌신의 표징은 ‘내면(內面)’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변치 않는 현존하심’과 ‘고행의 정신’이 바로 그 표징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변치 않는 현존하심’이 유일한 필수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고행의 정신’은 오감(五感)으로 드리는 기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부르심(성소)은 희생과 보속, 속죄의 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인류의 모든 죄를 속량해야 합니다. 그 죄는 하느님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수없이 얼굴을 돌린 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당신의 희생과 십자가의 고통을 몸에 짊어지고 다녀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2코린 4,10) 우리가 가야 할 길은 희생의 길입니다. 이렇게 스스로를 버림으로써 우리는 기쁨과 평화를 찾게 됩니다. (gaudium cum pace)

우리는 세상을 슬프게 바라보지 않습니다. 예전에 성인들의 전기를 썼던 몇몇 작가들은 하느님의 종으로 살아갔던 그들 삶의 아주 특별한 부분만을 부각시키는 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심지어 성인들이 요람에 누워 있었던 아주 어린 시절의 특별한 면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성인들 중 몇 명은 아기 때 울지도 않았으며, 금요일에는 보속을 실천하기 위해 엄마 젖도 빨지 않았다고까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훼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저도 태어날 때 심하게 울었을 것이고, 단식재나 사계재일(四季齋日)과 무관하게 모유를 실컷 먹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우리는 비슷한 날들이 하루하루 이어지는 일상 안에서하 느님의 도움으로 진정한 보속(참회)의 시간을 발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개선하기로 결심합니다. 이것은 우리 영혼 안에 계시는 성령의 은총과 감도(感導)를 받기 위해 우리 스스로 준비하는 길입니다. 제가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러한 은총을 통해 기쁨과 평화, 그리고 우리의 노력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 찾아옵니다.

고행은 우리의 삶을 깊이 있게 해줍니다. 고행 가운데 최고는 육신의 욕망과 눈의 욕망을 극복하는 것이며, 일상의 사소한 일들부터 생활 속에 만연한 욕망들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고행은 다른 사람들을 낮추어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사람들과 관계 맺음에 있어서 더 많은 세심함과 이해심, 그리고 개방성을 얻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쉽게 화를 낸다면, 여러분의 모든 사고가 오직 여러분 자신만을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긴다면, 여러분은 스스로 절제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불필요한 것들과, 때로는 필요한 것들이라도 여러분이 이를 포기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면, 여러분이 바라는 대로 일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우울해진다면, 이 또한 여러분이 욕망을 절제하지 않은 것입니다. 반면에 여러분 자신이 “모든 이들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1코린 9,22) 이 되는 법을 알고 있다면, 여러분은 분명히 ‘욕망을 절제했다’고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과 빵, 즉 기도와 성체 안에서 예수님과 끊임없는 친교를 맺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많은 신자들이 세대를 거쳐 성체에 대한 사랑을 표현해온 여러 방법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식적인 성체현양 행사를 통해 신앙을 선포하는 방법, 교회의 평화 안에서 또는 각자 마음의 친밀함 속에서 조용하고 소박한 실천을 이어가는 방법 등 모든 종류의 성체현양 방법을 저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미사를 사랑하고, 우리 생활의 중심에 미사가 들어서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에 충실하게 참석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주님의 현존 안에 우리가 항상 함께하기를 원하면서 그날의 남은 시간 동안 그분에 관해 생각할 것입니다. 또한 그분이 일하셨던 대로 일하고, 그분이 사랑하셨던 대로 사랑할 준비를 하며 각오를 다질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대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는 순간에만 현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에 당신의 친절하심에 감사드리는 법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감실에 보관된 성체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로 결심하셨던 것입니다.

제게 있어서 감실은 언제나 ‘베타니아’였습니다. 베타니아는 그리스도께서 머무르셨던 조용하고 쾌적한 지역입니다. 베타니아에 살던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가 그랬던 것처럼 단순하고도 자연스럽게 우리의 걱정과 아픔, 소망과 기쁨을 그분께 말씀드릴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어떤 마을이나 시골에서 우연히 교회와 마주칠 때 매우 기쁩니다. 그곳은 또 하나의 감실이자, 제 영혼이 자유로워져 성사(聖事) 안에서 스스로 주님과 하나 되는 또 다른 기회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