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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는 하느님의 뜻를 주제로 하는 6 항이 있음.

완벽한 하느님이며 완벽한 인간이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완벽한 하느님이신 동시에 완벽한 인간이십니다. (perfectus Deus, perfectus homo). 이 신비 안에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무엇’이 있습니다. 저 역시 그 신비 안에서 감동받았고, 또한 지금도 감동하고 있습니다. 저는 로레토의 대성당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곳에 가서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마음 깊이 다시 체험하고,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는 문구를 또 한 번 묵상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십니다. (Iesus Christus, Deus homo). 이것은 “하느님의 위업”(사도 2,11) 중 하나이십니다. 우리는 이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을 되새기고, 또한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를”(루카 2,14)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뜻에 자신들의 뜻을 일치시키길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자이건 가난한 자이건 상관없이 모든 이들에게, 모든 형제들에게 참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모두 한 형제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의 형제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바로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민족만 존재합니다. 바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민족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언어로 다 같이 이야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아버지와 말씀하셨던 그 언어 말입니다. 그것은 가슴과 마음으로 나누는 언어이고, 지금 우리가 기도 안에서 말하고 있는 언어입니다. 이는 영성 깊은 사람들이 쓰는 관상의 언어이기도 합니다. 영성적인(영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진실을 깨달았기에 관상의 언어를 쓸 수 있습니다. 이 언어는 우리의 의지를 표현하는 수많은 행동들을 통해, 우리 마음의 명징한 통찰을 통해, 그리고 우리 마음의 이끌림과 덕행의 삶에 이르는 우리의 헌신, 선함과 행복, 평화를 통해 표현됩니다.

여러분은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사랑이십니다. 이 모든 것이 신비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며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는 신앙으로 이 신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이 신비를 아주 깊이 탐구하기 위해 우리의 믿음을 활용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 영혼 특유의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의 빈곤하고 부족한 생각과 인간적인 설명으로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축소하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이 신비가 어둠을 거슬러 인류의 삶을 인도하는 빛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우리 함께 최선을 다합시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들 인간의 실체(實體)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토록 경이로운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일을 이해하기 위해 에너지를 낭비하지는 맙시다. 이해하려는 대신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신 일들을 겸허하게 받아들입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지 않은 일들을 캐내려고 애쓰지 맙시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과 같은 경건한 마음을 가진다면, 우리는 이 신비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이 사람으로 오신 이 신비가 우리에게 주시는 찬란한 가르침이 될 것입니다. 어떤 인간적 추론보다도 훨씬 설득력 있는 가르침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의 일상 활동을 잘 살펴보고 우리가 선포하는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임하도록 초대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주간은 일종의 ‘종교적 막간(幕間)’이 될 수 없습니다. 삶으로부터 따로 떨어져 나온 시간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삶이란 인간사(人間事)에 철저히 얽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성주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심오하게 이해하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언행(言行)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랑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주님께서는 특별한 조건을 내거십니다. 우리는 루카 성인이 우리를 위해 기록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6) 이것은 매우 어려운 말씀입니다. 사실, 영어의 ‘미워하다(hate)’라는 단어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매우 강하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 문구의 논조를 약화시키기 위해 ‘미워하다’를 “덜 사랑한다”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처럼 “덜 사랑한다”는 뜻을 표현하시려고 한 게 아니었습니다. ‘미워하다’처럼 강력한 말이 지닌 힘은 그 단어가 가진 부정적이고 냉정한 의미에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신 예수님은, 우리 자신을 사랑하듯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바로 그분이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위해 당신 목숨을 내어놓으신 그분인 까닭입니다.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에 관한 한, 우리가 결코 미온적이어선 안된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참뜻입니다. 이기적이거나 부분적인 사랑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더 사랑하라, 더 잘 사랑하라.”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우리 자신의 영혼을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곧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바입니다. 만약 우리가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래서 우리의 유일한 관심이 우리들 자신의 개인적인 행복뿐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심지어 이 세상 전체를 미소하기 짝이 없는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하려 든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여길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뿐 아니라 행동과 진심으로 우리 자신을 실제로 봉헌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게하고 그 어깨 위로 인류의 무게를 느끼도록 해주십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가 일하고 생활하는 모든 환경에서 하느님이 뜻하시는 명확하고도 사랑 넘치는 계획을 실현하게끔 이끕니다. 우리가 방금 읽은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은 계속 얘기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7)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입시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가르치고 요구하는 대로 우리의 모든 삶을 바로 세우도록 굳게 다짐합시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투쟁과 괴로움과 아픔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신앙을 지켜나간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느끼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슬픔의 한가운데서도, 심지어 온갖 모략이 난무하는 한복판일지라도,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우리의 초자연적인 기쁨을 그들이 함께 나누도록 도와주는 행복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 성인은 성모 마리아께서 하신 놀라운 말씀들을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성모님은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일꾼들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요한 2,5) 그것이 성모님 말씀의 전부였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뵙고 “주님,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하고 묻도록 하신 것뿐입니다.

