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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일 → 세상의 성화 항이 있음.

사도직 : 우리 주님과 함께하는 구원사업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묵상하는 영혼은 사도적 열정으로 충만해집니다. “내 마음이 속에서 달아올랐고, 내 생각에 활활 불이 타올랐다.” (시편 39,4) 이 ‘불’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불’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루카 12,49) 이것이 바로 기도를 통해 힘을 얻는 사도적 열정의 불길인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여된 ‘평화를 위한 전투’라는 소명을 이루기 위해 기도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부르심을 받은 ‘평화를 위한 전투’란 그리스도의 고통을 더욱 필요로 하는 것들을 채워나가기 위해 세상 모든 곳에서 펼쳐지는 분투를 뜻합니다.

우리가 본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나 열두 사도들이 그분과 친교를 맺은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기도와 성체 안에서 예수님과 친교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도적 열정에 불타오를 수 있습니다. 사도적 열정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봉사하게 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구원하게 하고, 그가 어디를 가든지 평화와 기쁨의 씨앗을 뿌리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봉사’는 사도직의 모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에만 기댄다면, 우리는 초자연적 차원에서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도구가 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이루어낼 것입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필리 4,13) 한없이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적당하지 않은 도구를 쓰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에게 다른 목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사도 안에 오셔서 사도를 통하여 일하시도록 하는 것 이외에 다른 목표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신을 온전히 내맡김으로써 한 피조물을 통해, 즉 당신께서 선택하신 영혼을 통해 주님의 구원사업을 이루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 명의 사도, 그가 곧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세례를 통해서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나무에 접붙여지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는 견진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음을 알게 됩니다. 견진성사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서의 활동으로 하느님을 섬기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들이 가진 보편 사제직입니다. 이 보편 사제직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어느 정도 더불어 나누도록 합니다. 보편 사제직은 사제가 지닌 직무 사제직과는 본질적으로 다르지만, 그리스도인에게 교회의 흠숭지례에 참여하는 자격을 부여합니다. 또한 기도와 보속을 통해 말과 모범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도록 도울 수 있는 자격을 얻게 합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리스도 자신 (Ipse Christus)’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인간을 이어주신 중재자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과 함께 아버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봉헌하기 위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한가운데서 하느님의 자녀로 부르심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자신만이 거룩하게 되기 위해 노력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길로 나아가, 그 길들이 모든 장애물을 넘어 인간의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는 길이 되도록 변화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평범한 시민으로서 모든 세속적 활동에 참여할 때 우리는 밀가루 반죽을 변화시키는 누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순수하게 인간적인 모든 존재들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주셨습니다.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이 사실을 독특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오셨던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분이 머물던 곳인 지상으로부터 천국으로 다시 돌아가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승천하시던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하나로 합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에 우리는 장엄하게 선언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선고된 판결이 거두어졌고, 우리를 타락하게 한 결정들이 취소됐다고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라는 말씀을 들은 바로 그 인간의 본성(本性)이 오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 올라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이 세상이 거룩하게 될 수 있다는 말씀을 여러분께 반복해서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겐 세상을 성화(聖化)하기 위해 수행해야 할 특별한 역할이 있습니다. 우리는 인류가 세상을 더럽힌 죄의 정황(情況)들을 씻어내 이 세상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 봉헌으로 이 세상을 우리 주님께 바쳐야 합니다. 이 세상을 주님께 드리려면, 당신의 은총과 우리의 노력을 통해 그분께서 받으실만한 세상이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모든 인간 존재는 초자연적인 중요성을 지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이 완벽한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으며, 당신의 현존과 당신께서 직접 하신 일들로 이 세상을 축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세례 때 우리가 받은 위대한 소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영혼을 구원해야 하는 이 과업을 우리 어깨 위에 나누어 짊어지도록 재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사랑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들처럼, 순결한 마음을 가진다는 것, 하느님 같은 마음을 가진다는 것을 ‘인간적인 애욕과 섞이지 않은 것, 오염되지 않은 것’ 정도로만 여긴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말 것입니다. 건조하고 영혼 없는 ‘형식적 사랑’만을 베풀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럴 경우 우리의 사랑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진정한 사랑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애정과 인간적 온기가 담긴 사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사람의 마음을 하느님께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죄와 벌의 상황으로 오도(誤導)하는 그릇된 이론들과 옹졸한 변명들을 결코 지지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예수 성심 대축일’에 우리는 이웃의 고통에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선한 마음을 달라고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져야만, 이 세상의 모든 아픔과 고뇌를 치료하는 진정한 약이 바로 사랑이요 애덕(愛德)이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위안들은 잠시의 효과도 갖기 어렵고 고통과 절망만을 뒤에 남길 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고 싶다면 우리는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해와 헌신, 애정과 자발적 겸손이 깃들어 있는 사랑을 해야 한다고 저는 주장합니다. 그러고 나서야 우리는 주님께서 모든 율법을 두 가지 계명, 실제로는 하나의 계명으로 요약하신 이유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 이웃을 사랑하는 것’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 말고 여러분과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따금 이 가장 기본적인 의무를 잊고 실천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여러 가지 예를 떠올릴 겁니다. 시급히 시정돼야 할 불의(不義)와 고쳐지지 않는 온갖 학대(虐待), 항구적인 해결책을 찾으려는 시도 없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차별 등이 그런 것들입니다.

