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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그리스도인의 성소 → 인내한다는 수단 항이 있음.

하느님께 드리는 응답 

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는 하느님 자비의 보호 아래 성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항상 마음에 새기고 하느님 자녀답게 행동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부르심이 확실히 뿌리내리게 하는 주요한 방법으로 무엇이 있을까요? 오늘 저는 그 가운데 두 가지를 제시하고자 하는데,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데 있어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나는 ‘내적 생활’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신앙에 대해 깊이 알게 해주는 ‘교리교육’입니다.

먼저 ‘내적 생활’에 관해 말씀드리면, 사실 이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정말로 드뭅니다. ‘내적 생활’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아마도 어두운 성전 같은 것을 상상할 것입니다. 저는 25년 넘게 ‘내적 생활’이란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줄곧 이야기해왔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의 ‘내적 생활’입니다. 왁자지껄한 도시에서, 대낮의 햇빛 속에서, 거리에서, 일터에서 늘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 가족과 함께 있거나 잠깐의 휴식을 취하며 살아가는 보통 그리스도인들의 ‘내적 생활’ 말입니다. 그들은 온종일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내적 생활’이란 지속적인 기도 생활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은 기도의 필요성을 진정 찾지 못했나요? 여러분을 거룩하게 이끄시는 하느님과의 친교로 나아가고픈 절실함이 없는 건가요? 바로 그것이 ‘항상 기도하는 사람들’이 이해했던 그리스도인의 신앙입니다. 이와 관련해 교부(敎父)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것을 인간이 사랑함으로써 인간이 하느님이 된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고, 우리 아버지이시며 우리를 위해 실제로 염려하시는 그분께 감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비록 감정의 문제는 아니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마치 영혼에 새겨진 자국처럼 조금씩 조금씩 우리에게 느껴집니다. 사랑을 다해 우리를 쫓아오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묵시 3,20). 여러분의 기도생활은 어떻습니까? 때때로 낮 동안에 그리스도와 더 길게 이야기하고픈 충동을 느끼지 않나요? ‘제가 나중에 모든 것을 털어놓을게요.’라고 하면서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는 대화를 그분과 나누고 싶지 않나요?

우리 주님과의 만남을 위해 특별히 예비된 이 기도 시간에 가슴은 넓어지고, 의지는 굳세어지며, 주님 은총에 힘입어 우리 마음속 인간의 현실세계를 초자연적인 내용으로 가득 채우게 됩니다. 그 결과 여러분의 행동을 개선하고 모든 사람들과 더욱 사랑 넘치는 관계를 맺으며, 사랑과 평화를 향한 그리스도교의 투쟁을 위해 마치 훌륭한 운동선수인 것처럼 마지막 힘까지 남김없이 쏟아내겠다는 명확하고도 실제적인 결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는 우리네 심장의 고동처럼, 우리의 맥박처럼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집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확인하지 않는다면, ‘관상생활(觀想生活)’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관상생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의 과업은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으려는 건물이 주님의 집이 아니라면 집 짓는 사람들의 수고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행의 필요성 

수도자가 아닌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거룩함에 이르기 위해서 세상을 등질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찾아야 하는 장소는 다름 아닌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수도복이나 주교의 표지와 같은 외적인 표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가진 모든 헌신의 표징은 ‘내면(內面)’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변치 않는 현존하심’과 ‘고행의 정신’이 바로 그 표징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변치 않는 현존하심’이 유일한 필수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고행의 정신’은 오감(五感)으로 드리는 기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부르심(성소)은 희생과 보속, 속죄의 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인류의 모든 죄를 속량해야 합니다. 그 죄는 하느님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수없이 얼굴을 돌린 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당신의 희생과 십자가의 고통을 몸에 짊어지고 다녀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2코린 4,10) 우리가 가야 할 길은 희생의 길입니다. 이렇게 스스로를 버림으로써 우리는 기쁨과 평화를 찾게 됩니다. (gaudium cum pace)

