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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은총 → 은총에 상응함 항이 있음.

하느님께 드리는 응답 

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는 하느님 자비의 보호 아래 성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항상 마음에 새기고 하느님 자녀답게 행동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부르심이 확실히 뿌리내리게 하는 주요한 방법으로 무엇이 있을까요? 오늘 저는 그 가운데 두 가지를 제시하고자 하는데,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데 있어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나는 ‘내적 생활’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신앙에 대해 깊이 알게 해주는 ‘교리교육’입니다.

먼저 ‘내적 생활’에 관해 말씀드리면, 사실 이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정말로 드뭅니다. ‘내적 생활’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아마도 어두운 성전 같은 것을 상상할 것입니다. 저는 25년 넘게 ‘내적 생활’이란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줄곧 이야기해왔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의 ‘내적 생활’입니다. 왁자지껄한 도시에서, 대낮의 햇빛 속에서, 거리에서, 일터에서 늘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 가족과 함께 있거나 잠깐의 휴식을 취하며 살아가는 보통 그리스도인들의 ‘내적 생활’ 말입니다. 그들은 온종일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내적 생활’이란 지속적인 기도 생활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은 기도의 필요성을 진정 찾지 못했나요? 여러분을 거룩하게 이끄시는 하느님과의 친교로 나아가고픈 절실함이 없는 건가요? 바로 그것이 ‘항상 기도하는 사람들’이 이해했던 그리스도인의 신앙입니다. 이와 관련해 교부(敎父)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것을 인간이 사랑함으로써 인간이 하느님이 된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고, 우리 아버지이시며 우리를 위해 실제로 염려하시는 그분께 감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비록 감정의 문제는 아니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마치 영혼에 새겨진 자국처럼 조금씩 조금씩 우리에게 느껴집니다. 사랑을 다해 우리를 쫓아오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묵시 3,20). 여러분의 기도생활은 어떻습니까? 때때로 낮 동안에 그리스도와 더 길게 이야기하고픈 충동을 느끼지 않나요? ‘제가 나중에 모든 것을 털어놓을게요.’라고 하면서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는 대화를 그분과 나누고 싶지 않나요?

우리 주님과의 만남을 위해 특별히 예비된 이 기도 시간에 가슴은 넓어지고, 의지는 굳세어지며, 주님 은총에 힘입어 우리 마음속 인간의 현실세계를 초자연적인 내용으로 가득 채우게 됩니다. 그 결과 여러분의 행동을 개선하고 모든 사람들과 더욱 사랑 넘치는 관계를 맺으며, 사랑과 평화를 향한 그리스도교의 투쟁을 위해 마치 훌륭한 운동선수인 것처럼 마지막 힘까지 남김없이 쏟아내겠다는 명확하고도 실제적인 결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는 우리네 심장의 고동처럼, 우리의 맥박처럼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집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확인하지 않는다면, ‘관상생활(觀想生活)’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관상생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의 과업은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으려는 건물이 주님의 집이 아니라면 집 짓는 사람들의 수고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용서의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2코린 6,1) 그렇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닫지 않는다면, 이 사순시기에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를 가득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선하게 해야 합니다. 참으로 변화를 원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하느님의 은총을 가지고 장난칠 수 없습니다.

