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 목록

5«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그리스도인의 성소 → 하나님의 선택 항이 있음.

새로운 전례주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미사의 입당송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시작과 밀접하게 연관된 ‘어떤 것’에 관해 깊이 생각하게 해줍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에게 주신 ‘부르심(聖召)’입니다. “주님, 당신의 길을 제게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제게 가르쳐 주소서.” (시편 25,4). 우리는 주님께 우리를 인도해달라고, 당신의 발자국을 보여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신 계명을 온전히 실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바랍니다. 그 계명은 곧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자 결심했을 것입니다.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상황들을 생각해봅시다. 저는 여러분이 저와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께 감사할 것이라고 여깁니다. 진심으로 겸손히 감사한다면 여러분은 더욱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어떤 내세울 만한 일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보통 우리는 어렸을 때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부모님으로부터 하느님께 기원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런 뒤에는 우리 주님께 대한 시선을 놓치지 않도록 우리의 선생님과 친구들, 지인들이 여러모로 도와주었습니다.

예수님께 여러분의 마음을 여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이야기를 그분께 털어놓으십시오. 모두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일반화해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느 날 여러분처럼 평범한 어느 그리스도인이 여러분의 눈을 뜨게 해줬습니다. 여러분의 눈앞에 심오하고도 새롭고 복음서처럼 유구한 전망(지평)을 열어줬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진지하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도들 중의 사도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그때 여러분의 심정은 어땠나요? 여러분은 십중팔구 혼란스러워서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유로운 의지로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하느님께 말씀드린 다음에야 비로소 현실에 안주하려던 안일한 마음이 사라지고 진정한 평화가 찾아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스스로 원했다는 사실이 바로 가장 초자연적인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굳세고도 그칠 줄 모르는 기쁨이 여러분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그 기쁨은 여러분이 예수님을 버리기 전에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특권층의 일원으로 선택된 사람들에 관해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고, 선택하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성경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에페 1,4)

이런 생각이 여러분의 자존심을 채워주거나,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여기도록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주신 성소의 뿌리이며, 이는 곧 우리가 겸손해야만 하는 근거가 됩니다. 우리는 화가의 붓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지는 않습니다. 걸작을 만드는 데 화가의 붓이 한몫하긴 하지만, 우리는 화가만을 믿을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창조주이자 모든 인류의 구원자이신 그분의 손에 들린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함께 얘기해온 것들에 관해 기록한 선례들을 생각할 때마다 크게 고무됩니다. 첫 열두 제자를 부르신 복음서의 기록에서 차근차근 그 내용을 짚어봅시다. 그리고 천천히 묵상합시다. 우리 주님의 거룩한 증인들에게,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도와달라고 간청합시다.

제가 매우 좋아하고 공경하는 첫 사도들은 인간적으로는 별로 내세울 게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오를 제외하면 사도들은 그저 그런 어부들에 불과했습니다. 세리였던 마태오만은 아마도 어렵지 않은 생활을 했겠지만, 그마저도 예수님 말씀을 듣고는 모두 버렸습니다. 나머지 사도들은 밤을 새워 고기를 잡아야만 근근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곤궁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지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초자연적인 일들에 대한 그들의 반응으로 미루어봤을 때, 그다지 영민한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가장 기초적인 예시와 비유들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스승이신 예수님께 다가가 ‘그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주십시오.’(마태 15,15) 하고 부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 관해 얘기하며 ‘누룩’의 비유를 사용하셨을 때 사도들은 자기들이 빵을 사오지 않은 것에 대해 나무라시는 걸로 잘못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사도들은 가난하고 무지했습니다. 그들은 그리 단순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야심까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종종, 그들 생각에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세우실 것이며, 그때 자신들 가운데 누가 가장 높은 자가 될지 논쟁했습니다. 심지어 최후의 만찬의 그 친밀한 분위기에서도,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 스스로 죽으시려는 그 숭고한 순간에서 조차도 그들은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신앙이요? 그들은 거의 신앙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 점을 지적하셨지요. 그들은 죽은 자가 일어나고, 온갖 질병이 치유되고, 빵과 물고기가 불어나고, 폭풍우가 잠잠해지고, 마귀가 내쫓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즉시 반응한 사람은 사도들의 지도자 역할로 선택된 베드로 성인뿐이었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 16, 15) 하지만 베드로의 신앙은 자신의 한계에 매몰된 믿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고난받고 죽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을 반박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은 나무라셔야만 했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태 16,23) 이와 관해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베드로는 너무나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은 존엄하신 주님께 맞지 않으며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베드로를 나무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고통은 나의 존엄에 걸맞는 일이며 내가 당해야 할 일이다. 나의 존엄과 나의 위신(威信)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네 마음이 인간의 사고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신앙심 얕은 사람들이 적어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만은 남달랐을까요? 그들은 말로는 분명히 그분을 사랑했습니다. 때때로 그들은 열정에 휩싸여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요한 11,16)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그 진실의 순간에 요한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도망쳤습니다. 사도들 중 막내였던 소년 요한만이 진정한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주님께서 매달리신 십자가 곁에는 오직 요한만 눈에 띄었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죽음만큼 강한 사랑을 자기 안에서 찾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 사람들은 모두 우리 주님께서 부르신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신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져 “교회의 기둥”이 되기 전까지 (갈라 2,9) 제자들은 여전히 그러한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결점과 단점을 지닌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행동보다는 말이 앞서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마태 4,19), 구원사업의 협조자이자 하느님의 은총을 나눠주는 이들이 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가진 완전한 인간이 되고자 하셨음을 깨닫고 저는 매우 행복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묵상할 때에 저는 감동합니다.

