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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하느님의 친구들»에 성덕 → 시작과 다시 시작 항이 있음.

그러나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마음이 어떤 열망을 지니게 되면, 우리의 탐색도 끝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자유는 사라지는 것입니까?” 장담하건대, 우리의 자유는 이전보다 더 활발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일상적인 의무 수행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지루함이나 비정함과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날마다 봉사와 애덕 실천으로써 우리의 헌신을 새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고, 또 여러분 마음속 깊이 새겨 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유와 봉헌 생활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서로를 유지해 줍니다. 오직 사랑 때문에만 자유를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것 말고는 자유를 포기할 아무런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지금 저는 말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봉헌 생활을 할 때마다, 자유는 그들의 사랑을 거듭나게 합니다. 그렇게 거듭난다는 것은 언제나 젊고, 관대하고 높은 이상을 가지고 위대한 희생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저는 포르투갈 말로 젊은이가 ‘os novos’, 곧 ‘새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젊은이는 바로 새사람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비록 제가 꽤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제 기쁨과 즐거움이신 하느님의 제단으로 나아갈 때’(시편 43,4 참조) 젊음을 느끼고 저 자신이 결코 늙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느님께 계속해서 진실하기만 하다면, 사랑은 언제나 저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줄 것입니다. ‘제 젊음이 독수리처럼 새로워질 것입니다’(시편 103,5 참조).

우리가 자신을 속박하는 것은 우리가 자유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만심만이 그러한 속박을 무거운 사슬로 봅니다. 마음이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진정한 겸손은 그분의 멍에가 편하고 짐이 가볍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마태 11,29-30 참조). 그분의 멍에는 자유와 사랑과 일치입니다. 그분의 멍에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얻어 내신 생명입니다.

우리가 길을 가다 넘어지는 고통을 겪을지라도 다시 일어나 계속 움직일 힘을 새롭게 얻는다면, 넘어지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성인이란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람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들에게는 겸손함과 거룩한 완고함이 있습니다. 잠언에 이르기를, ‘의인은 하루에 일곱 번 쓰러져도 일어난다.’(잠언 24,16 참조)고 하였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가엾은 피조물이기에 나약함과 타락을 경험하며 깜짝 놀라고 낙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 안에서 용기를 얻으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감사합니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시편 18,2). 주님 홀로 언제나 저의 힘이시요 피신처이시며 방패이십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내적 생활의 진보를 바란다면, 겸손하십시오. 끊임없이 신뢰심을 가지고 우리 주님께, 그리고 주님의 어머니시며 우리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도움을 간청하십시오. 넘어진 상처가 아무리 심각할지라도 한 번 더 십자가를 끌어안고, 좌절하지 말고 조용히 말씀드리십시오. “주님, 저는 주님의 도움으로 뒤로 물러서지 않고 싸울 것입니다. 주님의 초대에 충실히 응답할 것입니다. 가파른 오르막길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하루하루 단조로운 일과도 감내할 것이며, 도중에 만나는 위험한 바위와 엉겅퀴들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가 저를 돕고 있으며, 이 길의 끝에서 끝없는 기쁨과 사랑이 넘치는 영원한 행복이 저를 기다리고 있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작가는 같은 꿈에서 세 번째 길을 발견합니다. 이 길은 두 번째 길과 마찬가지로 좁고 가파르며 바위투성이입니다. 이 길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무수한 역경 속에서도 엄숙하고 당당하게 걸어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끝은 첫 번째 길과 마찬가지로 끔찍한 낭떠러지입니다. 이 여행자들은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야심으로 하느님의 일을 오염시키고 거짓 지향과 헛된 열정을 지닌 위선자들입니다. “단지 존경을 받으려고 힘들고 고된 일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또한 오직 세속적 보상을 받으려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계명들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입니다. 인간적 이익을 위해서 덕을 실천하는 사람은 단지 몇 푼을 위해서 값을 헤아릴 수 없는 가보를 내다 파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얻을 수도 있었지만, 일시적 명예를 얻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 그래서 사람들은 말하기를, 위선자들의 희망은 거미줄과 같다고 합니다.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해서 거미줄을 만들었지만, 결국은 죽음의 바람 한 줄기에 날아가 버립니다.”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아주 가까이 오셨으므로,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더 높은 곳을 열망하면서 거기로 올라가려 하고 선한 일을 하려고 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그와 비슷한 열망을 불어넣으려고 애쓰는 것은, 주님께서 여러분의 영혼에 심으신 믿음에 대한 확신을 여러분이 갖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일하시도록 여러분이 응답한다면, 여러분은 지금 그 자리에서 예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 유용하게 주님의 도구로 쓰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비겁해져서 하느님의 믿음을 배반하지 않으려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어려움들을 과소평가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어려움들에 직면할 때에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본성이 타락한 결과, 우리 안에는 은총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원리가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원죄 때문에 입은 상처에서 비롯되며, 우리 자신의 개인적 죄들로 더욱 악화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매일의 일들을 통하여 더욱더 위를 향해 올라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 일들은 신적인 동시에 인간적이며, 언제나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끌어 줍니다. 우리는 겸손해야 하고, 마음으로 깊이 뉘우쳐야 하며,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탁해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마치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는 듯이 최선을 다하여 일해야 합니다.