저는 두려움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두려움이 아닌 하느님의 사랑에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드러났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인류와 피조물을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하지만 우리는 책임감에 대해, 진지함에 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우롱당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갈라 6,7). 라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결심해야 합니다. 성 미카엘 천사와 악마를 위해 두 개의 초에 모두 불을 밝히는 건 잘못된 일입니다. 악마를 위한 초는 꺼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온전히 주님을 섬기는 데 써야 합니다. 거룩함을 향한 우리의 열망이 진심이라면, 하느님의 손길에 우리 자신을 맡길 만큼 우리가 충분히 유순하다면,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당신의 은총을 우리에게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회개를 위한 은총,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네 삶에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주시는 은총입니다. 특히 이 사순시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사순시기를 매번 반복되는 전례력 상의 다른 시기들과 똑같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 시기는 아주 특별한 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거룩한 도움을 주시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순간은 예수님께서 우리 곁을 지나가시면서 우리가 한 걸음 크게 앞으로 내딛길 소망하시는 시기인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2코린 6,2) 우리는 다시 한번 착한 목자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분은 다정하게 우리를 부르십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이사 43,1) 착한 목자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용하는 친근한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다정하심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기다려주시고, 우리가 당신을 반드시 볼 수 있는 길가에 서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개별적으로 부르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만 아는 사실들에 관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물론, 우리만 아는 사실들이라 해도 모두 주님께 속한 것들이지만 말입니다. 그분은 우리 마음을 움직여 슬픔을 알게 하시고, 우리가 관대해지도록 우리 양심을 열어주시며, 우리 스스로 충실해지기를 바라게끔 격려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당신의 제자들이라고 불릴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친밀한 은총의 말씀을 들을 때, 애정 어린 나무람으로 오시는 그 은총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잊지 않으셨음을 단번에 깨닫습니다. 우리들 자신의 잘못 때문에 우리가 당신을 보지 않았던 그 모든 순간에도 주님은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당신의 마음속 그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2코린 6,2). 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계속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영광과 당신의 사랑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그 영광과 사랑을 제때에 여러분에게 주십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셨으니 여러분은 주님께 무엇을 드리겠습니까? 우리를 만나기 위해 오신 이 예수님의 사랑에 여러분은 어떻게 응답할 것이며, 저는 또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구원의 날이 여기, 여러분 앞에 와있습니다. 착한 목자의 부르심이 우리에게 이르렀습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이사 43,1) 사랑은 사랑으로 보답하는 법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1사무 3,9) 라고 응답해야 합니다. 저는 이 사순시기를 마치 바위 위에 떨어진 빗방울처럼 아무 흔적도 없이 흘려보내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이 사순시기가 제 안에 스며들어 저를 바꾸게 할 것입니다. 저는 변화할 것이며, 다시 한번 주님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사랑받기를 원하시는 그대로 주님을 사랑할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마태 22,37)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여러분 자신에 대한 사랑 말고 여러분의 가슴에 남은 구석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영혼에는요? 여러분의 마음에는요? 하느님께서는 ‘전부’를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을 만드신 그분께서는 여러분의 모든 것을 온전히 당신께 달라고 요구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관해 이렇게 확실히 알았다면, 우리는 이제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으로서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일꾼으로 내세웁니다.” (2코린 6,4).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여러분 자신을 내어드린다면,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영향이 여러분의 직업 활동에서, 여러분의 일터에서, 인간적인 일들을 거룩하게 하려는 여러분의 노력 안에서 분명히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 은총의 영향이 크건 작건 간에 말입니다. 사랑은 모든 일에 새로운 영역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란 사실을 이 사순시기 동안 절대로 잊지 맙시다. 사순 제1주일의 서간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곧 많이 견디어 내고, 환난과 재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겪으면서도 그렇게 합니다. 또 수고와 밤샘과 단식으로, 순수와 지식과 인내와 호의와 성령과 거짓 없는 사랑으로,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힘으로 그렇게 합니다.” (2코린 6,4-7)

