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 목록

«밭고랑»에는 인간적 존경를 주제로 하는 12 항이 있음.

진리가 지켜지느냐 마느냐 하는 판에 하느님을 불쾌하게 해드리지 않기를 바라는 동시에 세상 사람들과도 충돌하지 않기를 바라는 듯한 어정쩡한 태도를 취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느님과 세상은 대립관계입니다. 둘 중 하나를 택하는 방법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희생은 모든 것이 타버리는 전번제(全播祭)여야 합니다. '남들이 어떻게 말할까'라는 걱정, 그리고 평판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다 태워버려야 합니다.

‘거룩한 뻔뻔스러움’은 복음 속에 매우 깊은 근거를 갖고 있음을 이제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하느님의 뜻을 수행하십시오. 다음 일들을 깊이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곧 예수께서는 거짓으로 고발당하셨고, 예수께서는 침뱉음을 당하시며 얻어맞으셨고, 예수께서는 보잘것 없는 모임들 앞에 끌려나가셨으나···, 예수께서는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결심: 모욕을 당하더라도 참고, 굴욕감이 뒤따르리라는 것을 각오하고, 우리 주님의 자비로운 사랑이 우리들에게 맡기기를 원한 하느님의 일로 서 참으십시오.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행세하는 것에 두려움과 부끄러움 느끼고 그것에 진다면,우리가 저지르는 해악이 얼마나 큰 것입니까. 생각만 하여도 무섭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하느님이나 사도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자기변명의 필요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인간적인 덕행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영적으로 굉장히 일그러졌고 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다 기쁘게 해 주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론(異論)을 제기하고, 불평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양에게 좋은 것은 늑대에게는 나쁘다.”

‘위협'을 입에 담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적 앞에서 겁을 먹는 사람들. 그대가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대는 그 사업을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협조하지 않기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거나 협력하고 있다고 생각되거나 하는 것조차 최대한 피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대는 있는 그대로의 나 이상으로 좋게 보이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이나 사람들로부터 좀더 일관된 삶을 살라는 요구를 받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본심 아닙니까.

충분히 단단한 결심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애인과의 관계를 끊으려고 펜을 들어보니 망설이는 마음에 지고 말았습니다.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졌습니다. 인간이므로 당연한 것입니다. 그 기분을 안다, 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주님의 요구에 부응하여 완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므로 버려야 할 것들이 있다고 알고 있지만, 이 세상에서의 사랑은 버려야할 목록 안에 들어 있지 않은 듯이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허약함으로 인해서, 즉 우리가 부서지기 쉬운 진흙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실수를 저지르기는 하지만, 교회의 교리를 완전무결하게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용감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영웅적인 겸손의 마음으로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열심히 진리를 옹호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혹자는 신앙과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무분별, 무모하다고 칭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을 미친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나 남을 신뢰하는 것이 더 미친 것 같아보입니다.

그대는 편지로 저에게 말하기를 마침내 고해소에 들어가서 굴욕을 참고 한 인간 앞에서 당신 생활의 배설 구멍 —그대의 말입니다— 을 열어야 하는 수모를 경험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언제가 되면 그런 자만심을 버리겠습니까. 그 자만심만 버리면 기름 부어진, 다른 하나의 그리스도 —그리스도 자신一 이며 그대에게 하느님의 용서인 사죄의 말씀을 주는 “그 사람”에게 가서 고백하고 기쁨에 넘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