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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는 지혜를 주제로 하는 3 항이 있음.

이 사건과 관련해서 마태오 성인은 자신이 쓴 복음서에서 요셉의 충실함을 계속 강조합니다. 요셉 성인은 하느님의 계명을 흔들림 없이 지켰습니다. 그 계명의 의미가 때로는 모호했고, 또 하느님의 다른 계획들과의 연관성을 알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은 굳세게 계명을 수행했습니다.

교부(敎父)들과 영성가들은 요셉 성인의 굳건한 믿음을 자주 강조합니다. 헤로데의 마수로부터 벗어나 이집트로 피신하라고 한 천사의 명령과 관련해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다음과 같이 해설합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 요셉 성인은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 참 이상하다. 얼마 전에 천사님께서 이 아기(예수님)가 자기 백성들을 구할 거라고 직접 말씀하셨는데, 이제 와서는 세상을 구원한다는 그 아기가 자기 자신조차 구할 수 없다니. 그래서 우리가 피난을 가야 하고 긴 여행을 거쳐 낯선 땅에서 오래도록 지내야 한다니, 이건 천사님의 약속과 모순이지 않은가’… 하지만, 요셉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천사가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참조 마태 2,13) 하고 모호한 말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언제 돌아올지 묻지 않습니다. 요셉은 반항하지 않고 순명하고 믿으며, 이 모든 시련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요셉의 믿음은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그는 곧바로 순종합니다. 정말 문자 그대로 ‘즉시’ 순명합니다. 이 가르침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요셉의 믿음이 능동적이었고, 그의 순명이 사건의 흐름에 그저 따라가는 수동적인 복종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무기력한 순응이나 타성(惰性), 그리고 적극성의 부족 등과는 일말의 연관성도 없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자신을 전적으로 하느님의 보호에 맡겼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항상 자신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을 성찰했고, 그리하여 ‘하느님의 일’을 그토록 높은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지혜인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요셉 성인은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계획은 인간의 계획들을 단박에 뒤엎어버리는 논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일생 동안 다양한 상황들과 마주했지만, 요셉 성인은 결코 생각을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요셉 성인은 자신의 인간적 경험을 믿음의 봉사에 적용합니다. 이집트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이스라엘로) 가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마태 2,22). 다시 말해,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일하는 법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요셉 성인은 꿈을 통해 갈릴래아로 돌아오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가 옳았음을 확인시켜 준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요셉 성인의 믿음은 충만해지고 확신에 찼으며, 완벽해집니다. 그의 믿음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실제적인 헌신과 지혜로운 순명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믿음과 함께 사랑이 찾아왔습니다. 그의 믿음은 하느님께 대한 요셉 성인의 사랑을 키웠습니다. 하느님은 요셉의 선조인 아브라함과 야곱과 모세와 맺은 약속을 이뤄주시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요셉 성인의 믿음은 또한 아내인 마리아와 아들 예수에 대한 애정을 자라나게 했습니다. 이런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위대한 사명으로 발전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여러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 갈릴래아에 사는 한 목수를 통해 이 세상에서 그 일을 시작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류의 구원’이었습니다.

그들이 어디에 있든, 한창 잘 나가는 순간을 살고 있든, 아니면 위기와 좌절의 순간에 있든 간에,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베드로 성인이 성령 강림 이후에 말했던 장엄하고도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주춧돌이자 구원자이시며 우리 삶의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사도 4,12)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들 가운데 아주 특별하게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고 저는 곧잘 얘기해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혜의 선물입니다. 지혜의 선물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알게 하고 그분의 현존하심에 기뻐하게 해줍니다. 그로 인해 지혜의 선물은 우리에게 하나의 관점(觀點)을 부여합니다. 우리는 그 관점을 통해 우리가 처한 상황과 우리 삶의 여러 사건들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우리네 신앙은 변함없이 굳세게 일관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며 세상과 그 역사를 묵상할 때 우리 주님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느낌과 똑같은 감정을 우리 가슴 속에 반드시 갖게 되어야 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마태 9,36)

그리스도인은 인간성 안에 숨 쉬는 모든 선한 것들을 무시해선 안 됩니다. 그 건강한 기쁨을 인정하거나 인간적인 열정과 이상에 함께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가 세상에서 발견하는 모든 선한 것들과 조화를 이루며 행동할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배려심으로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인간 정신의 깊이와 풍부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의 정신을 약화시키거나 인간 영혼의 고귀한 충동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진실되고 진정한 의미를 자각하고 실현함으로써 그러한 특성들을 더욱 성장시킵니다. 우리는 대중적인 행복만을 추구하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당신이 사셨던 삶의 친밀함에 깊이 스며들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또한 같은 하느님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알고 사랑하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아울러 세 위격을 가지신, 한 분이신 하느님의 같은 사랑 안에서 천사들과 모든 인류를 사랑하도록 불림 받았습니다.

