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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하느님의 친구들»에 성덕 → 달성 가능한 목표, 영웅심 항이 있음.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기는 하지만, 결코 잊지 못할 일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발렌시아에 있는 주교좌성당에 기도하러 가서 가경자 요한 리다우라의 무덤 옆을 지날 때였습니다. 제가 듣기로, 이 사제는 이미 여러 해 전에, 얼마나 오래 사셨냐는 질문을 받고 아주 자신 있게 발렌시아 사투리로 “아주 조금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섬기는 데 쓴 시간은 아주 조금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여기 있는 많은 분들에게, 세상 한가운데서 자신의 환경에서, 자신의 직업과 업무에서 주님을 가까이 따르고 섬기기로 결심한 해를 헤아리는 데 한쪽 손의 다섯 손가락도 여전히 충분하지는 않은가요? 얼마나 오래 사는가는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주님의 초대를 영혼에 깊이 새기고 그 확신을 불태우는 것입니다. 주님의 초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거룩함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적 생활을 바르게 연마하여 그리스도인 덕목들을 날마다 실행에 옮기려고 노력할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의무를 간신히 이행하거나, 평균적으로 이행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상대적으로 뛰어난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 그대로 가장 엄격하고 정확한 의미에서, 영웅적 실천을 목표로 싸워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 앞에 제시하는 목표는, 아니 그보다는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정해 놓으신 목표는 환상에 불과하거나 달성이 불가능한 이상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 같은 보통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구체적 본보기를 찾아 여러분에게 보여 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아주 평범한 교차로처럼 보이는 곳에서 “남몰래”(요한 7,10)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집니다(마태 16,24 참조). 우리 시대와 같이 전반적으로 타락한 시대, 타협과 좌절의 시대, 또한 방종과 무질서의 시대에는, 제가 사제 직무를 시작할 때부터 계속 지녔던 단순하지만 깊은 확신을 굳건히 지키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확신 때문에 저는 불타는 열망, 곧 모든 인류에게 “이 세상의 위기는 성인들의 위기”라고 말하고 싶은 열망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의 목표는 달성하기 어렵고 저 높은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거룩하게 태어나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맙시다. 거룩함은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응답이 서로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저술가 가운데 한 분은 하느님과의 일치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자라는 모든 것은 작게 시작합니다. 그것이 점차 크게 자라는 것은 꾸준히 계속해서 영양분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만일 철저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면, 비록 여러분이 종종 자기 자신을 극복하거나 나약한 몸으로 저 높은 곳에 계속 오르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주 세심한 부분까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성덕은 여러분의 노동과 일상 의무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행함으로써 얻을 수 있으며, 이것들은 거의 언제나 사소한 현실들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떤 가톨릭 신자는 저를 매우 슬프게 합니다. 그는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도록 세례로써 부르심을 받은 하느님의 자녀이지만, 오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때에만 기도하는 종교심, 형식적인 신앙심으로 자신의 양심을 싸늘하게 합니다. 그는 의무 축일에는 대개 미사에 가지만, 자신의 위장을 꼼꼼히 챙기며 결코 식사를 거르지 않습니다. 그는 신앙 문제들에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자신의 직업을 포기하기보다는 콩 접시와 신앙을 맞바꿉니다. … 그러고는 무례하거나 가증스럽게도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데 힘입어 세상의 성공을 추구합니다. 안 됩니다! 단지 신자라는 꼬리표만 붙이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저는 여러분이 참되고 확고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려면, 알맞은 영적 음식을 찾는 일에 꾸준히 힘써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경험하였을 수도 있고, 또 제가 종종 여러분이 낙담하지 않도록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내적 생활은 날마다 거듭거듭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도 저도 알다시피, 내적 싸움은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인데(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여러분에게 이야기하면서 저도 제 영혼이 우리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하는 필요성을 되새깁니다.), 여러분도 양심 성찰을 할 때에, 종종 작은 실패들이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때때는 그러한 실패들이 아주 심각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도 부족하고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지도 못하고 희생정신과 자기 연마도 무척이나 미흡해 보일 것입니다. 이제 진실한 통회 행위로써 보속의 정신을 키우고자 하는 열망을 키우십시오. 그러나 마음의 평화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아마도 맨 처음 시작부터 먹구름이 몰려오고, 동시에 우리의 성화를 저지하려는 원수들이 아주 맹렬하고 세련된 심리적 테러 기법을 사용해서, 심지어 오랜 세월 동안 매우 합리적이고 올바르게 행동해 온 사람들조차도 그릇된 방향으로 끌어당길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들의 목소리가 질 낮은 금속으로 만든 종, 그것도 깨진 종의 소리처럼 들리고 목자의 호루라기 소리와는 매우 다를지라도, 그들은 교묘하게 말을 왜곡시킵니다. 말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선사하신 재능들 가운데 가장 귀중한 것에 속하며, 주님과 피조물들을 향한 사랑과 우정이라는 심오한 생각들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말의 왜곡 때문에 야고보 성인은 혀를 “불의의 세계”(야고 3,6)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해악은 거짓말, 비방, 명예 훼손, 사기, 모욕, 구질구질한 아부 등 너무도 엄청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