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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은총 → 하느님의 은총의 성사 항이 있음.

거룩한 은총의 성사들 

진실로 투쟁을 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교 2천년 역사에서 절대 변하지 않은 유용한 방법을 써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이고, 고행이고, 또한 자주 성사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행도 역시 기도지요. 육신의 감각으로 드리는 기도니까요. 그래서 추려보면, 이 방법은 두 단어로 얘기할 수 있습니다. 기도와 성사입니다.

이제 성사(聖事)에 관해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성사는 하느님 은총의 근간입니다. 성사는 하느님의 사랑 넘치는 친절하심을 확인하는 경이로운 증거입니다. 트리엔트 공의회가 내린 교리의 정의를 조용히 묵상해봅시다. “성사란 은총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그 은총을 우리 눈앞에 가져다 놓고 선포하는 일종의 감각적인 징표이다.” 우리 주 하느님은 무한(無限)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다할 줄 모르며, 우리를 향한 그분의 온화함과 다정하심은 한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그리고 무상으로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일곱 개의 효과적인 징표를 세우셨습니다. 그 일곱 가지 징표(칠성사)는 안정감 넘치고 간단하며 쉬운 방법으로 인간이 구원의 공로를 나눌 수 있게 해줍니다.

만약 성사를 포기한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특히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사에 대해 잊은 듯이 보이며, 성사라고 하는 이 그리스도 은총의 흐름을 비웃기까지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른바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이러한 상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니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우리는 말해야만 합니다.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 우리가 더욱 감사하고 사랑하면서, 이들 성사의 원천에 다가서도록 용기를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조금도 느끼지 않고 갓 태어난 자녀의 세례를 미루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정의와 사랑에 심각하게 맞서게 됩니다. 세례를 미루는 것은 신앙의 은총을 자녀들에게서 빼앗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원죄로 얼룩진 세상에 태어난 한 영혼 안에 깃들어 계신 복된 삼위일체의 엄청난 보물을 앗아가는 까닭입니다. 아울러 그들은 견진성사의 참된 본질도 바꾸려 듭니다. 거룩한 성전(聖傳)은 이견 없이 견진성사를 영적 삶을 굳세게 해주는 성사로 받아들입니다. 견진성사는 더욱 많은 초자연적인 힘을 영혼에 부여합니다. 조용하면서도 풍요로운 성령의 강림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군대(milites Christi)’답게 싸울 수 있게 해줍니다. 그 싸움은 이기심과 온갖 유혹에 맞서는 스스로의 은밀한 전투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느님의 일에 대한 감수성을 잃어버린다면, 고해성사의 가치를 인정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고해성사는 인간과의 대화가 아닌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고해성사는 하느님 정의(正義)의 법원(法院)인 동시에, 특히 하느님 자비의 법원입니다. 그 법원에는 사랑 넘치는 재판관이 계셔서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에제 33,11)

우리 주님의 다정하심은 정말로 무한합니다. 그분이 당신의 자녀들을 얼마나 친절하게 대하시는지 보십시오. 그분은 결혼을 거룩한 결합으로 만드셨고, 그리스도와 당신 교회가 일치를 이루는 상징으로 삼으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 가정의 근간이 되는 위대한 성사로 만드셨습니다. 혼인성사로 이뤄진 그리스도인 가정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은 평화와 화합의 장소여야 하고, 또한 성덕(聖德)의 학교여야 합니다. 부모는 하느님의 협력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부모를 사랑해야 할 의무를 가집니다. 몇 년 전에 제가 썼던 것처럼, 부모를 사랑하라는 네 번째 계명을 십계명 중 가장 사랑 넘치는 계명으로 설명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거룩하게 결혼생활을 한다면, 여러분의 집은 평화와 기쁨 가득한 밝고 즐거운 가정이 될 것입니다.

성사의 경이로움에 관해 계속 묵상합시다. 종부성사라고 불리는 병자성사를 통해 우리는 아버지의 집에서 마무리되는 여정을 위한 사랑 가득한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과 더불어 당신 자신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체성사를 가리켜 ‘거룩함이 과대(過大)한 성사’라고까지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미사 동안만이 아니라, 실제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당신의 성체와 영으로, 당신의 성혈과 신성(神性)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사제가 지닌 책임에 관해 자주 생각합니다. 그 책임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성사의 거룩한 통로를 보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모든 영혼을 돕기 위해 오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특별한 개인적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영혼을 일괄적으로 논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개별적으로 돕지 않으면 인간의 존엄과 하느님의 자녀의 존엄을 해치게 됩니다. 이는 옳지 않은 일입니다. 사제는 각각의 영혼을 개별적으로 돕는 바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도구이자 운송 수단에 불과합니다. 사제가 이런 사실을 잘 알면 겸손해지고, 그런 겸손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영혼은 하나하나가 경이로운 보물이며, 모든 사람은 저마다 아주 특별하고 대체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우리들 한 명 한 명이 모두 그리스도께서 성혈을 흘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앞서 우리는 투쟁의 필요성에 관해 얘기했습니다. 하지만 투쟁을 하려면, 훈련과 적당한 몸관리, 그리고 아프거나 멍들거나 상처가 났을 때에 즉각적인 치료가 필요합니다. 성사는 교회가 제공해야 하는 중요한 치료입니다. 성사는 사치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진해서 성사를 포기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숨 쉴 공기와 혈액의 순환을 필요로 하듯이 우리는 성사를 필요로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매 순간 알아차릴 수 있는 빛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성사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금욕주의는 힘을 요구합니다. 그 힘은 창조주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어둠이고 그분은 밝은 빛입니다. 우리는 병약하고 그분은 강건하십니다. 우리는 가난하고 그분은 한없이 부유하십니다. 우리는 허약하고 그분은 그런 우리를 지탱해주십니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 (시편 18,2) 이 땅의 그 무엇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 성혈의 간절한 분출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는 우리의 눈을 가릴 수 있고,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은 은총의 원천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이 신자들의 의무입니다. 특히 하느님 백성들을 영적으로 관리하고 섬기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더욱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