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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성덕 → 모든 사람이 거룩해져야 한다 항이 있음.

이와 비슷한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 가족이나, 친구, 지인들 중에서 그리스도께서 부르실 법한 훨씬 더 나은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더 단순하고, 더 지혜롭고, 보다 영향력 있고, 권위 있으며, 훨씬 더 감사할 줄 알고, 더 관대한 사람을 부르셨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저는 당황스럽습니다. 인간의 논리로는 은총의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또한 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하시는 어떤 일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일부러 부족함이 많은 도구들을 찾으십니다. 바오로 성인께서 자신의 소명에 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할 때 저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1코린 15, 8-9) 경이로운 성품과 추진력으로 역사에 기록된 타르수스의 사울은 스스로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제가 이전에도 얘기했듯이 우리는 자랑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시기 전까지 우리는 미천하고 가엾은 개별인(個別人)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네 영혼 속에서 반짝이는 빛(신앙-信仰)과, 우리가 더불어 나누는 사랑(애덕-愛德), 그리고 우리를 지탱해주는 열망(희망-希望), 이 모든 것들이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선물이란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깁시다!

우리가 겸손함을 키워가지 않는다면 하느님께 선택받은 이유를 곧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택하신 이유는 바로 우리들 개개인의 거룩함(성덕: 聖德) 때문입니다. 우리가 겸손하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르심(소명: 召命)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손길이 밀밭에서 우리를 낚아채셨습니다. 씨 뿌리시는 분은 당신의 상처 입은 손바닥으로 한 줌의 밀을 짜내셨습니다. 그렇게 짜낸 밀을 그리스도의 성혈에 적셔 씻어내셨고 그 밀을 바람에 실어 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밀은 죽어서 새 생명이 되고, 땅에 내려앉아 스스로 증식하게 된 것입니다.

신앙의 삶은 희생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소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위치를 결코 폄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버리라고 요구합니다. 이제 막 반짝이기 시작한 빛을 만났다는 것은 첫 걸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빛이 별처럼, 더 나아가 태양처럼 밝게 비추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 빛을 따라가야만 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이렇게 썼습니다. “동방박사들이 페르시아에 있는 동안 그들은 단지 하나의 별을 보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동방박사들이 집을 뒤로 하고 길을 나섰을 때 그들은 정의(正義)의 태양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나라에 그냥 머물러 있었다면, 결코 그 별을 계속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서둘러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을 모두가 나서 가로막더라도 아기 예수님이 계신 집을 향해 우리 함께 달려갑시다.”

굳세게 성소의 길을 걸어갑시다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마태 2, 2-3) 이 장면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마주하거나, 신앙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한 사람들을 이상하게 여기고 놀라워하면서 심지어 추문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인간적이며 그리스도교적으로 심오한 결정을 내린 사람들을 자신들의 편협하고 세속적인 시야에 어긋나는 삶의 방식이라 여기며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듯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은 사람들의 관대한 행동에 대해 히죽거립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소를 받은 이들의 헌신에 놀라고 두려워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노골적으로 병적인 반응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들은 온전히 자유롭게 스스로를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한 이들의 거룩한 결정을 방해하기 위해 온 힘을 쏟습니다.

저는 이른바 ‘동원(動員)’이라고 부를 수 있을 몇몇 경우들을 목격한 바 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헌신하고자 하는 이들에 대해 집단적으로 반대하는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주님께서 당신에게 봉사할 이들을 선택하시기 전에 당사자들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여기는 사람들은 분명히 ‘인간은 자유롭지 않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이 사랑의 제안에 대해 인간이 분명하게 ‘네’ 또는 ‘아니요’ 하고 자유롭게 답할 수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이들에겐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초자연적인 삶이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초자연적인 삶이란 사소한 안락과 인간의 이기심이 충족된 다음에야 비로소 고려해봐야 하는 것이지요. 만약 사실이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신앙 가운데 무엇이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사랑이 넘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히 듣기만 할 건가요? 아니면, 듣고 실천에 옮길 것인가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5,48)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던가요?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을 만나러 오라고 모든 인간에게 요청하십니다. 그래서 성인(聖人)이 되라고 요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지혜롭고 영향력 있는 동방박사들만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전에, 별이 아닌 당신 천사들 중 하나를 베들레헴의 목동들에게 보내셨습니다. 부자건 가난한 이건, 지혜롭거나 또는 그렇지 못한 것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겸손한 성품을 마음 깊이 길러야 합니다.

헤로데 임금의 경우를 봅시다. 그는 이 세상의 권력자 중 한 사람이었고, 지식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있었습니다.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마태 2,4) 하지만 헤로데의 권력과 지식은 그가 하느님을 알아보도록 이끌지 못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완고하기 그지없었기에 권력과 지식이 악(惡)을 행하는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없애려 들었고, 무고한 어린아이들의 생명을 경멸하는 만행만을 저질렀을 뿐입니다.