우리가 날마다 살아가는 다양한 활동과 그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종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가 그분의 자녀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말입니다. 거룩한 뿌리가 우리 삶에 깊이 박혀 있음을 알고, 그에 합당하게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서간 말씀에 따라 우리는 행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 자체가 세상 한가운데서 평범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의 소명을 인정해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똑같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열정을 나누고, 인간 삶의 슬픔과 기쁨을 공유하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의 소명을 확인시켜 주는 까닭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 가는 길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요청하는 것은 여러분이 언제나 당신의 자녀이자 종으로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때만, 참으로 우리 스스로를 온전히 내어줄 때만, 이런 삶의 평범한 상황들이 거룩한 여정으로 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격한 언어를 곧잘 사용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고되게 살 것이며, 항상 긴장되고 위험한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우리가 멋지고 편안하게 신앙을 살아가려고 한다면, 그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는 일이 또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교의 삶의 방식은 인간 존재의 모든 고난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심오하고도 진지한 그리스도교의 삶의 방식이 번민과 억압, 두려움에 가득 찼다고 여기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실주의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지닌 초자연적이면서도 동시에 인간적인 사실주의는 그로 하여금 삶의 모든 측면들을 인정하도록 도와줍니다. 슬픔과 기쁨,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고통, 확신과 의심, 관대함과 이기심 등 모든 삶의 모습들을 인정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모든 것들을 겪어내며 인간적 성실함과 하느님께 받은 힘으로 이들에 맞섭니다.

하지만 강력한 적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현하려는 열망을 꺾으려는 적입니다. 그것은 바로 교만입니다. 매번 실패하고 패배하면서도, 우리를 도우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손길을 우리가 간구하지 않을 때 교만은 자라납니다. 그럴 경우 우리 영혼은 불행한 어둠의 그림자 속에 머물게 되며, 스스로 상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잘못된 상상이 사실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온갖 종류의 장애물을 만들어 냅니다. 조금만 겸손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사라져버릴 장애물들입니다. 하지만 영혼은 이따금 교만과 거친 상상에 고무되어서 스스로 고통스러운 갈바리아산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갈바리아산에 계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영혼이 어둠에 쌓여 불안에 떠는 때라 하더라도 기쁨과 평화가 언제나 우리 주님과 함께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성화(聖化)를 가로막는 위선적인 적이 또 하나 있습니다. ‘내적 투쟁이란 마치 불 뿜는 용과 맞서는 것처럼 엄청난 장애물들과 싸우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교만의 또 다른 표시입니다. 우리는 싸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싸움을 매우 시끄럽게, 나팔을 불어대듯 시끌벅적하게, 깃발을 흔들어대며 하고 싶어 합니다.

바위를 부서뜨리는 가장 무서운 적은 곡괭이나 그와 비슷한 도구가 아닙니다. 그것들이 아무리 날카롭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바위를 부수는 가장 무서운 적은 바위가 허물어질 때까지 그 갈라진 틈으로 한 방울씩 계속 떨어지는 물줄기입니다. 우리는 이를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가장 큰 위험은 내적 투쟁 중에 일어나는 작은 충돌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전투들을 자꾸 거부하다 보면 우리는 조금씩 물렁해지고 약해지고 무관심해져서 하느님의 목소리에 둔감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시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루카 16,10)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중요하지 않게 보이는 것들과도 끊임없이 투쟁하거라. 너희에게 중요하지 않게 보이는 것이 내게는 중요하다. 시간을 엄수해 너희 임무를 다하거라. 너희 마음에 슬픔이 있더라도 격려가 필요한 사람에게 미소 지어주거라. 필요한 만큼의 시간을 기도에 바쳐라. 옥신각신하지 말고 너희를 찾는 어느 누구에게나 도움을 주러 다가가거라. 정의를 실현하되 사랑의 은총으로 정의를 넘어서거라.”

매일 우리들 안에서 느껴지는 숱한 영감들이 있습니다. 작고 조용한 편지 같은 것이지요. 우리들 자신에게 이기기 위해 벌이는 초자연적인 경기에서 스스로를 극복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는 편지 말입니다. 하느님의 빛이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시기를 소망합니다. 당신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방향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길을 당신의 빛으로 비춰주소서. 우리의 투쟁을 도와주시고 우리가 이길 수 있도록 함께하여 주소서. 우리가 타락할 때에도 우리를 버리지 마시고 다시 일어나 싸울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결코 쉬엄쉬엄할 수 없는 싸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보다 넓은 전선(戰線)에서 매일매일 더욱 맹렬하게 싸우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을 극복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 전투의 유일한 목표는 천국의 영광에 도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이르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