저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제가 그래야 할 이유도 없고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로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를 여러분께 상기시켜 드리는 것이 제 의무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설명하신 ‘심판 장면’을 묵상해봅시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마태 25,41-43)

고통과 불의에 대항하지 않고, 그 고통과 불의를 감소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개인이나 사회는 그리스도 성심의 사랑과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문제들의 다양한 해결책을 찾고, 이를 실제로 적용하는 데 있어 완벽한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에 봉사하겠다는 같은 열망 안에서 하나로 일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사람들의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의 말씀도 예수님의 삶도 아닐 것입니다. 그런 그리스도교라면 하느님과 인간을 기만할 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져다주신 평화 

그러나 우리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를 여러분께 말씀드리려 합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기 위해 열정을 다해서 분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확한 이유를 얘기하자면, 우리 인간이 진정 정의로워지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이 맺는 관계들이 증오와 무관심이 아닌 사랑에 의해 영감을 받으려면 너무 먼 길을 가야 하는 까닭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깨우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설사 우리가 부의 합리적 분배와 조화로운 사회조직을 이루어낸다 하더라도 여전히 세상에는 병마와 오해, 고독, 사랑하는 이의 죽음, 그리고 우리들 자신의 한계를 절감(切感)해야 하는 고통들이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고통의 무게와 마주 서서 그리스도인이 찾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진정한 해답, 유일하고 결정적인 답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모두를 사랑하셔서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신 하느님입니다. 창에 찔린 채 당신의 성심을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불의를 미워하시며 불의를 저지른 이들을 꾸짖으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개개인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불의가 발생하도록 그냥 두셨습니다. 왜냐하면 불의는 원죄의 결과로서 인간 조건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성심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우리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간절히 정의를 바라는 배고픔과 갈증… 그분은 이 모든 아픔들을 십자가를 통해 당신 홀로 온전히 짊어지셨습니다.

고통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우선 모든 인간의 삶에서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아픔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신 소명입니다. 여러분께 숨기지 않겠습니다. 제 인생에도 자주 아픔이 있었고, 몇 번이고 정말로 울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얘기를 여러분께 기쁘게 말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만나야 한다는 진리를 항상 강론해왔고, 또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평소에 불의와 악(惡)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런 열망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상황을 치유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과도 맞서 싸워왔습니다.

고통에 관해 얘기할 때 단순히 이론만 말씀드리고 있지 않습니다. 고통과 맞닥뜨려서 여러분의 영혼이 흔들린다고 느낀다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최선의 치유책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릴 때 저는 다른 사람의 경험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갈바리아산의 수난 장면은, 고통은 거룩하게 변모해야 하며 우리는 십자가와 하나 되어 살아야 한다는 진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려움을 참고 견딘다면, 그 어려움은 속죄(贖罪)와 배상(賠償)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 어려움은 또한 예수님의 운명과 그분의 생명을 우리가 함께 나누도록 해줍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분은 인간의 모든 고통과 고뇌를 스스로 기꺼이 겪어내셨습니다. 그분은 가난하게 태어나고, 생활하고,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공격받고, 모욕당하고, 헐뜯기고, 중상모략에 걸리고, 부당하게 비난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이 당신을 배신하고 버릴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고독을 실감했고 형벌과 죽음의 고통을 체험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동료들과 함께, 그리고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고통받고 계십니다. 인류의 머리이자 맏이이시며 구원자이신 그분께서 같이 아파하고 계신 것입니다.

고통은 하느님 계획의 일부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해하긴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도 수난을 견디기 힘드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루카 22,42)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간청하며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십자가에 매단 이들을 용서하시면서 묵묵히 죽음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이처럼 고통을 초자연적으로 받아들이며 그분은 가장 위대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가져오십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가져야 할 자세는 닥쳐올 비극적 운명에 대한 체념이 아니라, 승리를 예감한 사람의 성취감입니다. 승리하신 그리스도 사랑의 이름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 나아가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통해 평화와 기쁨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우리는 악과 불의와 죄에 맞서 평화의 투쟁을 벌여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현재 처해 있는 형편이 결코 확정된 상태가 아님을 공표해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성심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만이 인간의 영광스러운 영적 승리를 얻게 해줄 것입니다.