인간 본성의 가치와 존엄함을 선포하는 것은 그리스도 신앙의 대담한 모습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느님 자녀의 존엄함을 성취하기 위해 창조됐다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엄청나게 대담한 특징입니다. 그러한 확신은 우리를 초자연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려주는 은총을 통해 가능합니다. 만약 그리스도교 신앙이 구원의 약속 위에 세워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정말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담한 일이었겠지요. 그런데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신 이 구원의 약속은 그리스도의 피로 확증됐으며 성령의 지속적인 활동에 의해 다시금 확인되고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고, 신앙 안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동방 교회의 위대한 박사들 중 한 명이 다음과 같이 설명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신앙 안에서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투명한 물질이 한 줄기 빛을 받아 광채를 발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령에 의해 태어나 밝게 빛나게 된 영혼은 스스로 영적(靈的)이 되며, 은총의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리웁니다. 성령으로부터 미래에 일어날 여러 사건들에 대한 지혜가 오며, 신비를 이해하게 되고, 은총 주심과 천국의 시민됨, 그리고 천사와의 대화 등과 같은 숨겨진 진실들을 깨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기쁨이 찾아오며, 성령으로 인해 하느님 안에서 인내하고 하느님을 좋아하게 되며, 우리의 상상이 미치는 가장 고귀한 상태에 이르러 하느님과 같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 존엄성의 위대함을 깨우치는 것은 겸손한 마음과 더불어 우리 안에 하나의 태도로 자리잡습니다. 그 존엄성이 주님의 은총을 받아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 자녀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진정으로 엄청난 사실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에게 생명을 준 것은 우리들 자신의 힘이 아니며 바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이는 참으로 잊어선 안 되는 진실입니다. 만약 그 진리를 잊어버린다면, 우리 삶을 거룩하게 하는 일은 왜곡되어 주제넘는 오만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적 삶이 곧 무너져내릴 것이고, 그때 영혼은 스스로의 나약함과 비천함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묻습니다. “내가 거룩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요? 만약 내가 말하는 ‘거룩함’이 ‘나는 거룩함을 지니고 다니지만, 나를 거룩하게 만들어 줄 어느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라면, 저는 거짓말쟁이에다가 자만심으로 가득 찬 인간일 것입니다. 하지만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레위기 말씀처럼 ‘거룩함’이란 말을 ‘거룩하게 된 누군가’로 이해한다면, 저는 감히 제가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온 몸이 땅 끝에 사는 마지막 사람까지 드리워져 그 몸의 머리와 그 분 아래서 저도 함께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

복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제3위격이신 성령을 사랑합시다. 여러분은 성령으로부터 격려나 비판의 거룩한 울림을 받습니다. 여러분 존재의 친밀함 속에서 그 거룩한 울림에 귀를 기울입시다. 여러분의 영혼에 쏟아진 그 빛을 받으며 이 세상을 걸어갑시다. 그러면 희망의 하느님께서 우리를 완벽한 평화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께서 주신 희망이 성령의 권능으로 우리 안에서 매일매일 더욱더 크게 자라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성심 가득히 인간에 대한 사랑이 넘치시는 분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인간의 언어로는 결코 따라갈 수 없는 ‘인간과 사물의 가치’에 대한 유창한 설명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행복, 그리고 인간의 삶은 참으로 소중해서, 인간을 구원하고정결하게 하며, 다시 살게 하기 위해 성자께서는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어느 관상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토록 상처 입은 성심을 누가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사랑을 사랑으로 갚지 않겠습니까? 이토록 순결한 마음을 어떻게 끌어안지 않겠습니까? 육신으로 만들어진 우리는 사랑을 사랑으로 되갚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악한 인간들에 의해 손발에 못 박히신 우리의 상처 입은 그분을 끌어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 곁에 있을 것이고 그분의 성심에 기댈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그분의 사랑이 한데 이어질 만큼 우리가 가치 있는 사람이기를 빕니다. 또한 우리도 그분처럼 우리 마음이 창에 찔릴 값어치가 있는 사람들이기를 기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은 여전히 완고하고 잘못을 뉘우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읽은 이 기도는 예수님과 사랑에 빠진 영혼들이 처음부터 그분께 봉헌했던 생각이자, 애정이며, 대화입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이 말을 이해하려 한다면, 그래서 인간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성심과 하느님의 사랑을 실제로 알고자 한다면, 신앙과 겸손이 모두 필요합니다. 신앙과 겸손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글을 쓰도록 만들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쉴 수 있을 때까지 결코 쉬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겸손하지 않다면 하느님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려고 애쓸 것입니다. 하느님의 방식이 아닌 자기 뜻대로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1코린 11,24) 라고 하시며 인간이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하지만 오만한 인간은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인간의 한계 안에 가두려 합니다. 그런 다음 차갑고 맹목적인 이성이 등장합니다. 맹목적인 이성은 신앙이 깃든 마음과는 판이하게 다르고, 세상 일을 즐기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의 올바른 마음씨와도 전혀 다릅니다. 이런 류의 이성은 모든 것을 자신의 편협한 인간적 경험으로 축소시키려는 개인적 시도에 갇혀 비이성적으로 변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초인간적인 진리는 빈곤해집니다. 그런 인간의 마음은 껍질을 자라게 하고 그 껍질 때문에 성령의 활동에 둔감해지고 맙니다. 만약 하느님 자비의 권능이 우리가 가진 비천함의 장벽을 허물어 주시지 않는다면, 한계로 가득한 우리의 지성은 완전히 혼란에 빠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에제 36,26) 오직 하느님의 도움이 있어야만 우리의 영혼이 다시 눈뜰 수 있고, 거룩한 성경의 약속을 들어 기쁨으로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평화를 위한 계획이지 재앙을 위한 계획이 아니다.” (예레 29,11)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예레미야를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의 전례는 이 말씀을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예수님 안에서 확실히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비난하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비열함과 옹졸함을 꾸짖으러 오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용서하시며, 평화와 기쁨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을 대하시는 경이로운 방법을 알기만 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변할 것입니다. 우리 앞에 완벽하게 새로운 광경이 펼쳐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안도감과 심오함, 그리고 빛으로 가득한 전경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