우리는 세상을 슬프게 바라보지 않습니다. 예전에 성인들의 전기를 썼던 몇몇 작가들은 하느님의 종으로 살아갔던 그들 삶의 아주 특별한 부분만을 부각시키는 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심지어 성인들이 요람에 누워 있었던 아주 어린 시절의 특별한 면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성인들 중 몇 명은 아기 때 울지도 않았으며, 금요일에는 보속을 실천하기 위해 엄마 젖도 빨지 않았다고까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훼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저도 태어날 때 심하게 울었을 것이고, 단식재나 사계재일(四季齋日)과 무관하게 모유를 실컷 먹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우리는 비슷한 날들이 하루하루 이어지는 일상 안에서하 느님의 도움으로 진정한 보속(참회)의 시간을 발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개선하기로 결심합니다. 이것은 우리 영혼 안에 계시는 성령의 은총과 감도(感導)를 받기 위해 우리 스스로 준비하는 길입니다. 제가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러한 은총을 통해 기쁨과 평화, 그리고 우리의 노력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 찾아옵니다.

고행은 우리의 삶을 깊이 있게 해줍니다. 고행 가운데 최고는 육신의 욕망과 눈의 욕망을 극복하는 것이며, 일상의 사소한 일들부터 생활 속에 만연한 욕망들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고행은 다른 사람들을 낮추어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사람들과 관계 맺음에 있어서 더 많은 세심함과 이해심, 그리고 개방성을 얻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쉽게 화를 낸다면, 여러분의 모든 사고가 오직 여러분 자신만을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긴다면, 여러분은 스스로 절제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불필요한 것들과, 때로는 필요한 것들이라도 여러분이 이를 포기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면, 여러분이 바라는 대로 일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우울해진다면, 이 또한 여러분이 욕망을 절제하지 않은 것입니다. 반면에 여러분 자신이 “모든 이들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1코린 9,22) 이 되는 법을 알고 있다면, 여러분은 분명히 ‘욕망을 절제했다’고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과 이성 

기도와 보속의 삶,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깨달음은 우리를 참으로 신심(信心) 깊은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 돌봐주시는 어린아이가 됩니다. ‘의심 없고 깊은 신심’은 어린이들의 미덕입니다. 만약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품으로 피신하려 한다면, 그 아이는 자기가 작고 가여운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영적 어린이의 삶’에 관해 자주 묵상해왔습니다. 영적 어린이라고 해서 용기(勇氣)라는 미덕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적 어린이가 되려면 강한 의지와 검증된 성숙함이 필요하고, 동시에 활짝 열려 있으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만큼 독실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무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가능한 한 진지하고 철저하게 신앙에 관해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린아이의 신심’인 동시에 ‘신학자들의 명확한 교리’여야 합니다.

신학적 지식을 키우고, 견실하고 확고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은 무엇보다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에 의해 촉발됩니다. 또한 이러한 열망은 하느님의 손길로 만들어진 이 세상의 심오한 의미를 깨우치기 위한 경건한 영혼의 관심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이따금씩 깨진 레코드판 같은 단조로운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몇몇 사람들이 신앙과 과학, 인간의 지식과 하느님의 계시 간에 빚어지는 불일치성을 부각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겉으로만 불일치하게 보일 뿐이지만- 문제의 본질적 요소들을 이해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만약 세상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다면,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과 닮은 인간을 만드시고 거룩한 빛을 그에게 주셨다면, 우리네 지성(知性)의 임무는 모든 피조물의 본성에 깃든 거룩한 의미를 밝혀내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오직 부단한 노력만이 이뤄낼 수 있는 일입니다. 신앙의 빛으로 우리는 모든 피조물들에 담긴 초자연적 목적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자연의 질서’가 훨씬 더 높은 수준인 ‘은총의 질서’로 격상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지식이 성장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지적인 노력은 그것이 진실하다면, 언제나 진리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진리다” (요한 14,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틀림없이 진리를 알고자 하는 허기를 갖고 있습니다. 가장 추상적인 지식에서부터 구체적인 기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하느님과 연관될 수 있으며,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거룩해질 수 없는 인간의 일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이 우리 자신을 성화(聖化)하는 기회가 되며, 우리와 함께 일하는 이들을 성화하기 위해 하느님과 협력하는 좋은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뿜어내는 빛은 결코 계곡 깊은 곳에 숨겨져선 안 됩니다. 그 빛은 산의 정상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마태 5,16)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하는 것이 곧 기도하는 것이며,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이런 정신으로 연구하는 것 역시 기도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기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우리의 모든 활동이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해 그분과의 친교를 풍부하게 해줄 수 있으며, 또한 그래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명예로운 일이 기도가 될 수 있고, 기도하며 해온 모든 일들이 사도직 활동인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영혼은 순진하고도 튼튼한 삶의 일치를 이뤄내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이시고, 착한 인도자이신 분 

