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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하느님의 친구들»에 은총 → 은총에 상응함 항이 있음.

물론, 우리의 목표는 달성하기 어렵고 저 높은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거룩하게 태어나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맙시다. 거룩함은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응답이 서로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저술가 가운데 한 분은 하느님과의 일치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자라는 모든 것은 작게 시작합니다. 그것이 점차 크게 자라는 것은 꾸준히 계속해서 영양분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만일 철저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면, 비록 여러분이 종종 자기 자신을 극복하거나 나약한 몸으로 저 높은 곳에 계속 오르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주 세심한 부분까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성덕은 여러분의 노동과 일상 의무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행함으로써 얻을 수 있으며, 이것들은 거의 언제나 사소한 현실들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 그들은 뭍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요한 21,8). 그들은 그물을 끌고 오자마자 주님 발아래 놓았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영혼들은 하느님께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영혼들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구원을 선포하고 전달하는 교회의 사도직은 어떠한 인간의 특권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의 배반에 대한 참회의 기회를 세 번 주시는 듯이, 세 번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비참한 경험을 통하여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나약함을 인식하고는, 경솔하게 큰소리를 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 대신에 그리스도의 손에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5-17). 그리스도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17). ‘베드로야, 너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다!’ 그분께서 창조하셨고,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주님께서는 당신 피의 값으로 각각의 영혼을 모두 사셨습니다.

5세기에 도나투스파는 가톨릭 신자들을 조직적으로 공격할 때,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노는 예전에 큰 죄인이었으므로 진리를 선언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신앙의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라고 제안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는 가톨릭 교회의 주교입니다. 그는 자신의 짐을 짊어지고 있으며, 그것에 대하여 하느님께 설명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나는 좋은 사람들 가운데서 그를 만났습니다. 만일 그가 나쁜 사람이라면, 그는 그것을 알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좋은 사람일지라도, 내가 그 사람을 신뢰하는 이유는 그 사람 안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가톨릭 교회에서 배운 첫 번째는 어떠한 사람에게도 희망을 두지 말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도직을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직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것을 바라시고, 우리에게 명령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잘못은 우리의 것이고, 열매는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주님께 동화시키려는 노력은 네 단계, 곧 그분을 찾으려 하고, 발견하고, 알고, 사랑하는 단계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또렷하게 첫 번째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습니다. 애타게 그분을 찾으십시오. 온 힘을 다하여 여러분 자신 안에서 그분을 찾으십시오. 여러분이 결연한 마음으로 행동한다면, 제가 보증하건대, 여러분은 이미 그분을 발견하였으며, 그분을 알고 사랑하며 하늘에서 대화하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필리 3,20 참조).

우리 영혼 안에 하나의 고귀한 열망, 중요하고 참으로 가치 있는 유일한 열망, 곧 복되신 성모님과 요셉 성인처럼 어떠한 소홀함도 없이 간절한 마음과 극기로써 예수님 곁에 가까이 있고 싶은 열망을 키우려는 굳은 결심을 하도록 우리 주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내적 기도 안에서, 우리의 직업이나 사회적 의무들을 제대로 이행하는 가운데, 우리는 하느님의 친구가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는 방법을 명백하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신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시냇물을 그리워하는 암사슴처럼 달려 왔습니다(시편 42,2). 우리는 갈증에 시달리고, 입술은 바싹 말라 건조해졌습니다. 우리는 생명수의 원천에서 물을 마시고 싶습니다. 우리는 온종일 보잘것없는 일에 매달리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물이 풍성하게 솟는 맑은 샘을 향하여 움직입니다(요한 4,14 참조). 말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혀가 제대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성이 조용히 자랍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다만 봅니다! 그러면 영혼이 한 번 더 새로운 노래를 시작합니다. 온종일 하느님께서 자신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신다는 것을 느끼고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특별한 상황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틀림없이, 이것은 우리 영혼 안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상황일 것입니다. 이 열렬한 사랑은, 어떠한 소란이나 과장 없이 우리에게 고통을 견디며 사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마태 7,14)에 들어선 우리들은 얼마나 침착하고 평화로운가!

수덕 수련? 신비 신학? 사람들이 어떻게 부르건 상관없습니다. 수덕 수련이건 신비 신학이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것은 하느님 자비의 선물입니다. 여러분이 묵상하려고 노력하면, 하느님께서는 도움을 거절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믿음뿐 아니라 믿음의 행동도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알고 있었듯이, 그리고 저도 분명하게 이야기하였듯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날마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한 행동은 이미 관상이며 합일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살아야 하며, 비록 각자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세상 문제들의 한가운데서 각자의 영적 여정(수많은 종류의 여정이 있습니다)을 떠나기에 앞서서 갖추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한 기도와 행위 때문에 우리의 일상 활동이 지장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고상한 인간적 열정 속에서 주님께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온갖 염려와 일들을 하느님께 봉헌할 때, 그것들은 세상을 거룩하게 만듭니다. 만지는 것을 모두 금으로 바꾸었던 미다스 왕의 신화에 관하여 제가 얼마나 자주 이야기하였습니까! 우리는 비록 개인적으로 결함이 있지만, 우리가 만지는 것을 모두 초자연적 공로라는 금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