교회 전례력 상의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제대(祭臺)의 거룩한 희생 안에서 우리는 아버지께 드리는 희생 제물을 새롭게 봉헌합니다. 우리가 곧 감사송에서 함께 노래하겠지만, 정의와 사랑,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성스로운 인간애를 깊이 생각하면서 우리의 영혼 깊이 엄청난 기쁨을 실감합니다. 그분은 여러분처럼 인간의 마음을 가지신 왕입니다. 그분은 온 우주와 모든 피조물을 지으신 분이지만, 결코 전제 군주처럼 우리 위에 군림하시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당신의 상처를 우리에게 말없이 내보이며 작은 사랑을 당신께 달라고 하실 뿐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알지 못할까요? 왜 우리는 여전히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루카 19,14)라는 잔인한 거부의 목소리를 듣는 걸까요? 이런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거부하는지조차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분 얼굴의 아름다움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이 얼마나 놀라운지 깨닫지 못합니다. 이런 슬프고 안타까운 상황 때문에 저는 주님께 속죄하고 싶습니다. 말보다 비열한 행동으로 표현되는 끊임없는 아우성들을 들을 때면 저는 이렇게 외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행위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온갖 방법으로 그분을 반대합니다. 자신들이 처한 환경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인간 사회에 대한 접근 방식을 통해, 도덕과 과학과 예술을 통해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합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말로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악당들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자신의 행동으로 그분을 모독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 왕’이란 표현만으로도 기분이 상하기까지 합니다.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 왕직’이 정치적 용어로 생각될 수도 있다는 듯이 그 말에 대해서 고지식하게 반대합니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왕이라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길 거부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의 계율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계율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경이로운 사랑(愛德)의 계명조차도 말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가까이 다가가길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야망은 스스로의 이기심을 섬기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주님께서는 제게 “저는 섬길 것입니다”라고 말없이 반복해서 외치도록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이 굳세지도록 해달라고 주님께 부탁드립시다. 매일매일의 일상생활에서 소란 떨지 말고 천진한 마음으로 당신의 부르심에 항상 충실하게 해달라고 간청합시다. 그리고 우리 마음 깊이 그분께 감사드립시다. 우리는 당신 사랑의 대상이자 당신의 자녀로서 그분께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의 입은 젖과 꿀로 넘쳐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관해 얘기하며 참으로 큰 기쁨을 찾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자유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쟁취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주님 

우리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베들레헴에서 목격했습니다. 바로 그 사랑스러운 아기가 온 우주의 주님이십니다. 우리 함께 이 사실을 묵상합시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그분께서 지으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들이 아버지 하느님과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당신이 흘린 성혈로 하늘과 땅 사이의 평화를 다시 세우셨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계신 임금이십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뒤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제자들에게 흰옷을 입은 두 천사가 말했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사도 1,11)

비록 인간의 정치 권력을 가진 임금들은 오래 가지 못하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통치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원무궁토록 다스리십니다” (탈출 15,18), “그분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이고 그분의 나라는 대대로 이어지리라.” (요한 4,31)

그리스도의 나라는 단순한 비유적 표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사람이 되셨을 때 취하셨던 똑같은 육신으로 살아계십니다. 또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을 때의 그 영광스러운 육신 또한 말씀이 사람이 되신 모습 그대로 계속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진정한 하느님이시고 또한 진정한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살아계시고 다스리십니다. 그리스도는 우주의 주님이십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그 존재를 유지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분은 가장 영광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시지 않나요? 왜냐하면 당신의 나라는 비록 이 세상에 있지만, “이 땅에 속하지 않기” (요한 18,36)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는 빌라도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요한 18,37) 메시아에게 눈에 보이는 찰나의 권능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잘못 판단했던 것이지요.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 (로마 14,17)

하느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누리는 진리와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이 있는 곳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이는 곧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활동이자, 인간의 역사가 끝나고 마지막 날에 인간을 심판하기 위해 우리 주님께서 오실 때 절정에 이를 하느님의 역사(役事)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가르침을 주기 시작하셨을 때 정치적 계획(政綱)을 내세우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태 3,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기쁜 소식을 널리 알리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곧 오실 그 나라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 그리고 그분의 정의는 곧 거룩한 삶이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추구해야만 하는 것이며, 진정으로 필요한 유일한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구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초대입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마태 22,2-3) 그러므로 주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라는 진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누구든 자유롭게 그리스도 사랑의 요청에 응답한다면 그 누구도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사랑의 요청이란, 다시 태어나는 것 , 영적으로 단순해져서 어린 아이처럼 되는 것 ,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으려는 모든 것을 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뿐 아니라 행동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결연히 노력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분투하는 자만이 영원한 유산을 받을 자격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지상에서 완성되지 않을 것입니다. 구원이나 심판의 최종 판결은 이곳 지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씨 뿌리는 것과 같고 , 겨자씨가 자라나는 것과 같습니다. 마지막에 그것은 물고기로 가득 찬 그물과 같을 것입니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처럼 모래 위에 던져져서 의로운 삶을 산 이들과 사악한 삶을 산 이들로 가려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곳 지상에서 사는 한, 하늘나라는 어떤 여인이 밀가루 서 말 속에 넣었다가 온통 부풀어 올라 버린 누룩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일러주신 나라를 이해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나라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걸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상인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얻어야 할 진주인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참으로 밭에 숨겨진 보물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하늘나라는 얻기 어렵습니다. 그 나라를 얻을 수 있다고 아무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인간의 겸손한 울부짖음은 하늘나라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도둑들 중 한 명이 주님께 간청했습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카 23,4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