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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성령 → 성령강림 항이 있음.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삶으로 부르십니다 

우리는 갈바리아산의 그 드라마를 다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감히 설명하건대, 예수님께서 죽으신 갈바리아산의 그 드라마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거행된 최초의 미사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죽음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신 예수님은 당신에게 사형선고로 내려진 십자가를 껴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희생은 당신 아버지에 의해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희생의 결과로 성령께서 인류에게 강림하신 것입니다.

수난의 비극은 우리의 삶과 전체 인류의 역사에 성취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성주간이 단순한 기념시기가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성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우리 영혼 안에서 끊임없이 활동하는 그 무엇인가로 여기고 묵상하는 시기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제2의 그리스도이자, 그리스도 자신(alter Christus, ipse Christus)이 되어야 합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 모두는 우리 삶의 사제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1베드 2,5) 사제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순명을 드러낼 수 있으며, 따라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사명을 우리가 계속 이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곧바로 우리 자신의 비참함과 개인적인 타락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 때문에 낙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비관주의자가 되어선 안 되며, 우리의 이상을 버려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처한 현재의 상황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당신의 삶을 더불어 나눔으로써 우리 삶이 거룩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요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곧잘 ‘거룩함’이란 헛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거룩함이란 결코 성취할 수 없는 것이고, 왠지 수덕신학(修德神學)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 거룩함은 실질적인 목표도, 살아있는 실재(實在)도 아닙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서로를 설명할 때 “성도(聖徒)”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모든 성도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로마 16,15)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사는 모든 성도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필리 4,21)

지금 갈바리아산을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지만 그분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나타내는 표식은 아직 없습니다. 성금요일은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살기를 원하는지, 진정 거룩하게 되길 원하는지 성찰하기에 좋은 시기입니다. 그리고 신앙을 행동에 옮김으로써 우리의 연약함에 맞설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으며 우리가 매일 하는 일에 사랑을 쏟겠다고 결심할 수 있습니다. 죄의 체험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성장해야 합니다. 또한 더욱 충실해지고 진정으로 우리 주님과 하나가 되겠다고 더 깊이 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주님의 사도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주신 사제로서의 사명을 꾸준히 수행해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들 각자에게 주신 사제의 사명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도록 격려하기 때문입니다.

빵과 말씀 안에 계신 그리스도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비를 묵상하는 법을 배워서 그분을 분명하게 알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영육 간에 예수님께 매우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우리에게 오시는 길을 명확히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성체의 양식을 받아먹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가르침을 알고 실천함으로써 생명의 빵 안에서, 그리고 말씀 안에서 그분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 안에서 그분을 만나 친교를 맺는 것처럼 말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요한 6,55-56)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요한 14,21)

이 말씀은 결코 단순한 약속이 아닙니다. 참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며, 진실된 삶의 정수입니다.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개인적이고도 직접적으로 하느님과 친교를 맺게 해주는 은총의 삶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요한 15,10)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승천의 날을 알리는 최상의 예고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가셔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승천 직후에 새로운 하느님의 사랑이 강림하셔서 신비한 방법으로 복되신 삼위일체의 제3위격이신 성령의 현존(現存)을 불러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요한 16,7)

예수님은 가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인도하고 거룩하게 해주십니다.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활동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이라는 그리스도의 선언을 확인하게 해줍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로마 8,15)

아시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는 복되신 삼위일체의 활동인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생명의 빵 안에서, 말씀 안에서, 성체와 기도 안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해주시는 은총에 화답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인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계시는 분이니까요. 교회는, 빵이 실제로 살아계심을 매일매일 우리가 기억하게 합니다. 그리고 전례력상의 또 다른 이틀, 즉 ‘성목요일’과 ‘성체 성혈 대축일’을 기념하여 중요한 축일로 제정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에 우리는 주님과 대화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읍시다.

우리는 방금 사도행전에서 ‘성령 강림 대축일’에 관해 읽었습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은 성령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오신 날입니다. 오늘 독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위대하신 권능이 드러나는 현장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그 하느님의 권능으로 교회의 삶이 온 세상에 전파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순명하심으로써 스스로 십자가의 제물이 되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승리하셨습니다. 죽음과 죄를 이기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승리는 여기 거룩한 광채 안에서 눈부시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증언했던 제자들은 성령의 기운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새로운 빛에 한껏 열렸습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따랐고 그분의 가르침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그들이 항상 완벽하게 이해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실 ‘진리의 영’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오직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그분을 위해 자신들의 생명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나약했습니다. 그래서 시련의 순간에 주님을 홀로 두고 도망쳤던 것입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에 벌어진 모든 일들은 이미 지나가 다시 올 수 없는 사건입니다. 굳센 영이신 성령께서 제자들을 확고하고 강하며 용감하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사도들이 전하는 말씀이 예루살렘 거리에 강렬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세상 곳곳으로부터 예루살렘에 온 남녀들이 놀라움에 가득 차 사도들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파프티아 사람, 메디아 사람, 엘람 사람,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와 아시아 주민, 프리기아와 팜필리아와 이집트 주민, 키레네 부근 리비아의 여러 지방 주민, 여기에 머무르는 로마인,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 그리고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 (사도 2, 9-11) 자신들의 눈앞에서 이토록 경이로운 일이 벌어지자 사도들의 강론을 경청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제자들에게 강림하신 바로 그 성령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신앙으로 이끄신 것입니다.