하느님의 부르심은 항상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도록 우리 앞에서 별이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별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별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비논리적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오는 길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내적 삶의 어떤 순간에는 별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는 대부분 우리가 잘못했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주신 성소의 거룩한 광채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부르심이 무엇인지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우리들 자신의 고행길을 걸으면서 스스로 일으킨 먼지들이 투박한 구름을 만들었을 것이고, 그 구름이 우리 앞에 비추던 빛을 가렸을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동방박사들을 본보기로 삼아 질문해봅시다. 헤로데는 자신의 지식을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하는 데 써버렸습니다. 하지만 동방박사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선한 일을 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헤로데에게 갈 필요도 없고, 세상의 현자들을 찾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에 명확한 가르침(교리)을 주셨고, 성사 안에서 넘치는 은총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인도하고 이끌어줄 사람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항상 되새겨주는 사람들이 언제나 우리 곁에 있도록 주님께서 준비하셨습니다. 우리에겐 또한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지혜의 보물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보전해온 하느님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사를 통해 베풀어지는 그리스도의 은총이 그것입니다. 우리 곁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증언과 본보기 또한 지혜의 보물들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선한 삶을 통해 하느님께 충실하게 나아가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께 충고 한 마디 하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밝게 빛났던 빛을 잃어버린다면, 그때마다 착한 목자에게 의지하십시오. 그런데 누가 착한 목자일까요? 착한 목자는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수행함으로써 “(양 우리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 입니다. 그는 삯꾼처럼 행동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삯꾼은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그렇게 되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립니다.” (요한 10,1-12). 이 성경 말씀들을 되새겨보십시오. 결코 헛된 말이 아닙니다. 목자와 양들, 그리고 양의 우리와 양 떼에 관해 애정을 가득 담아 얘기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영혼에게 좋은 인도자가 필요하다는 실질적인 증거로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좋은 목자’에 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만약 나쁜 목자가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이리를 보고 도망하는 삯꾼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쁜 목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아닌 자기 자신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나쁜 목자는 영적 자유를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나무랄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이리는 양의 목을 물어 낚아채고, 사탄은 인간을 유혹해 불의를 범하게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침묵하며 나무라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삯꾼인 것입니다. 이리를 보고 달아났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겠지요. ‘아니야, 나는 여기 있다고. 달아나지 않았어’… 하지만 저는 여러분께 대답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침묵했으니 달아난 것입니다. 두려웠기 때문에 여러분은 침묵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는 항상 풍성하게 많은 착한 목자들을 통해 스스로의 거룩함을 드러냈고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가 단순해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아둔해지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침묵하는 삯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닌 얘기를 하는 삯꾼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착한 목자를 찾아가야 합니다. 사소한 일에서조차 주님께서 우리를 어둠 속에 내버려 두신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굳건하지 않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야말로 우리는 착한 목자에게 가야 하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는 당연히 우리 영혼의 문으로 들어옵니다. 그는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며 말과 행동을 통해 사랑 넘치는 영혼이 되고자 합니다. 그 역시 죄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항상 그리스도의 용서와 자비를 믿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여러분의 양심이 말해준다면, 그 잘못이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거나 잘못인지 아닌지 의심스럽더라도 고해성사를 드리러 가십시오. 여러분을 돌봐주는 사제를 찾아가십시오. 그는 굳건한 믿음과 영혼의 정화, 그리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용기를 여러분에게 요청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적합한 자격을 갖춘 사제라면, 누구에게나 찾아가서 고백할 수 있는 엄청난 자유를 여러분에게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신중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완전한 자유의지로 자신이 착한 목자로 알고 있는 사제에게 갈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제는 여러분이 다시 한번 주님의 별을 올려다보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입니다.