저는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일반적인 그리스도교적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사도직이란 거대한 가르침의 과업입니다. 여러분은 실제적이고 개인적이며 충실한 사귐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하느님을 향한 갈망을 심어줘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새로운 지평을 발견할 수 있도록 자연스러우면서도 솔직하게 도와줘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신앙을 살아내는 여러분의 본보기를 통해, 거룩한 진실의 힘이 넘치는 사랑의 언어를 통해 그 일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대담해지십시오! 사도들의 모후이신 성모님의 도움에 의지하십시오. 성모님은 결코 우리의 어머니 되심을 그만두지 않으실 것이므로 당신 자녀들 한사람 한사람이 자신의 임무와 마주하도록 해주실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에게 다가와 당신의 삶을 묵상하는 이들에게 항상 크나큰 호의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들을 주님의 십자가로 이끌어 주시고 성자의 모범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곳에 데려가 주십니다. 이러한 만남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정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행동이 여러분과 저처럼 더 젊은 형제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맏아들과 화해를 이루도록 전구(轉求)해주십니다.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스스로를 온전히 당신께 내어드리려는 수많은 회개와 결심들 이전에 성모님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찾고, 변화를 열망하며, 새로운 삶에 나서도록 북돋워주십니다. 그리하여 성모님께서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당부하신 “무엇이든지 그(예수님)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요한 2,5) 라는 말씀이 우리들의 실제적인 헌신과 그리스도교의 성소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성모님의 말씀은 우리의 모든 개인적 삶을 밝혀주십니다.

주님 앞에서 나누신 성모님의 이 대화는 우리의 신앙에 진정 새로운 활력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 대화에서 우리는 주님의 어머니이자 우리의 어머니이신 분께 대한 공경과 사랑에 관해 생각하게 됐습니다. 5월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 대한 사랑을 키워갈 수 있는 기회를 우리가 잘 이용하길 원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과 우리의 만남을 통해서 말입니다. 일상의 작은 일과 작은 배려들을 통해 당신 자녀인 우리가 성모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성모님께 보여드리도록 애씁시다. 우리의 거룩함과 우리의 사도직이 무언가를 실제로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드립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주시는 구원사업에 기여하기 위해 우리가 쉼 없이 노력하고 있음을 성모님께서 보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성모 마리아, 저희의 희망, 하느님의 종, 상지(上智)의 옥좌(玉座) 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Sancta Maria, spes nostra, ancilla Domini, sedes Sapientiae, ora pro nobis!)

