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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겸손 → 겸손과 그리스도인 성소 항이 있음.

새로운 전례주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미사의 입당송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시작과 밀접하게 연관된 ‘어떤 것’에 관해 깊이 생각하게 해줍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에게 주신 ‘부르심(聖召)’입니다. “주님, 당신의 길을 제게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제게 가르쳐 주소서.” (시편 25,4). 우리는 주님께 우리를 인도해달라고, 당신의 발자국을 보여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신 계명을 온전히 실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바랍니다. 그 계명은 곧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자 결심했을 것입니다.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상황들을 생각해봅시다. 저는 여러분이 저와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께 감사할 것이라고 여깁니다. 진심으로 겸손히 감사한다면 여러분은 더욱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어떤 내세울 만한 일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보통 우리는 어렸을 때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부모님으로부터 하느님께 기원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런 뒤에는 우리 주님께 대한 시선을 놓치지 않도록 우리의 선생님과 친구들, 지인들이 여러모로 도와주었습니다.

예수님께 여러분의 마음을 여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이야기를 그분께 털어놓으십시오. 모두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일반화해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느 날 여러분처럼 평범한 어느 그리스도인이 여러분의 눈을 뜨게 해줬습니다. 여러분의 눈앞에 심오하고도 새롭고 복음서처럼 유구한 전망(지평)을 열어줬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진지하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도들 중의 사도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그때 여러분의 심정은 어땠나요? 여러분은 십중팔구 혼란스러워서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유로운 의지로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하느님께 말씀드린 다음에야 비로소 현실에 안주하려던 안일한 마음이 사라지고 진정한 평화가 찾아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스스로 원했다는 사실이 바로 가장 초자연적인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굳세고도 그칠 줄 모르는 기쁨이 여러분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그 기쁨은 여러분이 예수님을 버리기 전에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특권층의 일원으로 선택된 사람들에 관해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고, 선택하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성경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에페 1,4)

이런 생각이 여러분의 자존심을 채워주거나,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여기도록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주신 성소의 뿌리이며, 이는 곧 우리가 겸손해야만 하는 근거가 됩니다. 우리는 화가의 붓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지는 않습니다. 걸작을 만드는 데 화가의 붓이 한몫하긴 하지만, 우리는 화가만을 믿을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창조주이자 모든 인류의 구원자이신 그분의 손에 들린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함께 얘기해온 것들에 관해 기록한 선례들을 생각할 때마다 크게 고무됩니다. 첫 열두 제자를 부르신 복음서의 기록에서 차근차근 그 내용을 짚어봅시다. 그리고 천천히 묵상합시다. 우리 주님의 거룩한 증인들에게,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도와달라고 간청합시다.

