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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는 희생를 주제로 하는 2 항이 있음.

신앙의 삶은 희생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소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위치를 결코 폄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버리라고 요구합니다. 이제 막 반짝이기 시작한 빛을 만났다는 것은 첫 걸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빛이 별처럼, 더 나아가 태양처럼 밝게 비추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 빛을 따라가야만 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이렇게 썼습니다. “동방박사들이 페르시아에 있는 동안 그들은 단지 하나의 별을 보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동방박사들이 집을 뒤로 하고 길을 나섰을 때 그들은 정의(正義)의 태양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나라에 그냥 머물러 있었다면, 결코 그 별을 계속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서둘러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을 모두가 나서 가로막더라도 아기 예수님이 계신 집을 향해 우리 함께 달려갑시다.”

굳세게 성소의 길을 걸어갑시다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마태 2, 2-3) 이 장면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마주하거나, 신앙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한 사람들을 이상하게 여기고 놀라워하면서 심지어 추문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인간적이며 그리스도교적으로 심오한 결정을 내린 사람들을 자신들의 편협하고 세속적인 시야에 어긋나는 삶의 방식이라 여기며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듯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은 사람들의 관대한 행동에 대해 히죽거립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소를 받은 이들의 헌신에 놀라고 두려워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노골적으로 병적인 반응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들은 온전히 자유롭게 스스로를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한 이들의 거룩한 결정을 방해하기 위해 온 힘을 쏟습니다.

저는 이른바 ‘동원(動員)’이라고 부를 수 있을 몇몇 경우들을 목격한 바 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헌신하고자 하는 이들에 대해 집단적으로 반대하는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주님께서 당신에게 봉사할 이들을 선택하시기 전에 당사자들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여기는 사람들은 분명히 ‘인간은 자유롭지 않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이 사랑의 제안에 대해 인간이 분명하게 ‘네’ 또는 ‘아니요’ 하고 자유롭게 답할 수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이들에겐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초자연적인 삶이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초자연적인 삶이란 사소한 안락과 인간의 이기심이 충족된 다음에야 비로소 고려해봐야 하는 것이지요. 만약 사실이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신앙 가운데 무엇이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사랑이 넘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히 듣기만 할 건가요? 아니면, 듣고 실천에 옮길 것인가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5,48)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던가요?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을 만나러 오라고 모든 인간에게 요청하십니다. 그래서 성인(聖人)이 되라고 요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지혜롭고 영향력 있는 동방박사들만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전에, 별이 아닌 당신 천사들 중 하나를 베들레헴의 목동들에게 보내셨습니다. 부자건 가난한 이건, 지혜롭거나 또는 그렇지 못한 것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겸손한 성품을 마음 깊이 길러야 합니다.

헤로데 임금의 경우를 봅시다. 그는 이 세상의 권력자 중 한 사람이었고, 지식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있었습니다.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마태 2,4) 하지만 헤로데의 권력과 지식은 그가 하느님을 알아보도록 이끌지 못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완고하기 그지없었기에 권력과 지식이 악(惡)을 행하는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없애려 들었고, 무고한 어린아이들의 생명을 경멸하는 만행만을 저질렀을 뿐입니다.

다시 복음서로 돌아가 봅시다.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마태 2, 5-6)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드러나는 이 표현들을 우리는 결코 그냥 지나쳐선 안 됩니다.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 보잘것없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거듭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태어나신 이유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한 사람을 온전히 신앙에 따라 살아가도록 초대하실 때에는 그의 재산도, 계급도, 혈통도, 배움도 결코 따지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세상의 모든 가치들에 앞서는 것입니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마태 2,9)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먼저 부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 어떻게 다가가는지를 알기도 전에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사랑을 우리 안에 심어주십니다. 우리가 그분께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심이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정의롭기만 한 분이 아닙니다. 정의로운 것에 앞서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께 다가가기를 기다리고만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먼저 나서십니다. 아버지가 주는 사랑의 명백한 징표를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과 함께 우리는 또한 몰약을 봉헌합니다. 몰약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결코 부족해선 안 되는 희생의 정신을 상징합니다. 몰약은 우리 주님의 수난을 떠올리게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 병사들이 “몰약을 탄 포도주”를 드렸죠. (마르 15,23). 그리고 주님의 시신이 묻히실 때 발라드렸던 것 또한 몰약이었습니다. (참조 요한 19,39). 하지만, 주님의 수난을 되새기며 희생과 고행의 필요성을 묵상하기 위해 오늘 이 기쁜 주님 공현 축제의 날을 슬프게 지내자는 뜻은 아닙니다.

고행은 결코 비관적이거나 고통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다면 고행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행은 세속의 유혹들을 우리가 적절하게 이겨내도록 성장하는 데 도움이 돼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와 함께 사는 이들을 당황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주위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할 자격이 없습니다. 고행을 한다는 이유로 주위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스스로를 비참하고 가엾은 사람으로 여겨지게 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행동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며, 고통을 이겨냄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증명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여러분께 반드시 상기시켜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보통 엄청나게 많은 것을 포기한다고 해서 고행이 이뤄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마어마한 금욕을 요구하는 상황은 그렇게 쉽게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행은 작은 성취들로 이뤄집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에게 웃어주고, 육신이 요구하는 지나친 욕망을 거부하고,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경청하는 데 익숙해지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을 최선을 다해 잘 이용하고… 고행은 이런 수많은 작고 섬세한 일들로 이뤄지는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 우리는 작은 문제들에서 이런 고행을 발견합니다. 일상생활에서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곧잘 일어나는 어려움과 걱정 속에서 고행을 찾아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