그리스도께서 가져다주신 평화 

그러나 우리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를 여러분께 말씀드리려 합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기 위해 열정을 다해서 분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확한 이유를 얘기하자면, 우리 인간이 진정 정의로워지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이 맺는 관계들이 증오와 무관심이 아닌 사랑에 의해 영감을 받으려면 너무 먼 길을 가야 하는 까닭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깨우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설사 우리가 부의 합리적 분배와 조화로운 사회조직을 이루어낸다 하더라도 여전히 세상에는 병마와 오해, 고독, 사랑하는 이의 죽음, 그리고 우리들 자신의 한계를 절감(切感)해야 하는 고통들이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고통의 무게와 마주 서서 그리스도인이 찾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진정한 해답, 유일하고 결정적인 답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모두를 사랑하셔서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신 하느님입니다. 창에 찔린 채 당신의 성심을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불의를 미워하시며 불의를 저지른 이들을 꾸짖으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개개인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불의가 발생하도록 그냥 두셨습니다. 왜냐하면 불의는 원죄의 결과로서 인간 조건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성심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우리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간절히 정의를 바라는 배고픔과 갈증… 그분은 이 모든 아픔들을 십자가를 통해 당신 홀로 온전히 짊어지셨습니다.

고통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우선 모든 인간의 삶에서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아픔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신 소명입니다. 여러분께 숨기지 않겠습니다. 제 인생에도 자주 아픔이 있었고, 몇 번이고 정말로 울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얘기를 여러분께 기쁘게 말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만나야 한다는 진리를 항상 강론해왔고, 또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평소에 불의와 악(惡)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런 열망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상황을 치유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과도 맞서 싸워왔습니다.

고통에 관해 얘기할 때 단순히 이론만 말씀드리고 있지 않습니다. 고통과 맞닥뜨려서 여러분의 영혼이 흔들린다고 느낀다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최선의 치유책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릴 때 저는 다른 사람의 경험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갈바리아산의 수난 장면은, 고통은 거룩하게 변모해야 하며 우리는 십자가와 하나 되어 살아야 한다는 진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려움을 참고 견딘다면, 그 어려움은 속죄(贖罪)와 배상(賠償)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 어려움은 또한 예수님의 운명과 그분의 생명을 우리가 함께 나누도록 해줍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분은 인간의 모든 고통과 고뇌를 스스로 기꺼이 겪어내셨습니다. 그분은 가난하게 태어나고, 생활하고,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공격받고, 모욕당하고, 헐뜯기고, 중상모략에 걸리고, 부당하게 비난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이 당신을 배신하고 버릴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고독을 실감했고 형벌과 죽음의 고통을 체험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동료들과 함께, 그리고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고통받고 계십니다. 인류의 머리이자 맏이이시며 구원자이신 그분께서 같이 아파하고 계신 것입니다.

고통은 하느님 계획의 일부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해하긴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도 수난을 견디기 힘드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루카 22,42)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간청하며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십자가에 매단 이들을 용서하시면서 묵묵히 죽음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이처럼 고통을 초자연적으로 받아들이며 그분은 가장 위대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가져오십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가져야 할 자세는 닥쳐올 비극적 운명에 대한 체념이 아니라, 승리를 예감한 사람의 성취감입니다. 승리하신 그리스도 사랑의 이름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 나아가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통해 평화와 기쁨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우리는 악과 불의와 죄에 맞서 평화의 투쟁을 벌여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현재 처해 있는 형편이 결코 확정된 상태가 아님을 공표해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성심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만이 인간의 영광스러운 영적 승리를 얻게 해줄 것입니다.

조용한 희생의 신비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당신 어머니를 찬미하신 것이 진실이라면, 성모님의 고통, 그리고 노동이나 믿음의 시험으로 인한 그분의 괴로움을 경감해 주시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똑같이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마을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예수님께 소리쳤습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카 11,27-28) 이는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소서” (루카 1,38)라고 하며 순명하신 어머니께 대한 찬사였던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신 당신 말씀을 진정으로 아낌없이 살아내셨으며, 그에 따른 모든 결과들이 이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결코 화려하게 사시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루하루를 숨어서 말없이 희생하며 지내셨습니다.

