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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성령 → 성령을 대하기 항이 있음.

그리스도인의 삶 안에서 거룩한 미사 

거룩한 미사는 우리들 신앙의 신비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신비를 마주하게 해줍니다. 왜냐하면 미사는 복되신 삼위일체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사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영성적 삶의 중심이요, 원천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미사는 모든 성사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은총의 삶에 들어섰습니다. 그 은총의 삶은 견진성사를 통해 커지고 굳세어집니다. 그리고 미사 안에서 충만하게 자라납니다. 예루살렘의 치릴로 성인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성체성사에 참여할 때 우리는 성령의 거룩한 활동으로 인해 영적인 사람이 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더불어 나누게 해주십니다. 세례성사에서 그런 것처럼요. 그뿐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으로 우리를 이끌어, 우리가 온전히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성령의 강림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해주십니다. 또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십니다. 사랑이신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이 애덕(愛德)에 흠뻑 젖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consummati in unum. 요한 17, 23) 해주십니다. 그렇게 하나가 된 우리 자신은, 사람들 속에서 우리에게 성체가 해주시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말씀대로 “일치의 표징이자 사랑의 끈”이 되는 것입니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미사를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죠. 그런 신자들에게 미사는 사회적 관습까지는 아닐지라도 순전히 외적인 의식(儀式)입니다. 우리의 빈약한 마음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을 판에 박힌 일상의 일처럼 대할 수 있는 이상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미사를 단순히 외적인 의식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봉헌하고 있는 이 미사에서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현존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거듭 말씀드립니다. 이 위대한 사랑에 응답하기 위해 우리는 영육 간에 우리들 자신을 온전히 내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 말씀드리며, 그분을 보고, 그분을 음미합니다. 우리의 언어로는 부족할 때 우리는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의 혀가 주님의 위대하심을 온 인류에 선포하도록 재촉하며 ‘찬미하라, 내 혀야(Pange, lingua!)’라고 노래합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심오한 사실들은 결코 지나간 과거의 기억이 아닙니다. 이미 역사 속에 묻혀버린 교회의 황금기에 대한 추억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죄와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기록된 사실들은 오늘날 교회의 실재(實在)인 동시에 모든 시대를 아우르는 교회의 현실(現實)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요한 14, 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영원하신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기 위해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힘과 권능이 이 땅을 환하게 밝히셨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영원히 엄존(儼存)하십니다. 때문에 교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선함을 선포함으로써 언제나 모든 일에서 온 세상 민족들 앞에 우뚝 선 표징이 될 것입니다. 너무도 엄청난 인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확신과 기쁨에 차서 하늘을 우러러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교회 안에 현존하며 활동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맛보게 해주십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려고 하시는 참 기쁨과 평화를 알게 해주십니다.

‘성령 강림 때 베드로에게 왔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가지셨으며,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생명을 더불어 나누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세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일러줍니다.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성령을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따라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티토 3, 5-7)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나약함과 실패를 실감합니다. 또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몇몇 사람들의 편협함과 비열함을 아프게 깨닫습니다. 아울러 사도직의 몇몇 과업들이 명백한 실패이거나 목적을 상실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죄의 실상(實狀)과 인간의 한계를 일깨워주는 이 모든 것들이 여전히 우리들 신앙의 시련일 수 있습니다. 숱한 유혹과 의혹들이 우리로 하여금 ‘대체 어디에 하느님의 힘과 권능이 있느냐?’고 묻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 우리는 더욱 선명한 순결함과 굳건함으로 희망의 덕을 구현함과 동시에, 보다 더 충실해지고자 분투함으로써 그에 대항해야 합니다.

그들이 어디에 있든, 한창 잘 나가는 순간을 살고 있든, 아니면 위기와 좌절의 순간에 있든 간에,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베드로 성인이 성령 강림 이후에 말했던 장엄하고도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주춧돌이자 구원자이시며 우리 삶의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사도 4,12)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들 가운데 아주 특별하게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고 저는 곧잘 얘기해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혜의 선물입니다. 지혜의 선물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알게 하고 그분의 현존하심에 기뻐하게 해줍니다. 그로 인해 지혜의 선물은 우리에게 하나의 관점(觀點)을 부여합니다. 우리는 그 관점을 통해 우리가 처한 상황과 우리 삶의 여러 사건들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우리네 신앙은 변함없이 굳세게 일관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며 세상과 그 역사를 묵상할 때 우리 주님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느낌과 똑같은 감정을 우리 가슴 속에 반드시 갖게 되어야 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마태 9,36)

그리스도인은 인간성 안에 숨 쉬는 모든 선한 것들을 무시해선 안 됩니다. 그 건강한 기쁨을 인정하거나 인간적인 열정과 이상에 함께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가 세상에서 발견하는 모든 선한 것들과 조화를 이루며 행동할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배려심으로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인간 정신의 깊이와 풍부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의 정신을 약화시키거나 인간 영혼의 고귀한 충동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진실되고 진정한 의미를 자각하고 실현함으로써 그러한 특성들을 더욱 성장시킵니다. 우리는 대중적인 행복만을 추구하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당신이 사셨던 삶의 친밀함에 깊이 스며들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또한 같은 하느님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알고 사랑하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아울러 세 위격을 가지신, 한 분이신 하느님의 같은 사랑 안에서 천사들과 모든 인류를 사랑하도록 불림 받았습니다.