제가 매우 좋아하고 공경하는 첫 사도들은 인간적으로는 별로 내세울 게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오를 제외하면 사도들은 그저 그런 어부들에 불과했습니다. 세리였던 마태오만은 아마도 어렵지 않은 생활을 했겠지만, 그마저도 예수님 말씀을 듣고는 모두 버렸습니다. 나머지 사도들은 밤을 새워 고기를 잡아야만 근근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곤궁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지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초자연적인 일들에 대한 그들의 반응으로 미루어봤을 때, 그다지 영민한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가장 기초적인 예시와 비유들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스승이신 예수님께 다가가 ‘그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주십시오.’(마태 15,15) 하고 부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 관해 얘기하며 ‘누룩’의 비유를 사용하셨을 때 사도들은 자기들이 빵을 사오지 않은 것에 대해 나무라시는 걸로 잘못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사도들은 가난하고 무지했습니다. 그들은 그리 단순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야심까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종종, 그들 생각에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세우실 것이며, 그때 자신들 가운데 누가 가장 높은 자가 될지 논쟁했습니다. 심지어 최후의 만찬의 그 친밀한 분위기에서도,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 스스로 죽으시려는 그 숭고한 순간에서 조차도 그들은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신앙이요? 그들은 거의 신앙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 점을 지적하셨지요. 그들은 죽은 자가 일어나고, 온갖 질병이 치유되고, 빵과 물고기가 불어나고, 폭풍우가 잠잠해지고, 마귀가 내쫓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즉시 반응한 사람은 사도들의 지도자 역할로 선택된 베드로 성인뿐이었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 16, 15) 하지만 베드로의 신앙은 자신의 한계에 매몰된 믿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고난받고 죽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을 반박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은 나무라셔야만 했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태 16,23) 이와 관해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베드로는 너무나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은 존엄하신 주님께 맞지 않으며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베드로를 나무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고통은 나의 존엄에 걸맞는 일이며 내가 당해야 할 일이다. 나의 존엄과 나의 위신(威信)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네 마음이 인간의 사고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신앙심 얕은 사람들이 적어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만은 남달랐을까요? 그들은 말로는 분명히 그분을 사랑했습니다. 때때로 그들은 열정에 휩싸여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요한 11,16)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그 진실의 순간에 요한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도망쳤습니다. 사도들 중 막내였던 소년 요한만이 진정한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주님께서 매달리신 십자가 곁에는 오직 요한만 눈에 띄었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죽음만큼 강한 사랑을 자기 안에서 찾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 사람들은 모두 우리 주님께서 부르신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신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져 “교회의 기둥”이 되기 전까지 (갈라 2,9) 제자들은 여전히 그러한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결점과 단점을 지닌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행동보다는 말이 앞서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마태 4,19), 구원사업의 협조자이자 하느님의 은총을 나눠주는 이들이 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들이 어디에 있든, 한창 잘 나가는 순간을 살고 있든, 아니면 위기와 좌절의 순간에 있든 간에,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베드로 성인이 성령 강림 이후에 말했던 장엄하고도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주춧돌이자 구원자이시며 우리 삶의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사도 4,12)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들 가운데 아주 특별하게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고 저는 곧잘 얘기해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혜의 선물입니다. 지혜의 선물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알게 하고 그분의 현존하심에 기뻐하게 해줍니다. 그로 인해 지혜의 선물은 우리에게 하나의 관점(觀點)을 부여합니다. 우리는 그 관점을 통해 우리가 처한 상황과 우리 삶의 여러 사건들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우리네 신앙은 변함없이 굳세게 일관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며 세상과 그 역사를 묵상할 때 우리 주님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느낌과 똑같은 감정을 우리 가슴 속에 반드시 갖게 되어야 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마태 9,36)

그리스도인은 인간성 안에 숨 쉬는 모든 선한 것들을 무시해선 안 됩니다. 그 건강한 기쁨을 인정하거나 인간적인 열정과 이상에 함께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가 세상에서 발견하는 모든 선한 것들과 조화를 이루며 행동할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배려심으로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인간 정신의 깊이와 풍부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의 정신을 약화시키거나 인간 영혼의 고귀한 충동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진실되고 진정한 의미를 자각하고 실현함으로써 그러한 특성들을 더욱 성장시킵니다. 우리는 대중적인 행복만을 추구하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당신이 사셨던 삶의 친밀함에 깊이 스며들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또한 같은 하느님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알고 사랑하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아울러 세 위격을 가지신, 한 분이신 하느님의 같은 사랑 안에서 천사들과 모든 인류를 사랑하도록 불림 받았습니다.

