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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성덕 → 개인적 거룩함 항이 있음.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삶으로 부르십니다 

우리는 갈바리아산의 그 드라마를 다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감히 설명하건대, 예수님께서 죽으신 갈바리아산의 그 드라마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거행된 최초의 미사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죽음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신 예수님은 당신에게 사형선고로 내려진 십자가를 껴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희생은 당신 아버지에 의해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희생의 결과로 성령께서 인류에게 강림하신 것입니다.

수난의 비극은 우리의 삶과 전체 인류의 역사에 성취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성주간이 단순한 기념시기가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성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우리 영혼 안에서 끊임없이 활동하는 그 무엇인가로 여기고 묵상하는 시기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제2의 그리스도이자, 그리스도 자신(alter Christus, ipse Christus)이 되어야 합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 모두는 우리 삶의 사제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1베드 2,5) 사제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순명을 드러낼 수 있으며, 따라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사명을 우리가 계속 이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곧바로 우리 자신의 비참함과 개인적인 타락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 때문에 낙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비관주의자가 되어선 안 되며, 우리의 이상을 버려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처한 현재의 상황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당신의 삶을 더불어 나눔으로써 우리 삶이 거룩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요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곧잘 ‘거룩함’이란 헛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거룩함이란 결코 성취할 수 없는 것이고, 왠지 수덕신학(修德神學)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 거룩함은 실질적인 목표도, 살아있는 실재(實在)도 아닙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서로를 설명할 때 “성도(聖徒)”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모든 성도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로마 16,15)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사는 모든 성도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필리 4,21)

지금 갈바리아산을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지만 그분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나타내는 표식은 아직 없습니다. 성금요일은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살기를 원하는지, 진정 거룩하게 되길 원하는지 성찰하기에 좋은 시기입니다. 그리고 신앙을 행동에 옮김으로써 우리의 연약함에 맞설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으며 우리가 매일 하는 일에 사랑을 쏟겠다고 결심할 수 있습니다. 죄의 체험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성장해야 합니다. 또한 더욱 충실해지고 진정으로 우리 주님과 하나가 되겠다고 더 깊이 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주님의 사도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주신 사제로서의 사명을 꾸준히 수행해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들 각자에게 주신 사제의 사명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도록 격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의 일상 활동을 잘 살펴보고 우리가 선포하는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임하도록 초대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주간은 일종의 ‘종교적 막간(幕間)’이 될 수 없습니다. 삶으로부터 따로 떨어져 나온 시간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삶이란 인간사(人間事)에 철저히 얽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성주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심오하게 이해하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언행(言行)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랑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주님께서는 특별한 조건을 내거십니다. 우리는 루카 성인이 우리를 위해 기록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6) 이것은 매우 어려운 말씀입니다. 사실, 영어의 ‘미워하다(hate)’라는 단어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매우 강하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 문구의 논조를 약화시키기 위해 ‘미워하다’를 “덜 사랑한다”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처럼 “덜 사랑한다”는 뜻을 표현하시려고 한 게 아니었습니다. ‘미워하다’처럼 강력한 말이 지닌 힘은 그 단어가 가진 부정적이고 냉정한 의미에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신 예수님은, 우리 자신을 사랑하듯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바로 그분이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위해 당신 목숨을 내어놓으신 그분인 까닭입니다.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에 관한 한, 우리가 결코 미온적이어선 안된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참뜻입니다. 이기적이거나 부분적인 사랑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더 사랑하라, 더 잘 사랑하라.”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우리 자신의 영혼을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곧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바입니다. 만약 우리가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래서 우리의 유일한 관심이 우리들 자신의 개인적인 행복뿐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심지어 이 세상 전체를 미소하기 짝이 없는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하려 든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여길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뿐 아니라 행동과 진심으로 우리 자신을 실제로 봉헌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게하고 그 어깨 위로 인류의 무게를 느끼도록 해주십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가 일하고 생활하는 모든 환경에서 하느님이 뜻하시는 명확하고도 사랑 넘치는 계획을 실현하게끔 이끕니다. 우리가 방금 읽은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은 계속 얘기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7)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입시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가르치고 요구하는 대로 우리의 모든 삶을 바로 세우도록 굳게 다짐합시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투쟁과 괴로움과 아픔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신앙을 지켜나간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느끼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슬픔의 한가운데서도, 심지어 온갖 모략이 난무하는 한복판일지라도,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우리의 초자연적인 기쁨을 그들이 함께 나누도록 도와주는 행복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신앙을 가져야 하고, 또한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인간적 계산에 의해서도 결코 멈춰선 안 됩니다. 우리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이겨내기 위해 주님이 주신 과업에 우리 스스로를 투신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노력이 새로운 길을 열어갈 것입니다. 하느님께 헌신하는 우리들 각자의 거룩함이야말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단 하나의 해결책입니다.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려운 일이라고 여러분은 얘기할 겁니다. 사실이 그렇지요. 이상적인 것은 항상 수준이 높은 법이니까요. 하지만 딱히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플 때 딱 들어맞는 약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일의 경우엔 그렇지 않습니다. 특효약이 항상 있는 법입니다. 그 특효약은 바로 거룩한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당신이 제정하신 다른 성사들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말과 행동으로 다시 말해봅시다. “주님,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만나는 당신의 섭리와 매일 주시는 당신의 도움이 제가 필요한 모든 것입니다.” 엄청난 기적을 일으켜 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키워달라고 부탁해야 합니다. 우리의 능력을 밝혀주시고 우리의 의지를 굳세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무르십니다. 바로 그분께서 항상 계시는 것입니다.

제가 강론을 시작한 이후로 항상 신자들께 주의를 드린 것이 있습니다. 거룩함에 대한 잘못된 느낌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실제로 알게 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맞습니다. 여러분은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이나 저나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거룩하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영원무궁하신 분의 거룩한 부르심으로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에페 1,4) 우리는 특별히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들 개개인의 엄청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느님의 도구들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나약함을 우리가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쓰임새가 큰 주님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닥쳐오는 유혹들은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알게 해주는 척도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생생하게 체험했기 때문에 낙담한다면, 그 순간이야말로 온전히, 그리고 순명하며 하느님 손길에 스스로를 내어드릴 때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을 만나 자선을 청했던 어떤 걸인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걸인 앞에 멈춰 서서 그에게 다섯 도시의 지배권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걸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뒷걸음질 쳤습니다. 그리고 소릴 질렀죠. “저는 그렇게 어마어마한 것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대왕이 대답했습니다. “너는 꼭 너답게 내게 청했고, 나는 꼭 나답게 네게 주는 것이다.”

우리들 자신의 한계를 명확하게 깨닫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당신의 생명을 우리가 더불어 나눌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뒤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 편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실하고, 또한 충직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직시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이해하고 우리들 자신의 잘못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사랑과 자극을 예수님 안에서 발견할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여러분과 나 그리고 우리 모두가 느끼는 좌절감마저도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는 하나의 기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허약함을 인정합시다. 그리고 하느님의 권능에 고백합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희망과 기쁨,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도구로 쓰길 원하신다는 강한 확신으로 일관돼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교회의 한 부분으로 여긴다면, 그리고 베드로라는 반석과 성령의 활동으로 우리 자신을 지탱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살아가는 모든 순간의 작은 의무들을 완수하고야 말겠다고 결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조금씩 씨를 뿌리면 우리의 곡식 창고는 넘쳐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