열 두 제자들과의 관계를 시작으로 복음서에 기록된 몇 가지 사건들을 꼽아봅시다.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했던 사도 요한 성인은 그리스도와 이야기 나눴던 잊을 수 없는 첫 대화를 이렇게 썼습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요한 1,38-39)

이 거룩하면서도 인간적인 대화는 요한과 안드레아,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다른 제자들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그로 인해 제자들의 마음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강가에서 그들에게 주신 권위 있는 가르침을 들을 준비가 돼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 4,18-20)

그 후 3년 동안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과 함께 삶을 나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알게 되셨고, 그들의 질문에 답하시고, 그들의 의심을 풀어주셨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라삐’이시며,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스승이시며, 동시에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분 또한 제자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가시는데 제자들이 그분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응시하면서 그분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들으려고 애쓰고 있었을 겁니다. 예수님이 돌아오셨을 때 제자들 중 한 명이 말했습니다. “‘주님,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를 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루카 11,1-2)

첫 번째 파견에서 돌아왔을 때 제자들은 자신들이 행한 첫 임무의 결실에 놀라워하며 사도직 활동의 즉각적인 결과를 예수님께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같은 방법으로 하느님의 권위와 인간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애정으로 사도들을 만나셨습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마르 6,31)

예수님의 승천 직전, 지상에서의 삶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있습니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요한 21,4-5)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어느 누구나 물었을 질문을 건네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분은 하느님으로서 말씀하십니다. “‘그물을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하고 말하였다.” (요한 21, 6-7)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물가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 쉰 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요한 21,4-13)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고귀하면서도 깊은 애정이 담긴 모습을 제자들이라는 작은 집단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거룩한 여인들에게도, 니코데모와 같은 산헤드린의 대표들에게도, 자캐오 같은 세리에게도, 그리고 병자들과 건강한 이들에게도, 율법학자와 이교도들에게도, 개인에게도, 군중에게도 똑같이 보여주셨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당신 머리를 뉘어 쉴 곳도 없었다고 전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분에게 가깝고 좋은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들은 항상 예수님이 가까이 계실 때면 그분을 자기 집에 모시고자 소망했습니다. 또한 복음서는 병든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연민과, 무시 받거나 잘못을 저지른 이들을 바라보시는 당신의 슬픔, 위선과 마주하실 때 내보이시는 그분의 화를 전해줍니다. 예컨대 예수님께서는 죽은 라자로 때문에 슬피 우셨습니다. 복음서는 또한 성전을 모독하는 환전업자들에 대한 당신의 분노와 나임 마을에 사는 과부의 슬픔에 움직이신 주님의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여러 해 전에 있었던 제 개인적인 경험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어느 날, 매우 고운 심성을 지녔지만 신앙이 없었던 한 친구와 함께 있었는데, 그가 지구본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거 봐! 북쪽에서 남쪽까지, 동쪽에서 서쪽까지…” 그래서 제가 물었죠. “내게 뭘 보라는 거야?” 그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실패를 보라는 거야. 지난 2천 년 동안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인류의 삶에 전하기 위해 노력했어. 하지만 그 결과를 보라고.” 친구의 얘길 듣고 저는 정말 슬펐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님을 모른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 중에도 많은 이들이 마치 그분을 모르는 것처럼 살고 있다는 생각에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제 괴로운 마음은 금방 사랑과 감사로 바뀌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구원사업에 협력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삶과 가르침은 이 세상에서 항상 유효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은 참으로 충분합니다. 아니, 충분함 그 이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노예가 아닌 자녀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구원사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매우 감동적인 언어로 우리에게 얘기합니다. 주님 수난의 남은 부분을 우리의 육신과 우리의 삶 안에 채워 넣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콜로 1,24)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주신 사랑과 신뢰에 응답하기 위해서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을 위태롭게 하는 것, 즉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드리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하는 일이야말로 진정으로 소중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도신경을 외웁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를 믿으며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을 믿나이다. 또한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온 교회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성령으로 인해 생명력을 얻음을 확신합니다. 이와 함께 우리는 죄의 용서와 부활의 희망에 기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도문이 과연 우리 마음의 깊은 곳까지 깃들어 있습니까? 아니면 단지 우리 입술에만 걸려 있습니까? ‘성령 강림 대축일’이 주는 승리와 기쁨, 그리고 평화의 거룩한 메시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데에 있어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기반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을 알아보는 것 