황금, 유향, 그리고 몰약 

복음서는 동방박사들의 심정을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마태 2,10) 왜 동방박사들은 그토록 기뻐했을까요? 왜냐하면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확증을 받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별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는 확증 말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별을 보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별이 그들의 영혼 속에서 항상 빛나도록 간직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성소입니다. 믿음을 잃지 않는다면, 별은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그야말로 “세상 끝날까지” (마태 28,20) 우리와 함께 계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있다면, 사라졌던 별은 또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성소가 진짜라는 이 생생한 증거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더욱 크게 만드는 위대한 기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마태 2,11) 우리도 동방박사들처럼 인성(人性) 안에 숨으신 하느님, 예수님 앞에 무릎 꿇습니다. 우리는 그분께 다시 한번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당신의 거룩한 부르심에 등 돌리기를 원치 않겠습니다. 결코 주님과 떨어지지 않겠습니다. 주님을 충실히 따르는 길에 장애물이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치워버리겠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모든 영감에 진심으로 따르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온 마음으로, 그리고 저는 제 온 마음을 다해, 깊은 침묵의 외침으로 충심을 담아 기도하며 아기 예수님께 얘기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예화에 나오는 착한 종처럼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마태 25,23) 라는 주님의 응답을 들을 수 있도록 우리의 의무를 다할 수 있기를 갈망한다고 말입니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마태 2,11) 성경의 이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 잠시 생각해봅시다.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우리가 하느님께 예물을 드리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자, 성경을 읽어봅시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야고 1,17). 주님의 선물이 지닌 심오함과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싶어도 인간은 결코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았더라면” (요한 4,10) 하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바라고, 무엇보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정의를 추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면 나머지 것들은 저절로 따라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구원경륜(救援經綸)’ 안에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사랑 가득히 보살펴 주십니다. “이 사람은 이런 은사, 저 사람은 저런 은사, 저마다 하느님에게서 고유한 은사를 받습니다.” (1코린 7,7). 그러므로 하느님께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봉헌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한다면, 그것은 쓸데없는 염려일 것입니다. “빚을 갚을 수 있는 길이 없는 채무자처럼 (마태 18, 25)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예물은, 더 이상 하느님께서 받으시지 않는 구약 성경의 제물과도 같을 것입니다.“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히브 10,8)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무언가를 주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직접 당신이 원하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그분은 재물에도, 땅의 열매나 짐승들에게도, 바다나 대기(大氣)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당신께 속한 것이니까요. 그분께서는 무언가 친밀한 것을 원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당신께 기꺼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내 아들아, 너의 마음을 나에게 다오.” (잠언 23,26) 아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나눠 갖는 것에 만족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것을 원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우리들 자신을 하느님께 드릴 때에 다른 예물도 우리 주님께 봉헌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황금을 드립시다. 우리가 영적으로 돈과 물질적 재화로부터 벗어나 있을 때, 우리가 얻은 그 귀한 금을 주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왜냐하면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것들을 사용하되 우리 마음이 그에 얽매이지 않아야 하며, 모든 인류의 선익(善益)을 위해 그것들을 잘 사용해야 한다고 단언하셨습니다.