인간 본성의 가치와 존엄함을 선포하는 것은 그리스도 신앙의 대담한 모습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느님 자녀의 존엄함을 성취하기 위해 창조됐다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엄청나게 대담한 특징입니다. 그러한 확신은 우리를 초자연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려주는 은총을 통해 가능합니다. 만약 그리스도교 신앙이 구원의 약속 위에 세워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정말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담한 일이었겠지요. 그런데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신 이 구원의 약속은 그리스도의 피로 확증됐으며 성령의 지속적인 활동에 의해 다시금 확인되고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고, 신앙 안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동방 교회의 위대한 박사들 중 한 명이 다음과 같이 설명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신앙 안에서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투명한 물질이 한 줄기 빛을 받아 광채를 발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령에 의해 태어나 밝게 빛나게 된 영혼은 스스로 영적(靈的)이 되며, 은총의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리웁니다. 성령으로부터 미래에 일어날 여러 사건들에 대한 지혜가 오며, 신비를 이해하게 되고, 은총 주심과 천국의 시민됨, 그리고 천사와의 대화 등과 같은 숨겨진 진실들을 깨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기쁨이 찾아오며, 성령으로 인해 하느님 안에서 인내하고 하느님을 좋아하게 되며, 우리의 상상이 미치는 가장 고귀한 상태에 이르러 하느님과 같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 존엄성의 위대함을 깨우치는 것은 겸손한 마음과 더불어 우리 안에 하나의 태도로 자리잡습니다. 그 존엄성이 주님의 은총을 받아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 자녀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진정으로 엄청난 사실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에게 생명을 준 것은 우리들 자신의 힘이 아니며 바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이는 참으로 잊어선 안 되는 진실입니다. 만약 그 진리를 잊어버린다면, 우리 삶을 거룩하게 하는 일은 왜곡되어 주제넘는 오만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적 삶이 곧 무너져내릴 것이고, 그때 영혼은 스스로의 나약함과 비천함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묻습니다. “내가 거룩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요? 만약 내가 말하는 ‘거룩함’이 ‘나는 거룩함을 지니고 다니지만, 나를 거룩하게 만들어 줄 어느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라면, 저는 거짓말쟁이에다가 자만심으로 가득 찬 인간일 것입니다. 하지만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레위기 말씀처럼 ‘거룩함’이란 말을 ‘거룩하게 된 누군가’로 이해한다면, 저는 감히 제가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온 몸이 땅 끝에 사는 마지막 사람까지 드리워져 그 몸의 머리와 그 분 아래서 저도 함께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

복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제3위격이신 성령을 사랑합시다. 여러분은 성령으로부터 격려나 비판의 거룩한 울림을 받습니다. 여러분 존재의 친밀함 속에서 그 거룩한 울림에 귀를 기울입시다. 여러분의 영혼에 쏟아진 그 빛을 받으며 이 세상을 걸어갑시다. 그러면 희망의 하느님께서 우리를 완벽한 평화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께서 주신 희망이 성령의 권능으로 우리 안에서 매일매일 더욱더 크게 자라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서 어린이가 되는 것… 

‘하느님 사랑 안에서 어린이가 되는 것’이란 주제에 관해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매우 중요한 사실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성모님의 신비는 하느님께 다가가려면 우리가 작아져야만 한다는 진실을 깨닫도록 도와줍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태 18,3)

어린이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오만한 마음을 버려야 하고,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아집을 버려야만 합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길을 찾아 그 길을 계속 가기 위해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 영적 어린이가 되기 위해 여러분은 어린아이들이 그렇듯 자기 자신을 포기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믿는 것처럼 믿어야 하며, 어린아이들이 애원하듯이 하느님께 애원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성모 마리아와의 만남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성모님께 대한 공경은 그저 부드럽고 감상적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 공경은 우리 영혼을 위로와 기쁨으로 채워줍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희망을 주님께 두도록 해줍니다. 그러면 우리는 참으로 큰 위안과 기쁨을 얻게 되고, 우리의 신앙생활이 곧 성모 공경을 의미할 정도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시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 길로 나를 이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23,1-4)