우리가 죽는 날까지 지속될 이 투쟁에서, 우리 안팎의 적들이 폭력을 행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또한 마치 이러한 짐이 부족하기나 한 듯이, 과거의 수많은 잘못들이 아픈 기억으로 떠오르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절망하지 마십시오.” 어려움에 직면한다면(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날 필요도 없고, 대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만), 그 위기를 기회로 삼아 우리 주님과 더욱 가까이 결합하는 데 이용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뽑으셨고 결코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그 시련을 허락하신 것은, 여러분이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주님의 변함없는 보호와 사랑을 더욱더 분명하게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힘을 내십시오. 단언컨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고해성사를 통하여 한결같은 용서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승리할 수 있도록 언제나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1요한 2,1-2).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앞으로 전진하십시오! 우리 주님의 손을 꼭 붙잡고, 하느님께서는 결코 패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어떤 이유에서건 주님을 떠나는 일이 생기더라도, 다시금 겸손하게 돌아오십시오. 날마다, 아니 하루 24시간 동안 되풀이되더라도 아버지의 집을 떠난 탕자로서 다시 아버지를 찾으십시오. 하느님 사랑의 참된 기적인 고해성사 안에서 깊이 뉘우치고 잘못을 바로잡으십시오. 이 놀라운 성사 안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영혼을 깨끗이 하시고 여러분에게 기쁨과 힘을 가득 채우시어, 영적 투쟁을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하느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또한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도 여러분의 발걸음 발걸음을 지켜보시고 인도하여 주십니다.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어울리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하느님이시요 인간이신 주님께서 활동하시는 장면들을 음미하십시오. 인간으로서 또 하느님으로서 우리를 어루만지시며 용서를 베푸시고 당신 자녀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놀라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오늘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복음은 언제나 참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느낄 수 있고 눈치를 챌 수 있으며, 심지어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것을 우리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되는 실패에도 또다시 일어나 전진하는 한 하느님의 보호는 더욱 강력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내적 생활의 본모습입니다.

우리가 내면의 그리고 외적인 장애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받을 상이 없을 것입니다. “경기를 하는 사람도 규칙대로 경기를 하지 않으면 승리의 화관을 얻지 못합니다”(2티모 2,5). 그리고 “싸울 상대가 없으면 진정한 싸움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이 없으면 상도 없을 것입니다. 패배하는 자가 없으면 승리하는 자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겪는다고 해서 낙심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 어려움을 통해서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 투쟁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사도직 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도록 도와줍니다. 예수님께서 올리브 동산에서 그리고 나중에 십자가 위에서 조롱받으시고 버림받으시는 그 극심한 수난의 순간들을 묵상하면서, 이런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분의 마음에 드는 제자가 되려면 그분의 충고를 마음 깊이 새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그래서 저는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주님, 저에게 십자가가 없는 날이 하루도 없게 해 주소서!” 그러면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의 내면은 더욱 강해지고 우리의 죄악을 넘어 하느님의 편이 될 것입니다.

예컨대, 못을 하나 잡으십시오. 여러분이 망치로 벽에 못을 박는데 아무런 저항이 없으면, 거기에 무엇을 걸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우리가 희생을 통해서 단련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주님의 도구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 만일 우리가 온갖 어려움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그것을 활용한다면, 어렵고 불쾌한 일들이 엄습하여 고통스럽고 불안할 때에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처럼 큰소리로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할 수 있습니다”(마르 10,39).

이것이 바로 우리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탕자가 방종한 생활로 재산을 탕진하고, 더욱이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 잊고 지내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루카 15,22-23). 우리가 회개하고 하느님께 다가갈 때,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끔찍한 처지에서 보물을 이끌어 내시고, 우리의 나약함에서 힘을 이끌어 내십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하느님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날마다 그분께 간다면, 그분과 사랑의 대화를 나누고 행동으로 사랑을 확인시켜 드린다면, 모든 것을 그분의 전능하신 힘과 자비에 의탁한다면, 그러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준비하시겠습니까? 아버지를 배반하고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왔다고 잔치를 열어 주신다면, 언제나 그분 곁에 있으려고 노력한 우리를 위해서는 무엇을 마련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를 괴롭힌 자들이나 우리가 겪은 수모들을, 그들이 아무리 불공정하고 야만적이며 무례하였을지라도, 기억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불만 사항들을 목록으로 만들어 쭉 읽어 내려가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에게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본보기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게다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옷처럼 입고 벗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약해지거나 더 강해질 수 있고, 또는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 초자연적 삶과 더불어 우리 신앙은 튼튼해지며, 하느님 없이 비참하게 헐벗은 자에 대한 생각은 영혼을 두렵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하고 감사합니다. 저의 하느님, 제가 저 자신의 가엾은 삶을 바라볼 때, 어떤 허영을 부리거나 더욱이 어떤 자랑을 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저에게 보이는 것이라고는 제가 언제나 겸손해야 하고 뉘우쳐야 하는 수많은 이유들뿐입니다. 섬기는 삶이 인간으로서 가장 고상한 소명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