세속의 재물이라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이 그것들을 우상으로 삼아 떠받들고 숭배할 때 재물은 가치를 잃어버립니다. 선한 일을 하는 도구가 된다면 그 재물은 고귀해집니다. 의롭고 자애로운 그리스도교적인 일에 쓰일 때 재물은 고결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재물을 마치 보물인 양 추구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보물은 여기, 이 구유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보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사랑과 소망의 중심에 그분이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6,21)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성소의 존엄함을 생각할 때, 우리는 교만하고 건방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리스도인의 사명에 관해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되는 우리의 실수는, 우리가 흙으로 만들어졌으며 먼지로 돌아갈 비천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도록 가로막습니다. 악(惡)은 우리 주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우리들 가슴 깊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곧잘 잊어버립니다. 이러한 악은 우리를 이기적이고 비열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모래와 같이 허술하고 위험한 존재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은총만이 굳건한 대지(大地)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돌아봅시다. 또는 현재 세상이 처한 상황을 살펴봅시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신 지 20세기가 지난 오늘날에,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별로 없음을 알게 됩니다. 또한 자신의 성소에 충실한 사람은 더더욱 소수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몇 년 전에 착하지만 신앙을 갖지 않은 어느 남자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세계지도를 가리키며 제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실패하셨는지 보십시오. 수 세기 동안 인간에게 당신의 가르침을 전하려 했지만, 그 결과가 바로 지금 보시는 대로입니다. 어디에도 그리스도인이 없네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요즘 굉장히 많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실패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삶이 세상을 계속 풍요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당신 아버지께서 맡기신 그리스도의 과업이 지금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분의 권능은 역사를 꿰뚫고 올곧게 전진합니다. 그분의 권능은 진정한 삶을 가져다주십니다. 그리고 “아드님께서도 모든 것이 당신께 굴복할 때에는, 당신께 모든 것을 굴복시켜 주신 분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1코린 15,28)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세상 안에서 이 사업을 이뤄가시는 데에 우리가 협력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자유’라는 위험을 감수하십니다. 저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께 깊이 감동받았습니다. 그분은 무방비 상태로, 어떤 저항도 할 수 없는 힘없는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 가까이 다가오셔서 우리 인간의 수준까지 스스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필리 2,6-7)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자유와 불완전함과 비참함을 존중하고 경의를 표해주셨습니다. 그분은 진흙으로 만든 그릇 안에 당신의 거룩한 보물을 담기로 동의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 담긴 보물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강하심과 우리의 연약함을 한데 섞는 일을 두려워하시지 않았습니다.

사도들 중의 사도가 된다는 것 

빛으로 온 세상을 채우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의 사명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이 사명은 세상 끝까지 하느님 사랑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든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 삶을 바쳐야만 합니다.

이야기를 좀 더 해보겠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되지 않도록 간절히 바라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에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주는 이 거룩한 과업을 돕도록 다른 사람들을 격려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다음과 같이 얘기했습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나아가는 한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과 함께하고픈 마음을 품게 하십시오. 주님을 향해 가는 길에 동행하도록 바라십시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신 비유를 명심하십시오. “사람들이 자는 동안” (마태 13,25) 가라지를 뿌리는 이들이 왔다는 그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인 숱한 경험들에 휩싸여 이기적이고 피상적인 것들의 무기력함에 너무도 쉽게 스스로 휘말려 들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세상과 삶에 대한 진정한 의미와 마주하기를 꺼리게 되고 맙니다. 이런 무기력 상태는 아주 나쁜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인간을 슬픔의 노예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유감스러워해야 할 사례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경우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들에게 주신 성소의 모든 결실들을 살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대함이 부족해서 그렇게 살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은총은 그것을 숨기라고 주어지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라고 내려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열심히 노력하길 거부하는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현세는 물론 내세에서도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선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기쁨과 평화(平和)에 대한 즉각적인 약속이 함께하는 거룩한 경이로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아차려서 관대해지는 방법을 아는 경우에만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선물을 받음으로써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를 계산하지 않을 때에 한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위험한 잠에 빠진 사람들을 깨워야 합니다. 삶이란 놀이의 대상이 아닌, 우리가 키워내야 하는 거룩한 보물이란 사실을 그들에게 일깨워줘야 합니다. 또한 선한 의지와 열망을 갖고 있지만 어떻게 실천하는지 모르는 이들에게 그 길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재촉하고 계십니다. 우리들 각자가 한 명의 사도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사도들 중의 사도가 돼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불러온 이들이 다시 또 다른 사람들을 불러와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모든 이들에게 알리도록 힘을 북돋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