이러한 진실들을 묵상해보면, 우리는 하느님의 논리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네 삶의 초자연적인 가치는 어마어마한 과업을 성취하는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과업이 엄청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들 스스로의 지나친 상상 때문입니다. 오히려 매일매일의 일상적이고 사소한 희생의 기회들을 아낌없이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삶의 초자연적 가치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품어 안음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처럼 되기 위해서, 거룩하게 되기 위해 우리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처지들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겉으로는 가치 없어 보이는 것들을 거룩하게 만들어가는 그런 사람이 돼야 합니다. 그렇게 시작해야 하는 것이지요. 성모 마리아께서 바로 그렇게 사셨습니다. 성모님은 은총으로 가득하셨고,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분이며, 모든 천사와 성인들보다 높은 곳에서 찬미 받으시는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평범한 삶을 사셨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우리와 똑같이 창조되신 분입니다. 고통과 슬픔, 그리고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는 우리와 같은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가브리엘 대천사로부터 하느님의 계획을 들으시기 전까지는 당신이 태초부터 구세주의 어머니로 선택됐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셨습니다. 성모님은 당신 자신을 미천한 피조물로 여기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참으로 겸손하게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다” (루카 1,49)라고 인정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순결하심과 겸손하심, 그리고 관대하심은 우리들의 가증스럽고 이기적인 모습과 확연히 대비됩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가 깨닫는 만큼 성모님을 닮겠다는 마음이 들어야 합니다. 우리들 또한 하느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만약 우리가 성모님의 충실하심을 본받기 위해 분투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우리 안에서 큰일을 하실 것입니다. 우리들의 미소함은 장애물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미소한 것들을 선택하심으로써 당신 사랑의 권능이 더욱 드러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 닮기 

우리의 어머니는 하느님 은총에 응답하는 본보기와 같은 분이십니다. 만약 우리가 성모님의 삶을 깊이 묵상한다면, 일상에서의 우리 존재를 거룩하게 하는 데 필요한 빛을 주님께서 내려주실 것입니다. 성모님께 봉헌된 축일들과 또 다른 날들을 기념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동정 마리아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우리가 처한 상황에 놓이셨다면 어떻게 행동하셨을까 상상해봅시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쓰며 그 순간들을 잘 활용한다면, 우리는 꾸준히 성장해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마치 아이들이 그들의 어머니를 닮듯이 우리도 성모님의 자녀로서 그분을 닮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성모님의 사랑을 닮읍시다. 사랑이란 그저 좋은 느낌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을 베풀려면 우리의 대화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행동에서 그 길을 찾아야 합니다. 동정 성모님께서는 단순히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께서는 삶의 모든 순간에서 확고하면서도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을 하셨고 이를 수행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래야만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게 될 때,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온전히 다 바쳐서 그분께 성실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진실로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자연스러우면서도 초자연적인 품위를 닮아야만 합니다. 그분은 구원의 역사에서 특별한 권한을 부여받은 피조물이십니다. 왜냐하면 성모 마리아로 인하여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기” (요한 1,14)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자신을 드러내시지 않는 조용한 증인입니다. 당신 자신의 영광을 좇지 않으므로 칭찬받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당신의 어린 아드님을 둘러싼 신비에 언제나 함께하셨지만, 그러한 신비들은 말하자면 ‘평범한’ 신비입니다. 거대한 기적들이 일어나고 군중이 놀라 환호할 때 그분은 어디에서도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작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왕으로 추앙받으셨을 때 우리는 마리아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도망가 버린 뒤 성모님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십자가 곁에 다시 나타나십니다. 성모님의 이러한 행동방식은 그분 개인의 위대함과 심오함, 그리고 영혼의 성스러움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 순명하는 그분의 모범에 따라 우리는 맹종하지 않으면서도 섬세하게 하느님을 섬기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에게서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복종하는 어리석은 처녀의 태도를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주의 깊게 경청하며 자신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관해 물어보십니다. 그러고 나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온전히 헌신하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38)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복되신 동정녀, 모든 우리 행동의 스승께서는 여기서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느님께 순명하는 것은 굽신거리는 게 아니며, 우리 양심을 멀찍이 돌아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내적으로 깊이 감화되어야만 하고, 그럼으로써 하느님 자녀로서의 자유를 발견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