다시 복음서로 돌아가 봅시다.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마태 2, 5-6)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드러나는 이 표현들을 우리는 결코 그냥 지나쳐선 안 됩니다.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 보잘것없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거듭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태어나신 이유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한 사람을 온전히 신앙에 따라 살아가도록 초대하실 때에는 그의 재산도, 계급도, 혈통도, 배움도 결코 따지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세상의 모든 가치들에 앞서는 것입니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마태 2,9)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먼저 부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 어떻게 다가가는지를 알기도 전에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사랑을 우리 안에 심어주십니다. 우리가 그분께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심이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정의롭기만 한 분이 아닙니다. 정의로운 것에 앞서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께 다가가기를 기다리고만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먼저 나서십니다. 아버지가 주는 사랑의 명백한 징표를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위험한 안전(安全) 

“지극히 높으신 분의 보호 속에 사는 이, 전능하신 분의 그늘에 머무는 이” (시편 91,1).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위험한 안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얘기를 경청하신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신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그렇게 확신한다면 우리는 완전한 마음의 평화를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함께 나누려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원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그분께 다가간다면, 그것은 우리가 새로운 회개를 준비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삶의 방향을 새롭게 정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감에 보다 주의 깊게 귀 기울이며, 이를 실천에 옮기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영감이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하느님께서 불러일으키시는 거룩한 갈망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첫 번째 결정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참으로 따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결정한 이후, 그분의 말씀을 충실히 이행해가는 여정에서 우리가 많이 성장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할 일이 여전히 많다는 게 사실이지 않습니까? 특히 우리 안에 여전히 너무도 많은 교만(驕慢)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실제로 다시 변화해야만 합니다. 더욱 성실하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은 줄어들고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커지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요한 3,30)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오로 성인이 얘기한 새로운 목표를 향해 쉼 없이 전진해야 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 2,20) 이것은 고귀하고 숭고한 바람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뜻하며 이것이 바로 거룩함인 것입니다. 만약 세례 때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 안에 심어주신 거룩한 삶을 우리가 그대로 살고 싶다면,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면 우리는 거룩함을 키워가야 합니다. 이 거룩함을 꺼리고 피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삶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거부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불길은 계속 지펴져야 합니다. 그 사랑의 불길은 우리 영혼의 힘을 모아 매일 커져야 합니다. 불길은 무언가를 계속 태움으로써 유지됩니다. 만약 우리가 계속 불을 지피지 않는다면 꺼져버릴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얘기를 기억합시다. “만약 여러분이 스스로 ‘이만큼 왔으면 충분하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길을 잃은 것입니다. 더 멀리 나아가십시오. 계속 가십시오. 같은 장소에 머무르지 마십시오. 되돌아가지 마십시오. 길 밖으로 벗어나지 마십시오.”

사순시기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충실하게 따르며 성장하고 있는가? 거룩함에 대한 열망이 성장하고 있는가? 일상에서 실천하는 너그러운 사도직 활동이 성장하고 있는가? 내 동료들과 함께하는 일상의 일에서 성장하고 있는가?

우리 모두 조용히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한번 변화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고, 우리 행동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분명히 비추어지려면, 우리가 변화해야만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카 9,2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 말씀을 다시 하고 계십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라고 우리 귀에 속삭이시면서 말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박해 시기, 또는 순교의 기회가 있을 때뿐만 아니라 모든 상황에서, ‘예전의 우리’를 부정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지금의 우리’를 고백하도록 합시다. 우리가 행하고 생각하는 모든 일에서,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에서 우리의 고백이 이뤄지도록 합시다.”

바오로 성인은 이렇게 화답합니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 (에페 5, 8-10)

회개는 한순간의 일이고 거룩해지는 것(聖化)은 평생의 과업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에 심어주신 사랑의 거룩한 씨앗은 자라나기를 원하고 행동으로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대로 한결같이 일치하는 열매를 맺길 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상황에서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처음 회개했던 순간의 그 빛과 강렬한 느낌을 되찾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도움을 간구하며 양심의 깊은 성찰을 갖추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주님과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다시 회개하고자 한다면 다른 길은 없습니다.

내적 투쟁(內的 鬪爭) 

