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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고랑»에는 진실를 주제로 하는 24 항이 있음.

확실한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그 사람들은 공평을 가장하면서 말했습니다. 종파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진리 그 자체를 가진 사람은 종파주의자가 될 수 없다고 설명하자 그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사도직으로 뛰쳐나갈 때에 확신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즉, 사도직이란 항상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와 진정한 기쁨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대가 ‘거의’ 모든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은 인정합니다….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성실하지 않다, 라고 저는 말합니다.

그대는 불평합니다…, 그리고 저는 성스러운 비타협적인 태도로 계속합니다: 그대는 불평합니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제가 아픈 데를 찔렀기 때문입니다.

“사물을 본래 이름으로 부르는 습관을 들이려고 노력합니다. 특히 없는 호칭을 찾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써온 걸 보니, 성실함이 무엇인지 당신도 알 게 된 것 같군요.

이 점에 관해서 조심스럽게 생각하십시오: 투명해지는 것은 사람이 보이게 되기를 원하는 데 달려 있기보다도 차라리 사물을 감추지 않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물건을 유리 바닥에 놓아 알아보게 하는 일이고, 공기를 보이게 만들려고 하는 일은 아닙니다.

어떤 일을 하든 하느님 앞에 있음을 잊지 말도록. 그러면 남에게 숨길 일은 없어집니다.

그대는 십자고상 앞에서 기도하고 있었고, 이런 결심을 하였습니다: 진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이 나 때문에 진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보다 낫다.

퍽 자주 진리가 사실이 되기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진리는 일관된 삶을 요구하니 더욱 그렇습니다.

사실대로 말한다고 싫은 내색을 할 바에야 왜 굳이 묻습니까?

혹시 당신의 실수를 정당화하고 싶어서 당신에게 맞는 진리를 기대했던 것은 아닙니까?

그대가 진리는 크게 존중하고 있다고 보증합니다. 그러니까 그대는 ‘공손한 태도로’, 항상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입니까?

바보 같은 행동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알고, 사랑하고, 지켜야 할 진리를 매일 더 깊이 알고, 강하게 사랑하고, 더 강한 확신을 갖고 지키기를 원하더라도 그것은 절대로 광신이 아닙니다.

추호도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드리지만 거꾸로 거짓 자유의 이름으로 이 정도 행동을 반대하는 사람이야말로 당파 근성의 소유자입니다.

당신의 말에 의하면 ‘열린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 같지만, 당신은 그 기울기에 따라서, 그 사람에게 불리한 것을 모두, 사전에 본인에게 확인하지도 않고 믿어 버립니다.그런 태도는 애덕에 부합한다고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의의 덕에도 위배됩니다.

비방은 가끔 그것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해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비방은 그것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퍼뜨리는 사람들을 정말로 치욕스럽게 합니다. 그리고 후에는 그들이 그들의 영혼 깊은 곳에 한 가지 중압을 가지고 다닙니다.

“왜 무척이나 많은 사람들이 중상을 퍼뜨립니까?”하고 괴로워하며 그대가 묻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잘못으로나, 열광으로나, 또는 악의로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이야기를 타성과 천박함과 무지로 전해 나갑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강조합니다: 그대가 찬양할 수 없고, 그리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때에는, 조용히 하십시오!

중상모략의 희생자들이 침묵 속에서 고통을 참는 동안 ‘사형집행인’들은 겁을 집어치우듯 허세를 부리며 흥분합니다.

당사자와 이야기해 볼 수도, 말할 의지도 없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라면 설령 단언된 것이라 해도 믿지 말아야 합니다.

앙케이트를 실시하는 방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약간의 악의만으로 아무리 고결한 사람이나 경의를 표해야 할 단체에 대해서도 중상을 들어 모아 두툼한 책 열 권으로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사람이나 단체가 효과적인 일을 할 때 욕설은 더욱 심해지지만 그 효과적인 일이 사도직이라면 더욱 그것을 부추기는 듯 심해집니다.

장본인들은 참으로 슬퍼해야 할 짓을 열심히 하고 있지만 그 이상으로 슬퍼해야 할 것은 이처럼 사악하고 천박한 패거리의 스피커 역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지성을 갖추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탈을 쓰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적인 기준을 모르고, 진리를 알지도 못하고, 결실을 맺지도 못한다고 서글프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들, 하느님의 자녀들은 주님께서 “누구이든 너희들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내 말을 듣는 것이다··· “라고 하신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가 되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고, 비슷하게 다른 예수가 되는 것은 결코 허용되지 않습니다.

다른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누구나 자신을 옳다고 생각하고 일합니다. 그런데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하느님입니다. 즉 개개인의 생각을 초월하여 헤아릴 수 없이 사랑해야 할 하느님의 섭리가 반드시 승리합니다.

그러므로 당신 자신을, 주님의 계획들에 반대함 없이, 비록 주님의 계획들이 그대의 “기본적인 생각”에 반(反)해서 진행된다 하더라도, 주님에 의해 인도되도록 내맡기십시오.

일부 인사들이 과학에 의해 얻어낸 귀중한 사물들을 차지하고 배우는 데는, 그것들을 다소 임의적인 과정을 통해 자기네들 자체의 입맛에 맞추는 일에 시간을 소비하는 것보다, 관심을 덜 갖는 것을 보는 일은 괴롭습니다.

그러나 이 점을 깨닫는 일은 틀림없이 그대를 이끌어서 진리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그대의 노력을 배가하도록 해 줄 것입니다.

스스로 연구에 종사하는 것보다 학문이나 기술에 대한 새로운 공헌이나 연구자에게 반론하는 것이 여간 편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 ‘비평가'들이 지식의 절대주인을 표방하며 무식한 자들에게 의견을 떠넘기는 사태를 묵인할 수는 없습니다.

‘모르겠어요, 이해할 수 없어요'라고 다른 사람의 확실한 발언에 반박하고 있었습니다. 실은 그 사람의 무지가 분명해진 것입니다.

당신은 타인에게 상처를 주거나 분열을 일으키거나 편협한 태도를 보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보기에 별거 아닌 견해나 사안에 있어서 양보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런 양보가 많은 사람들에게 싫은 결과를 가져올 텐데 말입니다.

분명히 말하겠습니다: 그런 태도를 계속 취한다면 당신이 그토록 싫어하는 편협, 게다가 가장 싫고 가장 해로운 편협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즉 진리가 선언되는 것을 방해합니다.

한없이 완전한 정의와 자비 그 자체인 하느님은 각기 다른 아이들을, 같은 사랑을 가지고서이기는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취급합니다.

그러니까 평등이란 모든 사람을 같은 저울로 재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