인간 본성의 가치와 존엄함을 선포하는 것은 그리스도 신앙의 대담한 모습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느님 자녀의 존엄함을 성취하기 위해 창조됐다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엄청나게 대담한 특징입니다. 그러한 확신은 우리를 초자연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려주는 은총을 통해 가능합니다. 만약 그리스도교 신앙이 구원의 약속 위에 세워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정말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담한 일이었겠지요. 그런데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신 이 구원의 약속은 그리스도의 피로 확증됐으며 성령의 지속적인 활동에 의해 다시금 확인되고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고, 신앙 안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동방 교회의 위대한 박사들 중 한 명이 다음과 같이 설명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신앙 안에서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투명한 물질이 한 줄기 빛을 받아 광채를 발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령에 의해 태어나 밝게 빛나게 된 영혼은 스스로 영적(靈的)이 되며, 은총의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리웁니다. 성령으로부터 미래에 일어날 여러 사건들에 대한 지혜가 오며, 신비를 이해하게 되고, 은총 주심과 천국의 시민됨, 그리고 천사와의 대화 등과 같은 숨겨진 진실들을 깨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기쁨이 찾아오며, 성령으로 인해 하느님 안에서 인내하고 하느님을 좋아하게 되며, 우리의 상상이 미치는 가장 고귀한 상태에 이르러 하느님과 같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 존엄성의 위대함을 깨우치는 것은 겸손한 마음과 더불어 우리 안에 하나의 태도로 자리잡습니다. 그 존엄성이 주님의 은총을 받아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 자녀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진정으로 엄청난 사실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에게 생명을 준 것은 우리들 자신의 힘이 아니며 바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이는 참으로 잊어선 안 되는 진실입니다. 만약 그 진리를 잊어버린다면, 우리 삶을 거룩하게 하는 일은 왜곡되어 주제넘는 오만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적 삶이 곧 무너져내릴 것이고, 그때 영혼은 스스로의 나약함과 비천함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묻습니다. “내가 거룩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요? 만약 내가 말하는 ‘거룩함’이 ‘나는 거룩함을 지니고 다니지만, 나를 거룩하게 만들어 줄 어느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라면, 저는 거짓말쟁이에다가 자만심으로 가득 찬 인간일 것입니다. 하지만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레위기 말씀처럼 ‘거룩함’이란 말을 ‘거룩하게 된 누군가’로 이해한다면, 저는 감히 제가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온 몸이 땅 끝에 사는 마지막 사람까지 드리워져 그 몸의 머리와 그 분 아래서 저도 함께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

복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제3위격이신 성령을 사랑합시다. 여러분은 성령으로부터 격려나 비판의 거룩한 울림을 받습니다. 여러분 존재의 친밀함 속에서 그 거룩한 울림에 귀를 기울입시다. 여러분의 영혼에 쏟아진 그 빛을 받으며 이 세상을 걸어갑시다. 그러면 희망의 하느님께서 우리를 완벽한 평화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께서 주신 희망이 성령의 권능으로 우리 안에서 매일매일 더욱더 크게 자라날 것입니다.

성령 알아차리기 

성령의 뜻에 따라 산다는 것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곧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서 소유하셔서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고 우리를 더욱더 당신과 닮게 만들어주시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성숙하고 심오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코 멋대로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자라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간결하지만 의미심장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사도 2,42)

이것이 바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살았던 방식이며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네 신앙의 가르침이 우리의 일부분이 될 때까지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체 안에서 우리 주님을 받아 모시고, 기도 안에서 주님과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며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저지른 비인간적인 행동을 감추려 들지 말고 주님과 마주 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의 방식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태도의 가장 본질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아마도 몇 가지의 장점은 갖게 될 것입니다. 해박하게 사고하는 능력, 어느 정도 치열한 활동, 일정 수준의 실천과 헌신 같은 것들 말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영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로 일치하지 않고, 그분의 구원사업에 동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류 그리스도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복음의 단순화된 버전만을 실천하는 의무를 가진 그리스도인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비록 각자 받은 영적 은사와 서로가 처한 인간적 상황들이 엄청나게 다양하지만, 오직 하나의 믿음, 하나의 희망, 하나의 사랑만이 있을 뿐입니다. 바로 그 하느님의 선물을 나눠주시는 분은 한 분이신 성령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던졌던 질문을 우리들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1코린 3,16) 우리는 이 말씀을, 더욱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하느님을 대하도록 우리가 초대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행히도 어떤 사람들에겐 성령은 아주 낯선 분이고 어마어마한 미지의 존재입니다. 하지만 성령은 단순히 이름뿐인 존재가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 안에 계신 세 위격 중 한 분이시며, 우리가 함께 얘기할 수 있고 그분의 삶을 우리가 더불어 살 수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교회 전례 안에서 우리가 배운 대로 우리는 단순하게 그리고 신뢰하며 성령을 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주님을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됐을 때 우리에게 주어진 엄청난 특권을 더욱 확실히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제가 앞에서 언급했던 ‘거룩하게 됨’의 위대함과 진리를 모두 알게 될 것입니다. ‘거룩하게 됨’이란 하느님 당신의 생명 안에서 더불어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거룩한 실체들을 그려 넣는 예술가가 아닙니다. 자신에게도 생소한 듯한 그림을 그리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과 닮아가도록 이끄시는 성령의 방식이 결코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당신 자신이 하느님인 동시에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입니다. 그분은 오히려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마음에 마치 밀납 위에 직인을 찍듯이 그분 자신의 인호를 박으십니다. 바로 이런 방법으로 성령께서는 당신의 생명과 당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범에 따라 우리의 본성을 회복하게 해주시고, 동시에 하느님과 닮은 모습을 인간에게 되돌려주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