여러분께 털어놓을 것이 있습니다. 저를 매우 유감스럽게 만들어 행동하게 하는 어떤 것에 대한 얘깁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들,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엄청난 행복에 관해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 관한 생각입니다. 그들은 이름도 모르는 기쁨을 찾으려고 눈먼 사람들처럼 살아갑니다. 그들은 진정한 행복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길 위에서 방황합니다. 이들 중 어느 누가 트로아스에서 꿈에 환시를 본 뒤 바오로 사도가 가졌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오로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 저희를 도와주십시오.’하고 청하는 것이었다. 바오로가 그 환시를 보고 난 뒤,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떠날 방도를 찾았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사도 16, 9-10)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신다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을 통해서 그분께서는 우리를 재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따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에게 주신 부르심을 별것 아닌 것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피상적으로 불화와 질시 속에 시간을 낭비합니다. 훨씬 더 나쁜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이들이 지닌 신앙이나 신심의 특정한 측면을 꼬투리 잡아 억지로 분노하곤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는 대신 파괴를 일삼고 비판하는 일에 몰두합니다. 우리는 가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심각한 문제점들을 발견합니다. 그런 문제들이 있는 게 사실이기도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들 자신이나 우리들의 단점이 아닙니다. 진짜로 중요한 유일한 것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얘기해야 하는 주제는 우리들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어야 합니다.

이런 생각들은 예수님의 성심을 공경하는 데 있어서 위기가 닥쳤다는 추측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위기가 아닙니다. 예수 성심에 대한 진정한 공경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진정으로 살아 있으며, 인간적인 동시에 초자연적인 의미로 충만합니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리를 회개와 자기희생으로 이끌며,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구원의 신비를 사랑하며 이해하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정한 성심 공경과 쓸모없는 감상의 표현을 구별해야 합니다. 정통교리가 배제된 허울뿐인 신심과도 구분해야 합니다. 여러분 못지않게 저도 그저 보기에만 그럴듯한 가식적인 예수성심 조각상이나 모형 같은 것들을 싫어합니다. 그런 것들은 일반적인 상식과 그리스도인의 초자연적 관점을 함께 지닌 사람들에게 공경의 마음을 전혀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이런 특별한 문제들은 앞으로 사라지게 되겠지만, 이를 일종의 교리나 신학적 문제로 돌리는 것은 그릇된 논리입니다.

만약 실제로 위기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 마음속의 위기입니다. 인간은 이기적이고 편협하며 워낙 시야가 좁아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위대한 사랑의 깊이를 실감하지 못합니다. 성교회가 ‘예수 성심 대축일’을 제정한 이후 대축일 전례는 바오로 성인의 서간을 독서에 포함시킴으로써 참된 신심의 양식을 제공해왔습니다. 오늘 독서 말씀에서 바오로 성인은 지식과 사랑, 기도와 생활을 아우르는 ‘관상하는 삶’의 전체적인 흐름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그러한 관상의 삶은 예수 성심께 대한 공경으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도의 말씀을 통해 다음과 같은 여정을 우리가 따라오도록 초대하십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에페 3,17-19)

하느님의 충만하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사랑 안에서 드러나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왜냐하면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머무르는” (콜로 2,9) 곳이 바로 예수 성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강생과 구원, 그리고 성령 강림을 통해 이 세상에 넘쳐 흐릅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의 이 위대한 계획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섬세한 사랑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