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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밭고랑»에 믿음(신덕) → 본질과 필요성 항이 있음.

신앙도 희망도 없는 사람이나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없어 고뇌에 찌든 사람들을 대하면서 그대는 하나의 목표를 찾았습니다. 곧 ‘그리스도’입니다.

목표를 발견한 덕분에 생활에 끊임없이 새로운 기쁨이 쏟아지고 그대는 변할 것입니다. 미처 몰랐던 아름다운 일들이 나날이 눈앞에 무한한 확장을 보이며, 그대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이 넓은 길이 얼마나 기쁨으로 가득 찬 것인지를 보여줄 것입니다.

희망한다고 빛을 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은 주님이 빛을 온전히 소유하고 계시고, 그 빛 속에 살고 계시다는 것을 보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주님이야말로 빛인 것입니다.

‘기도’는, 스스로의 헤아릴 수 없는 비참함과 하느님의 위대함을 인정하는 사람의 겸손입니다.그런 사람은 하느님을 향하여 하느님을 예배하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기대하고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이성의 겸손입니다. 이성이 겸손하면 스스로의 판단을 버리고 교회의 판단과 권위 앞에 엎드리죠.

‘순종’은 의지의 겸손입니다. 의지가 겸손하면 하느님 때문에 남의 뜻을 따릅니다.

‘정결’은 육체의 겸손입니다. 육체가 겸손하면 정신을 따릅니다.

외적인 ‘희생’은 감각의 겸손입니다.

‘속죄’는 하느님께 바친 모든 정념의 겸손입니다.

그리고 ‘겸손’은 내적 싸움의 길에서의 진리입니다.

세상에 관한 일에서는 남의 생각이 옳을 수 있음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같은 문제를 다른 빛, 다른 그늘, 다른 윤곽 아래에서, 즉 당신과 다른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도덕에 있어서는 유무를 막론하고 우리의 어머니 교회의 기준이 존재합니다.

전 모르겠습니다. 왜 그대는 도덕과 신앙을 얘기할 때 스스로를 자주 독립한 가톨릭 신자라고 말합니까.

도대체 누구로부터 독립해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 잘못된 독립은 그리스도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관한 일에서는 절대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합금을 만들었을 때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질 높은 쪽의 금속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의 가르침이라는 보물은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복음서가 말하듯이, 그대는 언제 어느 때, 소유자, 즉 하느님께 책임을 물을지도 모릅니다.

교회에 갈 뿐만 아니라 사람들 눈에는 신앙심이 깊어 보이고, 분명 진심으로 믿고 있는 가톨릭 신자겠지만, 어리석게도 교회의 적의 앞잡이를 메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라고 당신은 말했습니다. 나도 동감합니다.

에큐메니즘(교회일치운동)과 다양성, 민주주의 등 갖가지 이름을 마구 쓰다 보니 최악의 적, 즉 무지가 그들의 집에 잠입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노(No)라고 하는 것은, 곧 신앙의 진리를 부정하거나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스스로를 가톨릭 신자로 선언하는 그대는 예수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 연구를 계속해 당신이 확신하는 이유를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리'와 과학, ‘진리’와 생활 사이에 모순이 없는 것, 모순이 있을 수 없는 것을 나타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몸이니라···”, 빵의 형상 속에 감추어진 예수님의 산 제사가 행해졌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주님의 살을 가지고 그리고 주님의 피를 가지고, 주님의 영혼을 가지고 그리고 주님의 신성을 가지고 거기에 계십니다. 주님은 토마스가 주님의 영광스러운 상처 안에다 자기 손가락들을 놓았던 그 날의 주님과 같으십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퍽 많은 경우에, 그대는 주님을 만났을 때 그대가 아는 어느 사람에게라도 보여 줄 만한 단순히 좋은 예절에서 나오는 가벼운 인사표시도 보여드리지 않은 채 어슬렁거리고 지나갑니다.

그대는 토마스보다 훨씬 덜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도 마음도 온통 불결의 길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신앙은 점차 희미해졌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문제가 아닌 것은 분명한데요.

그리스도교는 ‘특이’하니, 그것은 이 세상의 것들과는 쉽사리 섞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속적인 현수막으로 사용될 때 아마도 가장 큰 ‘성가신 방해물’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처럼 평범한 신앙으로 단지 살기만 하는 생활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당신은 말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당신은 개인적인 신앙, 즉 책임감이 수반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