마리아는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 대한 공경은 우리가 영적으로 그분의 진정한 자녀가 되도록 가르쳐줍니다. 성모님이 가르쳐 주시는 첫 번째 방법은 아무런 조건 없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참으로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복잡한 문제들로부터 벗어나야 하는데, 복잡한 문제들은 항상 자기 자신만을 이기적으로 생각할 때 발생합니다. 세 번째는 그 무엇도 우리의 희망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진실을 깨달음으로써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충만해진 여러분 자신을 만나게 되는 길… 그 길의 시작은 성모님께 대한 신뢰 가득한 사랑입니다.” 몇 해 전에 저는 묵주기도에 관해서 쓴 소책자의 서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 이후 저는 이 말의 진실을 자주 경험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저는 이 생각을 여기서 결론짓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여러분 스스로 이 말의 진실을 발견하도록 초대합니다. 성모 마리아께 대한 여러분의 사랑을 내보이고, 그분을 향해 여러분의 마음을 활짝 열고, 여러분의 기쁨과 슬픔을 성모님께 털어놓으며, 여러분이 스스로 깨달아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그분께 간청함으로써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신앙을 가져야 하고, 또한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인간적 계산에 의해서도 결코 멈춰선 안 됩니다. 우리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이겨내기 위해 주님이 주신 과업에 우리 스스로를 투신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노력이 새로운 길을 열어갈 것입니다. 하느님께 헌신하는 우리들 각자의 거룩함이야말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단 하나의 해결책입니다.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려운 일이라고 여러분은 얘기할 겁니다. 사실이 그렇지요. 이상적인 것은 항상 수준이 높은 법이니까요. 하지만 딱히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플 때 딱 들어맞는 약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일의 경우엔 그렇지 않습니다. 특효약이 항상 있는 법입니다. 그 특효약은 바로 거룩한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당신이 제정하신 다른 성사들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말과 행동으로 다시 말해봅시다. “주님,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만나는 당신의 섭리와 매일 주시는 당신의 도움이 제가 필요한 모든 것입니다.” 엄청난 기적을 일으켜 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키워달라고 부탁해야 합니다. 우리의 능력을 밝혀주시고 우리의 의지를 굳세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무르십니다. 바로 그분께서 항상 계시는 것입니다.

제가 강론을 시작한 이후로 항상 신자들께 주의를 드린 것이 있습니다. 거룩함에 대한 잘못된 느낌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실제로 알게 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맞습니다. 여러분은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이나 저나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거룩하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영원무궁하신 분의 거룩한 부르심으로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에페 1,4) 우리는 특별히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들 개개인의 엄청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느님의 도구들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나약함을 우리가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쓰임새가 큰 주님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닥쳐오는 유혹들은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알게 해주는 척도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생생하게 체험했기 때문에 낙담한다면, 그 순간이야말로 온전히, 그리고 순명하며 하느님 손길에 스스로를 내어드릴 때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을 만나 자선을 청했던 어떤 걸인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걸인 앞에 멈춰 서서 그에게 다섯 도시의 지배권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걸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뒷걸음질 쳤습니다. 그리고 소릴 질렀죠. “저는 그렇게 어마어마한 것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대왕이 대답했습니다. “너는 꼭 너답게 내게 청했고, 나는 꼭 나답게 네게 주는 것이다.”

우리들 자신의 한계를 명확하게 깨닫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당신의 생명을 우리가 더불어 나눌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뒤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 편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실하고, 또한 충직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직시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이해하고 우리들 자신의 잘못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사랑과 자극을 예수님 안에서 발견할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여러분과 나 그리고 우리 모두가 느끼는 좌절감마저도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는 하나의 기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허약함을 인정합시다. 그리고 하느님의 권능에 고백합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희망과 기쁨,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도구로 쓰길 원하신다는 강한 확신으로 일관돼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교회의 한 부분으로 여긴다면, 그리고 베드로라는 반석과 성령의 활동으로 우리 자신을 지탱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살아가는 모든 순간의 작은 의무들을 완수하고야 말겠다고 결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조금씩 씨를 뿌리면 우리의 곡식 창고는 넘쳐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