바오로 성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훌륭한 군사답게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2티모 2,3) 그리스도인의 삶은 투쟁이고, 전쟁입니다. 그러나 평화를 위한 아름다운 전쟁입니다. 분열과 증오 때문에 일어나는 인간의 전쟁과는 완전히 다른 싸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벌이는 전쟁은 스스로의 이기심과 맞서 싸우는 전투입니다. 이 전쟁은 일치와 사랑을 밑바탕으로 삼습니다. “우리가 비록 속된 세상에서 살아갈지언정, 속된 방식으로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전투 무기는 속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 덕분에 어떠한 요새라도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이론을 무너뜨리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고 일어서는 모든 오만을 무너뜨리며, 모든 생각을 포로로 잡아 그리스도께 순종시킵니다.” (2코린 10,3-5)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벌여야 할 가차 없는 전쟁에 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교만과, 악한 일을 저지르려는 성향과, 스스로를 과시하려는 오만에 맞서 싸우는 전쟁입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주님께서 결정적인 한 주간을 시작하시는 때입니다. 이날을 맞아 피상적인 질문은 제쳐두고,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인지 핵심으로 바로 들어갑시다. 보십시오. 우리가 하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은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대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야 하는 것도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에 충실하기 위해서 참으로 필수적인 것이 있습니다. 영원한 행복을 향해 가는 우리의 길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에 맞서 집요하게 투쟁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벌여야 할 싸움에 대해 이야기할 때입니다. 그것은 우리들 자신의 약함을 상기시키고 우리의 타락과 실수들을 미리 내다보게 하는 싸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고려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길을 걸을 때 먼지를 일으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피조물들이고 결점투성이입니다. 우리에겐 항상 결점이 필요하다고까지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결점들은 두 가지 빛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이 그 하나이고, 주님의 친절하심에 응답하겠다는 우리의 결심이 또 다른 하나입니다. 하느님의 빛과 우리들 결점의 그림자가 이루는 이 같은 대비가 우리를 인간적이고 겸손하며 분별력 있고 관대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들 자신을 속이지 맙시다. 우리는 삶에서 활력과 승리를 얻기도 하고 우울과 패배를 맛보기도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지상 순례에서, 심지어 우리가 제대에 모시고 공경하는 성인들에게도 이런 일들은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베드로와 아우구스티누스, 프란치스코를 기억하지 않습니까? 마치 태어날 때부터 은총을 입은 듯 확신하며 성인들의 업적을 순진하게 늘어놓는 성인들의 전기를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성인들에 관해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은 교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교 영웅들의 진정한 삶의 이야기는 우리들 자신의 체험들과 닮아 있습니다. 그들은 싸워서 이기기도 했고, 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회개하고 삶의 전장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우리가 비교적 자주 패배한다 하더라도 놀라지 마십시오. 심지어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별반 중요하지 않은 일들에서조차 매번 실패한다고 해도 결코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며 항상 겸손합시다. 끊임없이 참고 버티며 투쟁합시다.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패배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기쁨을 가져다 드리는 수많은 승리들이 또한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올바른 지향을 가지고 행동한다면, 실패와 같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뜻을 이루길 바라십시오. 주님의 은총과 여러분 자신의 미소(微少)함에 항상 의지하십시오.

성령 알아차리기 

성령의 뜻에 따라 산다는 것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곧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서 소유하셔서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고 우리를 더욱더 당신과 닮게 만들어주시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성숙하고 심오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코 멋대로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자라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간결하지만 의미심장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사도 2,42)

이것이 바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살았던 방식이며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네 신앙의 가르침이 우리의 일부분이 될 때까지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체 안에서 우리 주님을 받아 모시고, 기도 안에서 주님과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며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저지른 비인간적인 행동을 감추려 들지 말고 주님과 마주 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의 방식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태도의 가장 본질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아마도 몇 가지의 장점은 갖게 될 것입니다. 해박하게 사고하는 능력, 어느 정도 치열한 활동, 일정 수준의 실천과 헌신 같은 것들 말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영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로 일치하지 않고, 그분의 구원사업에 동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류 그리스도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복음의 단순화된 버전만을 실천하는 의무를 가진 그리스도인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비록 각자 받은 영적 은사와 서로가 처한 인간적 상황들이 엄청나게 다양하지만, 오직 하나의 믿음, 하나의 희망, 하나의 사랑만이 있을 뿐입니다. 바로 그 하느님의 선물을 나눠주시는 분은 한 분이신 성령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던졌던 질문을 우리들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1코린 3,16) 우리는 이 말씀을, 더욱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하느님을 대하도록 우리가 초대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행히도 어떤 사람들에겐 성령은 아주 낯선 분이고 어마어마한 미지의 존재입니다. 하지만 성령은 단순히 이름뿐인 존재가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 안에 계신 세 위격 중 한 분이시며, 우리가 함께 얘기할 수 있고 그분의 삶을 우리가 더불어 살 수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교회 전례 안에서 우리가 배운 대로 우리는 단순하게 그리고 신뢰하며 성령을 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주님을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됐을 때 우리에게 주어진 엄청난 특권을 더욱 확실히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제가 앞에서 언급했던 ‘거룩하게 됨’의 위대함과 진리를 모두 알게 될 것입니다. ‘거룩하게 됨’이란 하느님 당신의 생명 안에서 더불어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거룩한 실체들을 그려 넣는 예술가가 아닙니다. 자신에게도 생소한 듯한 그림을 그리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과 닮아가도록 이끄시는 성령의 방식이 결코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당신 자신이 하느님인 동시에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입니다. 그분은 오히려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마음에 마치 밀납 위에 직인을 찍듯이 그분 자신의 인호를 박으십니다. 바로 이런 방법으로 성령께서는 당신의 생명과 당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범에 따라 우리의 본성을 회복하게 해주시고, 동시에 하느님과 닮은 모습을 인간에게 되돌려주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