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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밭고랑»에 걸림돌 → 사도직에 항이 있음.

저는 그 단순한 사람의 얼굴이 벌개진 것을 보았는데 그는 거의 눈물을 쏟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는 그가 번 정직한 돈을 내어 좋은 일들에 관대하게 기여했는데도 그는 “선한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부정직하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하느님의 전투에서 초심자의 솔직한 마음으로, 그는 투덜거렸습니다. “그들은 제가 희생을 치루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나를 희생시킨다!”

저는 그에게 천천히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는 내 고상(苦像: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 친구(親口:입맞춤)하였고, 그의 분노는 평화와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 문제를 전영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일에 관해서 그대가 말했기 때문에 그들이 분개합니까? 글쎄요, 만약에 그대가 사도 중의 사도가 되는 소명을 받았던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가끔 그들은 이해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그들이 장님인 것같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제대로 이해되도록 애쓰지 않은 사람은 그대였습니다. 그대는 그 점을 고쳐야 합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의 배움터를 자주 방문한다면 수많은 몰이해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도 놀랄 일은 아닙니다. 그 사람들도 조금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당신을 많이 도울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마음이 곧은 사람이 질투와 시샘에 사로잡힌 사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렇게 맑은 물을 흐리다니 얼마나 사악한 마음입니까.”

사도직의 사업에 대한 비판은 통상 다음의 두 가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 일이 어떤 사람들에 의해 극히 복잡한 구성으로 제시되는 경우와, 다른 사람들이 그 일을 편하고 쉽다고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종당에 그러한 “객관성”은 적절한 분량의 쓸데 적은 소리가 투입된 편협성으로 졸아듭니다. 고민하지는 마십시오. 그러나 그들에게 화내지 말고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하느님에게 충실한 친구에 대해 나쁘게 말한 사람들이야말로 그대가 좀 더 착하게 행동하기로 결심했을 때 그대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 세기가 지나가는데도 가톨릭 신앙은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아있기 때문에 분파주의자들은 ‘광신(狂信)’이라고 부르고 아우성칩니다.

한편, 분파주의자들의 광신은 진리와는 관계가 없으므로 시대를 달리할 때는 그 겉옷을 바꿉니다. 그들은 사실에 바탕을 둔 내용이 결핍되어 있는 단순한 말뿐인 요괴를 성교회에 대항하여 쳐듭니다. 그들의 “자유”는 사람들을 속박하고, 그들의 “진보”는 인간성을 정글 속으로 되돌아가게 하며, 그들의 “과학”은 무지를 감춥니다. 그들의 좌석 뒤에는 단지 해묵은 망가진 물건들이 감춰져 있을 뿐입니다.

그대의 믿음을 위한 ‘광신(狂信)’이 매일같이 강해지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인 진리를 위한 유일무이한 방어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