루카 성인에 따르면, 베드로 성인이 말씀하시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하자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고 합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사도 2, 37-38) 성경에 의하면 그날 3천 명가량이 교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에 일어난 성령의 장엄한 강림은 결코 별도로 동떨어진 사건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성령과 그분의 활동에 관해 언급하지 않은 부분을 찾기 어렵습니다. 성령께서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든 생활과 생계 활동을 인도하고, 갈 길을 정해주고, 활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베드로 성인의 강론에 영감을 주신 분도, 사도들의 믿음을 강하게 해주신 분도, 당신의 현존을 통해 이방인에 대한 부르심을 확신하게 해준 분도,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를 먼 나라에 보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새로운 길을 열게 하신 분도 바로 성령이십니다. 한마디로 말해 성령은 항상 존재하시며 그분의 가르침은 어디에나 계신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심오한 사실들은 결코 지나간 과거의 기억이 아닙니다. 이미 역사 속에 묻혀버린 교회의 황금기에 대한 추억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죄와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기록된 사실들은 오늘날 교회의 실재(實在)인 동시에 모든 시대를 아우르는 교회의 현실(現實)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요한 14, 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영원하신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기 위해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힘과 권능이 이 땅을 환하게 밝히셨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영원히 엄존(儼存)하십니다. 때문에 교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선함을 선포함으로써 언제나 모든 일에서 온 세상 민족들 앞에 우뚝 선 표징이 될 것입니다. 너무도 엄청난 인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확신과 기쁨에 차서 하늘을 우러러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교회 안에 현존하며 활동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맛보게 해주십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려고 하시는 참 기쁨과 평화를 알게 해주십니다.

‘성령 강림 때 베드로에게 왔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가지셨으며,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생명을 더불어 나누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세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일러줍니다.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성령을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따라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티토 3, 5-7)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나약함과 실패를 실감합니다. 또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몇몇 사람들의 편협함과 비열함을 아프게 깨닫습니다. 아울러 사도직의 몇몇 과업들이 명백한 실패이거나 목적을 상실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죄의 실상(實狀)과 인간의 한계를 일깨워주는 이 모든 것들이 여전히 우리들 신앙의 시련일 수 있습니다. 숱한 유혹과 의혹들이 우리로 하여금 ‘대체 어디에 하느님의 힘과 권능이 있느냐?’고 묻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 우리는 더욱 선명한 순결함과 굳건함으로 희망의 덕을 구현함과 동시에, 보다 더 충실해지고자 분투함으로써 그에 대항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현실적인 삶은 숱한 한계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우리 안에 죄는 여전히 어느 정도 남아 있습니다. 그래도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온전히 자유롭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 하느님 자녀가 된 풍요로움을 명확히 감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버지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기쁨이 전혀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될 때에도 역시 하느님의 자녀된 풍요를 느낍니다. 아무도 우리의 희망을 빼앗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동시에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감탄하며 바라볼 수 있으며, 창조의 풍성함과 선함의 진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마음이 지음 받은 그대로의 강인함과 순수함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죄로 인한 슬픔이 고통스러운 절망이나 오만함으로 악화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슬픔과 자각은 우리 스스로 다시 한번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동참하게 하며 다른 사람들과 우리의 연대를 더욱 깊이 실감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삶에서 성령의 확실한 힘을 체험합니다. 우리들 자신의 실패가 더 이상 우리를 낙담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시작을 위한 초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삶의 모든 순간에 언제나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충실한 증거자가 되도록 우리를 이끄는 초대인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개별적인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런 단계에 이르면 우리의 개인적인 나약함은 더 이상 우리 영혼을 동요시키지 않는 작은 결점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약점들이 심각한 죄가 되는 경우라 할지라도, 진정한 회개의 슬픔으로 고해성사를 드린다면 우리는 하느님과의 평화를 회복하고 다시금 당신 자비의 선한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도록 한다면 우리의 믿음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풍요로움을 하나로 집약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다음과 같은 얘기로 오늘 강론을 끝낼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 전례에서 부르는 찬미가 중 한 대목을 소리 높여 부릅시다. 마치 온 교회가 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간구하는 기도의 메아리처럼 말입니다. “임하소서, 성령이여! 창조주여 임하소서. 당신께 속한 이들 마음에 오셔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창조한 마음들을 채우소서… 당신을 통해 성부를 알고 성자도 알게 되었으니, 당신을 믿게 하소서. 성령께서는 영원히 성부와 성자로부터 오시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